역사·독자성·가치 갖춰야
1년 생산량이 1000여 개가 채 되지 않는 독립 시계 브랜드 프랑수아 폴 주른(F.P. Journe)처럼 마이크로 하이엔드와 하이엔드의 중간 규모에 해당하는 브랜드를 제외한다면 파텍필립은 큰 이견이 없는 하이엔드 브랜드다.
하이엔드의 조건은 크게 세 가지 정도다. 첫째는 하이엔드로서의 역사, 둘째는 기술의 자주성과 독자성, 마지막으로는 가치다. 파텍필립(Patek Pillippe)은 이 모든 조건을 두루 충족한다. 올해로 창립 176주년을 맞이한 파텍필립은 시계 디자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 모델 칼라트라바를 비롯, 수많은 컴플리케이션을 만들어 왔다. 1970년대 일본이 쿼츠 시계를 발표하며 그 정확성을 따라갈 수 없었던 스위스의 시계 산업이 크게 흔들렸을 때에도 파텍필립은 상대적으로 흔들림이 적었다. 다른 브랜드들이 회복에 시간을 소요할 때 오히려 그들은 성장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브랜드들이 그룹에 하나하나 매각돼 재정비의 시간을 가질 때에도 독립 브랜드로서 유지돼 왔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큰 굴곡이 없는 것을 강점으로 들 수 있다.
이보다 훨씬 긴 역사를 지닌 블랑팡(Blancpain)은 애초부터 하이엔드로 시작되지 않았고, 역사로 보나 업적으로 보나 밀릴 것 없는 브레게(Breguet)가 1995년 스와치 그룹에 합류하기 이전인 인베스트코프 시절의 품질이 가장 좋지 않았다는 것은 시계 마니아라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굴곡 없이 꾸준한 역사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하이엔드에 있어 중요하며, 올해로 260주년을 맞이하며 꾸준함을 과시해 온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도 하이엔드의 조건 하나를 확실하게 갖춘 브랜드다.
하지만 예외는 있다. 독일의 랑에 운트 죄네(A.Lange & Sohne)는 40여 년의 단절된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하이엔드라는 조건에 흠이 되지 않는다. 이유는 독일 시계의 생산지인 글라슈테가 동독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고, 동독 체제에서 시계 브랜드들은 강제로 GUB (Glashutter Uhrenbetriebe)라는 국영기업으로 통합됐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아름답고 기술적인 시계의 생산이 중단되고, 대량생산의 값싼 시계만을 만들어야 했다. 이에 랑에 가문의 발터 랑에는 브랜드의 명예를 되살리기 위해 동서독을 넘나들며 재건 계획을 세웠다. 1990년 마침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그로부터 불과 4년 후 랑에 운트 죄네는 부활을 선언한다. 4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부활이 가능했던 이유는 발터 랑에가 목숨을 걸고 분단체제하에서 동서독을 넘나들며 준비를 해 왔던 덕분이다. 175년의 역사 중 무려 40여 년을 잃어버렸음에도 단절의 역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스위스 시계업계는 기본적으로 분업화를 통해 시계를 만들어 왔다. 종교박해를 피해 스위스의 험준한 산맥으로 숨어든 위그노들은 지금으로 치면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상인이나 솜씨 좋은 장인들이 많았고, 이들은 농한기인 겨울에 시계 부품을 만들어 납품했다. 그들이 만든 부품은 품질이 빼어났다. 어떤 집은 시곗바늘을 잘 만들고 또 어떤 집은 무브먼트를 잘 만든다는 식으로 소문이 났고 이것이 점차 발전해 스위스 시계 산업이 된다. 이런 역사에 기인해 스위스 시계는 분업화를 기본으로 했고 또 당연했다. 하지만 예거 르쿨트르(Jaeger-Lecoultre)는 스위스 시계업계의 상식과 배치되는 형태로 발전했다. 다른 시계 브랜드에 무브먼트를 납품하기도 했고 자사 브랜드의 시계를 만들기도 했다. 한 마디로 스스로 시계를 만드는 모든 공정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이는 보다 개성적인 시계, 독립적인 시계 만들기의 중요성이 커진 요즘 그 가치가 더욱 높아졌고, 예거 르쿨트르와 같은 브랜드를 매뉴팩처라고 지칭하며 구분한다. 롤렉스는 하이엔드일까
시계 브랜드의 그룹화가 가속되며 그룹 간 경쟁에 의해 배타적인 성격이 강해진 것도 원인으로 많은 브랜드들이 분업화를 탈피해 매뉴팩처화를 진행하는 이유다. 예거 르쿨트르는 역사도 역사지만 이러한 매뉴팩처링에서 가장 독보적인 존재로 그 가치가 뚜렷하다. 오데마 피게, 파텍필립, 바쉐론 콘스탄틴은 과거 예거 르쿨트르로부터 무브먼트를 공급받아 사용했으나, 현재는 매뉴팩처로 전환을 완료했거나 진행 중이다. 물론 매뉴팩처링이 가능하다고 하이엔드의 조건을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매뉴팩처링의 수준 또한 중요한데, 명실 공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시계 브랜드 롤렉스(Rolex) 역시 빼어난 매뉴팩처링 능력을 지녔지만 하이엔드로 분류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롤렉스는 이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단순한 기능의 시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예거 르쿨트르를 비롯해 앞에서 열거한 브랜드들은 수준 높으며 독자적인 기술력을 지니고 있다. 랑에 운트 죄네는 매뉴팩처링에 고유한 독일적 양식을 더해 스위스 브랜드와 차별화를 이뤄내 단기간에 하이엔드의 자리를 되차지했다. 스위스 산도스 재단(모회사는 노바티스)이 운영하는 파르미지아니는 시계의 핵심 부품인 헤어스프링을 제조할 수 있는 독보적인 브랜드의 하나이며, 비록 역사는 짧지만 시계의 한계를 뛰어넘겠다는 강렬한 콘셉트를 실현하기 위해 생산비를 아까워하지 않는 리차드 밀(Ricard Mille)도 기술적인 면에서 하이엔드의 조건 하나를 갖춘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시계의 가치는 쇼윈도 속 시계에 달린 가격표로 결정되지만, 진정한 가치는 2차 시장에서 결정된다고 봐야 옳다. 시계의 2차 시장은 우리 주위의 친숙한 중고명품숍이나 전당포이기도 하고,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 앤티쿼룸, 필립스 같은 시계 전문이거나 시계에 강한 경매 시장이기도 하다.
시계 전문 경매로 오랜 경험을 지닌 스위스 제네바의 앤티쿼룸 경매 결과를 보면 어떤 브랜드가 가치를 인정받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간 파텍필립이 최고가, 평균가에서 꾸준히 강세를 보여 왔고 최근 필립스 경매를 중심으로 바쉐론 콘스탄틴의 재평가가 이뤄지는 중이다. 물론 파텍필립이 경매 시장에 낙찰자로 개입해 그 가치를 유지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소문 중 하나지만 말이다. 가치가 폭락했던 랑에 운트 죄네의 빈티지는 브랜드의 부활에 따라 가치가 폭등했다. 한때 랑에 운트 죄네의 골드 케이스 시계는 금값 정도밖에 안 됐지만 이제 그런 물건을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브랜드가 부활했다고 그 가치가 오르는 것은 아니다. 랑에 운트 죄네가 성공적인 부활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브레게는 창업자인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가 이뤄 놓은 수많은 위대한 업적 덕에 경매 시장에서 빈티지들이 우량주에 속하며, 리차드 밀처럼 하이엔드의 하이엔드를 지향하는 콘셉트는 컬렉터와 마니아들에게 인정받아 아직 빈티지가 아닌 현행품임에도 단기간 급등하기도 한다.
고급 시계의 등급은 처음에 언급했듯이, 등수를 매겨 줄 세우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중에서 몇 개의 항목에 해당하는지 생각해본다면 범위를 좁혀 브랜드를 가려내는 데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항목 하나를 더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아름다움만큼은 논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혹 아름다움이 역사, 기술, 가치를 모두 압도할 수 있을 만큼 큰 영향을 끼칠지도 모를 일이나 이것이 잘못된 생각은 아니다. 기계식 시계의 본질 중 하나는 아름다움이니까. 기억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누가 몇 등이 될지는 전적으로 당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사실 말이다.
구교철 타임포럼 편집장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