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꿨다. 광활한 공간 사이로 마음으로만 그리던 유토피아가 꿈처럼 솟아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산과 골짜기가 세상 어디에도 없을 색으로 몽롱하게 피어 있었다. 분명 꿈에서 보았을진대 과거 어디선가 꼭 만났던 것만 같은 풍경. 현대 한국화의 대가 석철주(65) 화백이 ‘신몽유도원도’ 신작을 통해 우리를 이상향으로 데려간다.
도건(道建) 석철주 화백: 눈앞의 산수가 아닌 마음속 산수를 담다
‘유토피아’의 어원은 제법 흥미롭다. 그리스어로 ‘없는’이란 ‘ou-’와 ‘장소’라는 ‘toppos’가 모여 오늘의 유토피아(utopia)가 됐다. 어디에도 없는 장소이기에 역설적으로 이상향(理想鄕)이 된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있어 유토피아는 무엇일까.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며, 우리의 정신은 어떤 지지대에서 솟아나는 것일까. ‘한국적인 것’이란 과연 무엇이며, ‘나의 것’은 또 무엇인가. 누구나 마음속으로 질문하지만 답은 천태만상일 이 주제를 일생 동안 고민해 온 한 작가가 있다. 1985년 첫 개인전을 연 후 30년 동안 쌓아 온 화업을 한 공간에 그러모은 전시 ‘몽·중·몽’으로 돌아온 석철주 화백이다.

상상하기 힘들지만 어렸을 적 그의 꿈은 야구소년이었다. 중학교를 운동특기생으로 들어갈 정도로 전도유망했으나, 초등학교 때 당한 교통사고의 후유증 때문에 운동을 그만둬야 했다. 목수였던 아버지는 이웃에게 “그림을 좀 가르쳐달라”며 낙심한 아들을 의탁했고, 그 이웃이 하필이면 한국화의 대가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년) 선생이었다. 이 기막힌 인연으로 인해 손으로 무언가 만들기를 좋아하던 야구소년은 도제식으로 한국화를 배운 마지막 세대, 석철주 화백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스물일곱, 늦깎이로 미대생이 됐지만 그는 천부적인 예술가였다. 대한민국 전람회에 일곱 번이나 입선을 하고, 중앙미술대전도 세 번이나 특선을 했다. 1985년 서울갤러리에서 첫 전시회를 열고나서는 미술 기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기 시작했다. 1990년 ‘생활일기’를 시작으로 독, 버선, 실패 등의 생활 속 오브제를 통해 ‘한국적인 것’을 고민하던 그는 안견의 ‘몽유도원도’ 진본을 보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는다. 사진으로 보던 것과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그렇게 얻은 영감으로 2005년, 그의 작품 중 진수라고 꼽히는 ‘신몽유도원도’ 연작이 탄생했다. 10월 18일까지 고려대 박물관에서 열리는 ‘몽·중·몽’은 이번 전시를 위해 1년간 꼬박 새로 그린 ‘신몽유도원도’ 시리즈를 볼 수 있는 값진 기회가 될 것이다.
도건(道建) 석철주 화백: 눈앞의 산수가 아닌 마음속 산수를 담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꿈결 같은 세계
깜짝 놀랐어요. 사진으로 미리 본 작품과 실제와의 차이 때문에.
“그렇죠? 이 그림들이 ‘사진발’을 정말 안 받거든. 훨씬 몽환적이면서 은은한 느낌이 들 거예요. 표면을 칠한 것이 아니라 색감이 배어서 ‘우러나오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꼭 직접 와서 봐주십사 하고 청하는 이유가 있어요.”

‘회고전’이 아닌데 회고전이라고 기사가 나왔다면서요.
“아마 3층에서 1985년부터 그린 작품들을 순차적으로 볼 수 있어서 그런 말이 나온 것 같은데. 좀 민망하죠. 제가 칠순이나 팔순 즈음 됐으면 모를까.(웃음)”

그래도 30년 화업을 한자리에 담은 전시는 아무나 할 수 없지요. 28년 동안 몸담았던 추계예대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자리이니, 소회가 남다를 법도 한데요.
“아, 그런 질문 많이들 하시는데 크게 남다를 건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무슨 일을 하든 꾸준히 작업을 해 왔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저 이제는 제자를 가르치지 않고 작업에만 몰두하게 됐을 뿐이죠. 다만, 제자들에게 선배로서 좀 더 많은 것을 해줬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렇지만 제가 열심히 제 작품으로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것, 그것도 또 하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해요. 추계예대 1호 남자 졸업생, 1호 모교 출신 교수, 1호 정년퇴임 교수로서의 책임감이기도 하고요. ‘그림’ 하나만 놓고 본다면 그 누구도 제게 뭐라 할 순 없을 겁니다. 꾸준히, 부끄럼 없이 최선을 다해 왔으니까. 이것 하나만큼은 스스로 봐도 참 대단하고 자랑스럽지요.”
도건(道建) 석철주 화백: 눈앞의 산수가 아닌 마음속 산수를 담다
박물관 지하 1층 전시시설이 전부 신작으로 꾸며져 있는데, 원래 회화용 공간이 아니라고 들었어요.
“맞아요. 3층은 현대미술관인데 지하 1층은 유물 전시를 위해 설계된 공간이래요. 그래서 공간이 굉장히 좋은데도 작가들이 많이 힘들어했을 거예요. 그림이 압도하지 못하면 공간에 묻혀 버릴 테니까. 그래서 중앙에 ‘방’을 만들었죠. 방 안에 ‘독’과 ‘자연의 기억’을 매치하고 창을 내어 ‘신몽유도원도 15-30’ 시리즈가 파노라마로 보이도록 걸었지요. 밖에서 안을 보는 풍경과 안에서 밖을 보는 풍경, 두 가지 선물을 주고 싶었거든요.
끝까지 애를 먹인 작품은 ‘신몽유도원도 15-40’ 시리즈죠. 1층 라운드로 된 공간에 걸어 두려고 폭을 나눠서 제작한 것인데, 걸고 보니 건물 구조상 틀어져 보여서 아래층으로 내려와 병풍처럼 건 거예요. 그 대신 춘하추동을 표현한 컬러풀한 시리즈를 올렸는데 음, 탁월한 선택이었어요.(웃음) 고생은 시켰지만 디테일은 가장 마음에 들어요. 다른 시리즈와 다른 느낌으로 나왔거든.”

격자무늬나 줄무늬로 한 번 더 표면 처리를 하니까 훨씬 몽환적으로 보여요.
“요즘은 어딜 가든 풍경 자체를 눈으로 즐기기보단 카메라나 휴대전화로 사진 찍기 바쁘더군요. 그렇게 ‘픽셀’로 바라보는 풍경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색감을 한 번 눌러주면서 몽환적인 이미지가 강해졌죠. 다만 이번에 새로 그린 ‘신몽유도원도’들은 실제로 제가 봤던 산세를 떠올리며 그렸더니 디테일이 좀 더 사실적으로 나왔죠. 설악산이든 지리산이든 언젠가 제가 봤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산세와 골짜기를 만들어 나갔어요.”

현대인에게 결여된, 절실한 무엇이 유토피아라고 보셨어요. 선생님의 ‘몽유도원’은 어디에 있나요.
“제 마음속에 있지, 뭘. 하하. 저는 독 안의 장맛처럼 ‘숙성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오래 두고 봐도 질리지 않는, 그래서 사람들이 제 그림을 통해 어떤 ‘힐링’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잠시나마 복잡한 이 도시에서, 산을 마음대로 다닐 수 없는 사람들이 ‘아, 내가 다녔던 산이 저런 느낌이었지’ 하고 위안을 받는다면,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 무척 기쁘겠죠.
참, 아침에 일어나서 지난밤 꾼 꿈이 선명하게 생각나면 ‘참 잘 잤다’는 생각이 들어요. 본래 반대라던데, 참 묘하죠?”


지우고, 씻고, 치유하고
동양화의 매력은 ‘일필휘지’와 여백에 있겠지요. 선생님께서는 전통을 현대미술로 잘 풀어낸 모범답안으로 꼽히시고요.
“재료로써의 동양화와 정신으로써의 동양화는 다릅니다. ‘정신적인 동양화’를 한다면 그 ‘정신’에 대해 먼저 선행학습이 돼야겠지요. 아시다시피 ‘우리 것’이라는 정의가 명쾌하게 내려진 것도 아니고, 동양철학이 서양철학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 머무르고 있으니까요. 그걸 알고 난 다음에는 무엇보다 ‘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의 그림 말고 제 그림. 그걸 그리기 위해 재료가 따라오고, 표현이 따라오는 거죠.
사람들은 제 그림을 ‘물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해요.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산수화를 그리는데, 바탕색 위에 흰 물감을 덧칠한 다음 마르기 전에 원하는 모양으로 ‘지워내는’ 방식이니까요. 지울 때 물의 힘과 속도를 조절해 형태와 농담을 조절하는 것이죠.”

신기하네요.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다시 흰 덧칠을 해서 수정하시나요.
“그건 안 돼요. 괜히 ‘일필휘지’가 아니에요. 한 번에 완성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또 사람들이 ‘이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얼마나 걸리나요’ 하고 물어봐요. 바탕색을 일고여덟 번 칠하고, 밑 색을 네 번 칠해야 본 작업에 들어가니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한데, ‘한번에 그린다’는 인식 때문에 쉽게 그린다는 오해를 많이 받죠. 속상하지. 점 하나 찍기까지 얼마나 오랜 고민이 필요한데. 하하.”
도건(道建) 석철주 화백: 눈앞의 산수가 아닌 마음속 산수를 담다
1985년 첫 개인전에서 ‘탈춤’, 1990년 ‘독’, 2000년 ‘생활일기’, 2005년 ‘몽유도원도’, 그리고 지금 ‘신몽유도원도’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작품 활동 동안 선생님의 내면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어떤 가치도 있었을 것 같고요.
“제 평생의 화두는 전통에 바탕을 둔 것이에요. 제 이야기와 어머니의 이야기. 물론 저는 서촌에서 태어난 서울 토박이지만, 어머니가 늘 장독대에 머물던 모습이 선명해요. 젊었을 때 관광가이드로 전국 산천을 돌아다니며 보았던 풍경들도 잊을 수 없고요. 이런 것들이 바탕이 돼 작품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림을 ‘지워내고 있노라면’ 어떤 마음이 드실지 궁금합니다.
“‘치유’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상처 나면 새 살이 돋죠? 똑같아요. 지움으로 인해 새로운 것이 다시 돋아나잖아요? 지운다고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거든. 즐거운 기억은 금방 사라져도 사람마다 아픈 기억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데, 우리는 각자 그것을 씻어 버리려고 노력하죠. 저 역시도 지우는 행동을 통해 한을 떨쳐내려 하는 것이고, 떨쳐내지만 그 안에서 또 새로운 희망을 찾아요.”

그러고 보니 민간 신앙에서 한을 풀고자 할 때 ‘씻김굿’을 지내잖아요. 그 ‘씻김’과 물로 ‘씻어내는’ 선생님의 그림, 재미있네요.
“하하, 말이 나와서 얘긴데 저도 민간 신앙에 관심이 많아요. 제가 영적으로 무진장 강한 사람이라더군요. 젊었을 때 심심풀이로 점을 보러 가면, 무당이 문 밖까지 배웅 나올 정도였다니까. 참,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개인적으로 정말 뿌듯했어요. 작곡을 전공한 우리 딸이 오픈식 날 제 그림을 주제로 ‘자연의 기억’, ‘신몽유도원도’, ‘자연의 기억, 들꽃 이야기’란 음악회를 준비했고, 안사람이 제 그림과 작업실, 서촌을 주제로 ‘화가 할아버지’란 동화책을 헌정해줬거든요. 안사람도 서양화를 전공했어요.”

허락하는 한 마지막까지, 손에서 붓을 놓지 않겠다고 하셨지요.
“스승님께서 그러하셨듯, 저 역시 수족이 움직이는 한 작품을 할 거예요. ‘화가’라는 직업이 물질적으로 빈곤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붓을 들 힘만 있다면 좋아하는 일을 언제까지고 할 수 있으니 참 행복한 직업이기도 하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꾸준히 ‘제 그림’을 그려나갈 생각입니다.”


이현화 기자 lee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