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great teaching] 청년이라는 아픈 이름 ‘데미안’
헤르만 헤세의 수많은 저서들은 청년들의 성서로 추앙받고 있다. 그중에서 ‘데미안’은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밑에서 아픔을 겪는 청년들을 위한 숭고한 통찰이다.

아마도 중학교 2학년 때였으리라. 개학 첫날 30대 중반쯤 돼 보이는 여자 선생님이 담임선생님으로 들어오셨다. 한 반에 70여 명, 한 학년에 15~16개 반 이상 되는 학교였던지라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선생님들이 많았고, 학교 앞이 아니라면 인사도 못하고 그냥 지나칠 만큼 익숙하지 않은 선생님들이 적지 않았다.

담임선생님도 그날 처음 뵈었는데 당시 인기 있던 가수 이용이 쓸 만한 커다란 안경을 눌러 쓴 모습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던 선생님이었다. 그런 선생님은 69명의 학생들을 모두 눈 안에 담으시려는 듯 한동안 말없이 둘러보시더니 ‘멋지게’ 1년을 보내자는 식의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이 ‘멋지게’에 해당되는 일이 주로 ‘책 읽기’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강조하셨다.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인간이 되기 위해’ 읽어야 하는 두 권의 책 중 한 권이 바로 ‘데미안’이었다. 그것도 한 번만 읽어서는 안 되고 여러 번 읽어야 하는데 본인은 열 번을 읽었다고 했다. 이 말은 듣는 순간 ‘우리도 열 번쯤 읽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반 거의 모두는 ‘데미안’ 열 번 읽기에 도전했다. 그러나 하이틴로맨스에 흠뻑 빠져 있던 중학교 2학년 여학생들에게 열 번은 도 닦기와 다를 바 없어서 제대로 읽은 것은 한 번 정도였고 2회부터 10회까지는 ‘읽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그런 겅중겅중한 읽기였던 것 같다.

담임선생님이 이토록 ‘데미안’을 권했던 것, 아니 정확하게 말해 1970년대를 경유한 세대들에게 ‘데미안’이 왜 이토록 강렬한 ‘필독서’인지는 나이 들어 조금 알게 됐다. 그러니 다섯 번이고 열 번쯤 읽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대를 초월한 ‘내 인생의 명작’
이 책에서 말하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노력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절을 입으로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외우고 다녔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데미안’은 열 번이 아니라 손에서 놓지 않아야 하는 책이었다.

이렇게 선생님 추천으로 ‘데미안’을 읽어 가면서 우리 반의 학생들은 ‘데미안’의 매력에 빠졌다. 그 의미를 충분히 해득하지는 못했지만,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한다’는 구절이나 싱클레어의 고투, 그리고 데미안이 말하는 ‘어른스러운’ 말투와 태도는 하이틴로맨스의 남자 주인공 못지않게 인기를 누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헤세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가 선생님 세대나 우리 세대만의 특징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지난 학기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수업에서 ‘내 인생의 명작’을 에세이로 써 내는 기말과제를 냈는데, 적지 않은 학생들이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 ‘황야의 이리’, ‘데미안’ 등을 ‘내 인생의 명작’으로 꼽았다.

이들에게 헤세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서 가슴 속의 불을 댕기는 그런 책인 듯이 보였다.
한 소년이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소년은 두 세계를 접한다. 한쪽은 엄격한 질서와 평화로 이루어지는 아버지로 대표되는 세계, 또 다른 한쪽은 하녀들의 부엌으로 대표되는 비밀과 환상으로 짜인 어두운 세계다. 1877년 태어난 헤세에게 두 세계는 미묘하게 흔들리며 동요하는 두 가지 ‘가치’였다.

‘싱클레어’라고 불리는 소년은 두 세계 속에서 갈등한다. 한쪽은 평화롭고 안정적이지만 그 세계에 속하기 위한 규율이 있으며 재미있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곳이었다. 반면, ‘하녀들이 속한 세계’는 안정적이지 않지만 재미있는 이야기와 환상이 있었다.

소년이라면 누구든지 경험하게 되는 가치의 혼란과 갈등, 이런 내면의 소요는 학교에서 더 분명하게 도드라졌다. 이른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본 듯한 ‘엄석대’류의 나쁜 권력자가 자리 잡고 있는 것, 싱클레어에게 ‘돈’을 요구하는 크로머라는 악당. 싱클레어는 처음에는 이 힘센 자 앞에서 그저 굴복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회피하지만, 데미안을 만난 후 다른 방식을 상상하게 된다.

데미안, 그는 처음 등장에서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우선 ‘카인’에 대한 해석을 해내는 것으로만 봐도 그러했다. 그에 따르면 카인은 동생을 죽인 죄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그저 인류사에 흔하디흔한 강자와 약자의 쟁투 속의 강자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럼에도 약자들이 자신들의 약함을 가리기 위해 강자에 대한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그를 악한 자로 가리고 있다는 얘기다.

청춘, 진정한 강자를 꿈꾸다
싱클레어는 아버지가 말한 것과 너무도 다른 데미안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유의 불안’을 느낀다. 분명치는 않지만, 아버지의 세계 밖에 놓인 ‘카인’으로 살아가더라도, 그것은 악하거나 어둡거나 한 것만이 아니라 실은 강한 자의 약간은 고독할 수도 있는 삶일지도 모른다는 상상 때문이다.

이런 느낌은 두렵지만 ‘자유’에 대한 느낌을 가지게 했다. 악당 크로머가 속한 그런 가짜 강자의 세계를 한번에 비웃을 수도 있는 진짜 강자가 되는 것 같은 느낌. 이 느낌으로부터 싱클레어는 자신만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이른바 알을 깨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로서 말이다.

‘데미안’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발표된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 속에 언급된 세계는 끔찍한 권력으로 개인들을 옥죄는 세계에 대한 혐오감이 표현돼 있다. 우리 사회의 ‘공동체’란 ‘불안과 도피와 절망감에서 나온 공동체이며 내부는 썩고 낡아 곧 붕괴될 것’이라고, 그리고 이 공동체 속의 개인들은 ‘내면을 알지 못하는 두려움을 품은 자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파괴될 것이라고, 그래서 ‘절망적이야, 싱클레어.…(중략)… 이 세계는 죽어가고 있어’라고 읊조린다.

이른바 약자들의 두려움과 불안에서 나온 규칙과 명령으로 만들어내는 세계, 크로머의 힘으로 지배되는 세계인 동시에, 약자들의 도덕을 진정한 것인 양 분칠한 세계에 대한 통찰이다. 이들에게 놓인 길은 ‘수레바퀴 밑’에 그저 깔리거나 아니면 ‘황야의 이리’가 되는 것, 이 양자의 갈림길에서 서로를 알아 본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진정한 강자를 꿈꾸며 갈등하는 자들 간의 조우라는 것, 아버지의 세계가 아닌, 또 다른 세계를 건축해야 하는 자들의 자각이기도 하다.

‘데미안’이 아니, 헤세의 숱한 작품들이 청년들의 성서가 된 이유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속에 그대로 속할까 봐 두려워하는 청춘, 그럼에도 ‘자유’가 무엇이고 더 나은 세계가 무엇인지 엿본 청춘, 이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내면’에 대한 숭고한 통찰이다. 자신의 내면을 쥔 자들만이 ‘수레바퀴’ 밑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박숙자 경기대 교양학부 조교수/ 일러스트 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