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희 신한관세법인 대표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신한관세법인을 이끌고 있는 장승희 대표는 창업주 장흥진 회장의 장녀로,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42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2세 경영인이 된 보기 드문 경우다. 장 대표를 만나 가업승계 스토리와 100년 기업을 향해 달려가는 신한관세법인의 미래에 대해 들었다.
[Successor] 시집간 딸이 장남 대신 가업을 물려받다
“관세사 하면 보통 공항 세관검사를 떠올립니다. 10여 년 전만 해도 관세사는 통관 업무를 주로 했지요. 몇 년 전부터 자유무역협정(FTA)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수출입 물품에 대한 세율의 분류, 과세가격 확인, 환급 등 통관과 무역에 관한 올인원 서비스를 할 수 있는 공인 컨설턴트로서 관세사들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외모만 보고는 장승희 신한관세법인 대표를 오해하기 딱 쉽다. 여리여리한 체격에 예순의 나이를 가볍게 무시하는 앳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120여 명의 직원을 이끄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라는 느낌을 쉽사리 받기 어렵다. 하지만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보면 장 대표의 진면목을 충분히 알 수 있다. ‘1만 시간의 법칙’을 탐독하는 노력파 CEO요, 통 큰 ‘엄마 리더십’의 소유자요, 재치까지 갖춘 그는 자꾸 이야기 나누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40여 년간 직장생활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그가 가업을 이어받아 회사 규모를 두 배 이상 성장시킨 저력이 궁금했다.


‘깐깐한 회장님’이 딸에게 상속한 까닭
신한관세법인은 국내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관세법인이다. 관세청에서 근무하던 장흥진 회장이 1965년 서울 서부역 인근에 서울통관사를 설립하며 처음으로 민간 비즈니스로 관세 업무를 시작했다. 20년 전 ‘새로운 한국’이라는 의미에서 사명을 ‘신한’으로 변경했다.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신한관세법인은 전국에 8개 관세사무소를 두고 수백개 업체를 대상으로 FTA 컨설팅을 수행하며 연 70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IBM, 에르메스, 프라다 등 글로벌 브랜드들도 신한관세법인의 주요 고객이다. 25년 이상 근무하고 있는 직원이 5명이 넘고, 30~40년씩 지속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고객사도 여럿인 회사는 업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신한관세법인은 관세 업무를 민간 비즈니스로 한 1세대라고 할 수 있어요. 1960년대에 비슷한 업무를 하는 회사들이 몇 군데 있었지만 모두 정리됐고 저희는 오히려 규모가 커졌습니다. 관세청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꼼꼼하기로 유명하셨어요. 그 당시 모든 세관 서류를 손으로 작성했는데, 워낙 깔끔하고 정확해서 관세청 직원들 사이에서도 ‘서울통관에서 제출한 서류는 확실하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죠. 새로 법규가 바뀌면 관세청에서 전문가를 초빙해 직원들에게 교육을 시키셨죠. 초창기에 인연을 맺어 지금껏 30~40년째 거래하고 있는 고객사들이 수두룩합니다.(웃음)”

신한관세법인은 장흥진 회장이 인생을 걸고 만든 ‘모든 것’이었다. 장승희 대표 위로 오빠가 있었고, 보통은 장남이 가업을 잇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장 대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영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1979년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과 동시에 남편과 미국 버지니아 주로 건너가 10년을 살았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갈 무렵인 1993년부터 회계학 석사과정을 밟았고, 이후 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하고자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장 회장에게 연락이 왔다. 회계사 말고 관세사 시험을 보라는 전갈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사업을 하고 있던 오빠보다 제가 회사를 이끄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셨던 듯해요. 아버지의 권유로 일단 관세사 공부를 시작했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40대가 되니 일단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당시 둘째가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초등학생이어서 온전히 공부에 집중하기도 어려웠죠. 오죽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으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류마티스에 걸려 10년 동안 고생을 했겠습니까. (웃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공부한 끝에 2003년 관세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이래봬도 깡과 오기 하나는 빠지지 않죠. 회사 출근은 2002년부터 하고 있었지만,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회사 경영에 참여하게 됐어요.”

관세사가 됐다고 해서 주부로 살아왔던 장 대표가 42세의 나이에 기업 경영에 뛰어들기란 쉽지 않았다. 장 대표는 2002년부터 2년간 인천공항지사에서 지사장으로 근무하며 관세 실무를 배웠다. 일명 ‘까대기’라고 하는 입국 물품 검사 업무부터 부산항에 입항한 컨테이너를 적시에 서울로 운송하기 위해 부두의 담당자 및 운송인들과 통화하는 수출입 업무 등 통관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배웠다. 그는 이후 관세사의 전문 지식이 무역을 수행하는 기업들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2006년 컨설팅본부를 신설했다. 컨설팅본부에서는 현재 FTA 전문 관세사로 구성된 팀이 FTA 이슈별로 고객의 상황과 요구에 맞는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장흥진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2009년부터 장 대표는 대표관세사직을 맡아 신한관세법인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그의 나이 49세에 최고경영자가 된 것이다. 열정을 가진 관세사들과 오랜 노하우를 갖춘 사무원들이 힘을 합한 덕분에 장 대표가 경영을 맡은 지 3년 만에 회사 매출도 두 배로 늘었다. 그가 회사에 왔던 당시 두 명에 불과했던 관세사 수도 지금은 35명이 됐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밑바닥부터 일을 시작한 것이 든든한 자산이 됐습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통관 업무의 전 과정을 지휘해본 경험과 7전 8기 끝에 관세사 자격증을 취득한 패기가 신한관세법인의 경영인으로서 자리매김하는 데 큰 도움이 됐지요. 현재 산업통상자원부 주관 자유무역협정 국내대책위원회의 유일한 전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대표관세사가 되고부터는 서울대 경영대학원을 다니며 기업 경영 이론과 실무를 배웠다. 그는 “이 악물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에 깐깐한 회장님도 마음 놓고 회사를 넘겨주셨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어린 딸’로 보는 아버지와 갈등…대화로 찾은 타협점
가업승계 과정에서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장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금도 회사 재무 상태를 훤하게 꿰뚫고 있을 정도로 꼼꼼한 스타일이다. 장 대표는 어렵게 자수성가해 늘 노심초사하는 부친과 경영 마인드가 달라 사사건건 부딪히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는 10년 넘게 경영하고 있는 나를 아직도 ‘대표 장승희’가 아니라 ‘어린 딸 장승희’로 바라볼 때가 있다”며 “최대한 많은 대화를 통해 타협점을 찾아 왔고 앞으로도 방법을 모색해 나가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숙제다”라고 말했다.
[Successor] 시집간 딸이 장남 대신 가업을 물려받다
“제 경영 철학은 첫째도 둘째도 ‘직원 행복’이에요. 구성원이 행복해야 고객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그래야 더 많은 수익을 다시 직원들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익과 매출에 강박증을 갖고 있었던 아버님께서 이런 저를 불안하게 보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하지만 제 신념대로 밀고 나간 결과 실무를 맡았던 지난 13년 동안 회사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부녀의 비전은 신한관세법인을 100년 이상 가는 관세무역컨설팅법인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이 반드시 가족경영일 필요는 없다는 게 장 대표의 생각이다. 몇 년 후, 전문경영인을 두고 회사를 지속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그의 몫이다.

“아들은 미국에서 컨설턴트로서 일하고 있고, 딸은 심리학 교수가 되겠다고 해요. 100년 기업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가족에게 승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합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은데 그것을 지속하려고 고집하다 보면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죠. 제가 잘할 수 있을 때까지 (경영을) 하고, 그 뒤엔 더 잘할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이어가면 됩니다. 10년 뒤, 20년 뒤에 대한 그림을 아직 구체적으로 그리진 않았지만 속을 잘 채워 나갈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은 있어요.”

그는 “벌써 내년이면 환갑이다. 기억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음을 느낀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나 100세 시대가 아니던가. 기자는 “여러모로 보아 30년은 너끈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로 그를 응원했다. 기억력은 다소 떨어질 지언정, 소녀 같은 외모와 청년 못지않은 도전 정신과 열정이 장 대표에게는 있으니까 말이다.


이윤경 기자│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