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중앙은행을 넘어 세계의 중앙은행 역할을 해온 Fed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제롬 파월 의장 교체로과 Fed 폐지론이 터져나오고 있다. 최후의 안전판 역할을 해야 할 Fed가 오히려 금융시장을 더 혼란스럽게 한다는 지적이다. 파월 의장의 말 한마디로 390조원이 좌우된다
[빅스토리] ‘파월의 혼돈(Powell’s chaos).’ 최후 안전판 역할을 해야 할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오히려 주식 시장을 비롯한 금융 시장을 더 혼란스럽게 한다는 데서 비롯된 신조어다. 남라타 너레인과 쿠날 상가니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파월의 기자회견으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지수가 상하로 1%, 금액으로는 390조 원 이상의 주가 변동이 초래된다고 추정했다.1913년 당시 각 주(州)의 최대 현안인 물가를 잡기 위해 Fed가 설립됐다. 초기에는 ‘비밀의 사원’이라 불릴 정도로 철저하게 비공개 원칙을 유지했다. 물가 안정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양대 수단인 ‘통화량 조절’과 ‘기준금리 변경’ 중 전자를 주수단으로 삼았던 1980년대 초까지 이 원칙이 지켜졌다.
통화정책의 생명은 ‘선제성’
비밀의 사원이 열리기 시작한 것은 2차 오일쇼크로 미국 경제에 들이닥친 스태그플레이션 이후부터다. 경기 침체하에 물가가 오르는 사상 초유의 상황을 맞아 직전까지 통화정책의 주수단인 통화량 조절 방식이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오랜 고민 끝에 당시 폴 볼커 Fed 의장은 기준금리 변경 방식을 다시 채택했다.
문제는 경기 순환 진폭이 커지고 주가가 짧아지는 ‘순응성(procyclicality)’과 ‘단축화(shortening)’ 현상이 심화되는데 기준금리 변경 방식이 효과를 보기까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통화정책의 시차가 길 때는 기준금리를 변경할 때와 효과가 나타나는 시점에 경제 상황이 달라 Fed가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높아진다.
‘선제성(preemptive)’이 통화표준(monetary standard)의 생명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통화표준이란 로버트 헤철 전 리치몬드 연방준비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가 주장해 통화정책의 틀이자 체제로, 기준금리 변경과 같은 통화정책은 일정 기간 지속돼야 효과를 볼 수 있어 선제성을 중시한다.
각국 중앙은행은 통화 표적 경로상 최종 목표인 물가 안정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중간에 확인해보고 싶은 표적변수(proxy)가 필요했다. 중간표적변수는 그 특성상 기준금리와 인과관계가 명확하고 최종 목표와의 연계성이 높아야 한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중간표적변수를 설정해 운용하면 최종 목표 달성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문제는 이 양대 조건을 갖춘 중간표적변수를 찾기가 더 어렵다는 점이다. 비밀의 사원을 열어 Fed의 의도대로 시장을 끌고 나가 시차를 줄이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1994년 당시 앨런 그린스펀 의장이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성명서 발표를 필두로 2000년에는 경제 진단과 전망, 2003년에는 통화정책 지침이 추가됐다. 바통을 받은 벤 버냉키 의장은 2011년에 기자회견까지 열었다.
기자회견을 가지면서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했다. FOMC 회의 직후 발표되는 선언문과 30분 후에 갖는 Fed 의장 기자회견 간의 일관성이다. 최근처럼 디지털이 진전되는 통화정책 여건에서 FOMC 선언문과 Fed 의장의 기자회견이 일치되지 않을 때는 확정 혹은 부정적 편향을 낳아 시장에 혼선을 초래한다.
전임 Fed 의장과 다른 길 가는 파월
지난해 12월 FOMC 선언문과 파월 의장의 기자회견으로 발생한 혼란은 이 문제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선언문에 포함된 점도표상으로는 올해 세 차례 금리 인하가 예상됐다. 하지만 파월의 기자회견은 선언문보다 더 강한 피봇 시사로 최대 여섯 차례까지 금리 인하 신호를 줬다. 직전 선언문은 무력화되고 시장에선 혼선이 나타났다. 파월 이전에 버냉키와 재닛 옐런 의장이 이 점을 중시해 기자회견 내용을 FOMC 선언문의 내용을 재확인하는 선에 그쳤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파월 의장은 달랐다. 기자회견 뉘앙스가 FOMC 선언문과 다른 것을 넘어 각종 포럼과 의회 증언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Fed 인사들도 가세했다.
Fed 의장과 관련 인사들이 수시로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과정에서 통화표준의 생명인 선제성 유지가 어렵게 되자 2021년 9월 평균물가목표제 도입을 계기로 노골적으로 방향을 ‘후행적(reactive)’으로 바꾸었다. 통화표준상 선제성을 잃어 통화정책의 주도력을 잡지 못한다면 ‘세계 중앙은행’과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서 Fed와 Fed 의장의 위상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파월 의장의 교체론과 Fed의 폐지론이 나오는 이 시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로버트 먼델의 최적통화이론에 따라 달러화의 영향권을 감안해 Fed의 역할을 평가하면 크게 두 단계로 구분된다.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과 국제통화기금(IMF) 탄생을 기점으로 그 이전에는 ‘미국의 중앙은행’, 그 이후에는 ‘세계 중앙은행’의 역할을 했던 시기다.
1기 때 Fed는 물가 안정 목표를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 스무트-홀리법으로 상징되는 각국의 극단적 보호주의로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지자 Fed는 금리 인하 등을 통해 경기 부양에 나섰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여건에서 Fed의 금융 완화 조치는 곧바로 인플레이션을 촉발시켰다. ‘에클스의 실수’에서 ‘볼커의 실수’까지
당황한 매리너 에클스 당시 Fed 의장은 성급하게 금리를 대폭 올렸지만 오히려 미국 경제를 ‘대공황’이란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Fed 역사상 최대 치욕으로 평가되고 있는 ‘에클스의 실수(Eccles’s failure)’다. 그때까지 주류 경제학이었던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Fed가 개입하지 않고 시장에 맡겨 놓았더라면 대공황이 10년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좀비(죽은 시체)’라는 혹평을 들을 정도로 무기력증에 빠져 있던 Fed를 구해낸 것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주도했던 ‘뉴딜 정책’이다. 만성적인 초과 공급 여건에서 정부 주도로 총수요를 진작시켜 대공황을 탈출시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총수요 관리 대책의 근거가 된 케인즈 이론이 탄생했다.
2기에 접어들어서는 외형상으로 Fed의 전성시대가 1970년대 초까지 지속됐다. 이 기간에는 달러 가치가 금값에 연동된 브레턴우즈 체제가 잘 작동됐기 때문이다. 1960년대 케네디·존슨 경기 호황기에도 물가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Fed가 잘했다기보다는 국제통화 체제의 요인이 더 크다.
‘물가 안정’ 목표를 달성시키기 위해 Fed의 역할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는 1970년대 이후부터다. 1971년 닉슨의 금 태환 정지선언 이후 과도기인 스미스 소니언 체체를 거쳐 1976년 킹스턴 회의를 계기로 국제통화 체제가 자유변동환율제로 넘어가면서 브레턴우즈 체제가 최대 시련을 맞았기 때문이다.
인플레 원천도 19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총수요’ 측에서 ‘총공급’ 측으로 바뀌었다. 다른 거시경제 변수와 관계도 물가와 경제 성장 간 ‘정(正)’에서 ‘부(負)’의 관계로 바뀌었다. 2기 들어 Fed가 통화정책의 근간으로 삼아 왔던 케인즈언 총수요 관리 대책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다.
2차 오일쇼크 발생 시점에 취임한 볼커 의장은 장고 끝에 Fed의 설립 목적에 충실해 금리를 17%까지 올리자 물가가 잡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물가 안정 기조가 정착되지 못한 상황에서 1980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의식해 금리를 9%대로 내리자 물가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에클스의 실수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볼커의 실수(Volker’s failure)’다. 1930년대와 마찬가지로 볼커의 실수는 레이건 정부의 공급 중시 경제학으로 해결했다. 래퍼 곡선을 바탕으로 이 이론은 세율 감소 등을 통해 경제주체들의 의욕을 고취시켜 경기 침체를 방지하고 물가도 잡을 수 있었다. 그 후 Fed는 수확 체증의 법칙이 적용되는 인터넷 등의 발달로 고성장·저물가의 신경제 신화 덕분에 제2의 전성시대를 맞았다.
의장 교체로 Fed의 위기 탈출
설립 이후 Fed가 위기 상황을 맞을 때마다 미국 대통령은 Fed 의장 교체와 혁신적인 통화정책으로 극복했다. 지난 3월 초에 열렸던 슈퍼 화요일을 기해 민주당과 공화당 후보로 확정된 바이든과 트럼프 전현직 대통령이 11월 5일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차기 정부의 예비 내각에 어떤 사람이 들 것인가에 대한 윤곽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경제팀은 크게 두 가지 조합이다. 하나는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대통령과 부통령, 다른 하나는 재정정책과 통화정책 수장이다. 트럼프 후보는 집권 1기 때 마이클 펜스의 반란을 교훈 삼아 러닝메이트로 ‘충성심(loyality)’을 제일의 덕목으로 여기고 있다. 트럼프 후보가 재집권하면 독주체제가 강화될 것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 수장으로는 헤지펀드 거물로 꼽히는 존 폴슨과 래퍼 곡선으로 잘 알려진 아서 래퍼 전 시카고대 교수가 팀을 이룬다. 트럼프 2기 대선 공약집인 <프로젝트 2025>를 총괄했던 스티븐 무어 프리덤웍스 선임경제 기고가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으로 트럼프 후보의 곁에서 보조하는 카드로 가장 유력하다.
바이든 후보는 집권 1기 때 존재감이 없었던 카멜라 해리스의 교체는 확실하다. 주목되는 것은 지난해 10월 올먼 쟁킨스가 월스트리트저널(WSJ) 칼럼에서 ‘바이든의 유일한 살 길은 버락 오바마(Biden’s only salvation: Barack Obama)’를 제안했듯이 오바마 전 대통령을 러닝메이트로 영입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수정된 연방헌법 22조에 따르면 대통령은 어떤 형태든 세 번 이상 할 수 없지만 부통령은 가능하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 수장은 파월 Fed 의장을 대신해 레이얼 브레이너드 NEC 위원장이 재닛 옐런 재무장관과 주축이 되면서 버냉키 전 Fed 의장을 NEC 위원장으로 영입하는 카드가 거론된다. 고령으로 바이든 후보가 당선 이후 집권 2기에 국정 전반을 부통령에게 맡기면 미국 역사상 가장 좋은 경제 성과를 냈다고 평가받는 오바마, 버냉키, 그리고 옐런 간 금융위기 당시 환상적인 팀이 재탄생할 가능성도 있다. 현재로서는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 래퍼 전 시카고대 교수가, 바이든 정부가 연장되면 브레이너드 NEC 위원장이 차기 Fed 의장으로 거론되고 있다. Fed가 시련을 겪었을 때마다 극복했듯이 차기 Fed 의장은 최우선적으로 통화표준상 선제성과 이를 통한 통화정책의 주도력을 확보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AI 시대의 중앙은행, 어디로
Fed의 선제성과 주도력 확보를 전제로 본격적으로 인공지능(AI) 시대가 전개됨에 따라 ‘어떻게 통화정책을 수행할 것인가’ 하는 또 하나의 과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분명한 것은 네트워킹 효과와 수확체증의 법칙이 적용되는 AI 시대에 있어서는 중앙은행의 목표를 ‘물가 안정’에만 둘 수는 없다. 기준금리 변경, 유동성 조절 등과 같은 종전의 통화정책 수단도 무력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효과는 반감된다.
통화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다른 경제주체도 공유가 가능해짐에 따라 ‘정보의 비대칭성(information asymmetry)’을 전제로 한 중앙은행의 시장 선도 기능도 약화될 수밖에 없다. 즉, 중앙은행과 시장참여자 간 관계가 ‘수직적’이 아니라 ‘동반자적’으로 변한다는 의미다. 이 과정에서 중앙은행과 중앙은행 총재의 위상, 기준금리와 시장금리 간 체계는 약화가 불가피하다.
특히 우려되는 대목은 각국 국민이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환경이 급변함에 따라 ‘새로움과 복잡성(novelty & complexity)’에 따른 위험이 증대되고, 화폐 개혁 논의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유사 금융 행위도 판치게 된다. 이런 환경에 맞춰 금융 감독이 새로운 방식, 이를 테면 옴니버스 방식 등으로 접근하지 못할 경우 각국 국민의 화폐 생활에 있어서는 일대 혼란이 초래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행도 AI 시대에 맞춰 중앙은행 목표 수정, 통화량 등 새로운 통화지표 개발, 통화유통속도와 통화승수 무력화 방지, 인과관계와 추적성의 중간 표적변수 개발, 통화정책 관할 범위 확대, 통화정책 전달 경로 유효성 점검, 경기 예측력 제고, 그리고 리디노미네이션 단행 여부 등을 사전에 준비해 놓아야 한다.
한상춘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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