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앓이’를 하는 후배들에게 보내는 선배의 편지

노인은 누구나 될 순 있겠지만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생물학적 수명이 길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선 노인의 반열에 들어선 ‘주니어 시니어’들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아무나 될 수 없는 반열에 올랐으니 당연히 축하할 일입니다. 그런데 건강과 경제적인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시니어라면 더욱 축하할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니어가 되면서 ‘시니어 앓이’를 하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제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훈수를 두어봅니다.
[FROM SENIOR TO SENIOR] “추수한 곡식에 감사하며 어떻게 쓸까를 고민하시길”
생각하면 시니어가 되면서 잃는 게 참 많습니다. 우선 몸이 옛날 같지 않습니다. 의학적으로 말하면 늙는다는 것 자체를 병리현상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몸이 온전하지 못하다면 그만큼 힘이 들 것인데, 그래서 시니어 되기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몸뿐 아니라 정신도 분별력을 잃지 않고 근사하기란 그 또한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시니어라고 해서 즐거운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런 악조건 속에서 그나마 지금 같은 정도의 노년을 즐길 수 있는 분이라면 정말 축복입니다.

얼마 전에 저의 제자 하나가 정년퇴임을 맞았습니다. 남들보다 유별나게 정년 앓이를 심하게 겪는 사람이 있는데 그 제자가 그런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시니어 반열에 연착륙을 해도 충분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하다고 합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몸도 불편하고 기억력도 떨어지고 대인관계에서 적절성도 떨어지고 어디에서도 위로받을 곳이 없다고 불안해합니다. “인생이란 다 그렇게 그렇게 늙어 간다”고 조언했더니 더 불안해합니다.


“공연한 노여움 버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어 있던 재간을 찾아보세요”
어떤 위로가 그에게 합당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다고 일깨워보았지만 수긍하지 않습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헛되게 살아 온 것 같답니다. 일생 동안 연구도 많이 하고 후학들을 잘 가르쳐 놓고 그런 말을 합니다. 좀 더 잘 할 걸 하는 아쉬움의 수준이 아닙니다. 지난 일에 너무 매달려 집착합니다. 그것도 부정적인 집착을 말입니다. 미래도 불안하다고 합니다. 정년퇴임이니 연금도 나옵니다. 따로 저축한 여분의 자산도 있습니다. 퇴임했지만 이곳저곳 강의가 연결돼 있어 알찬 소일을 하고 있는 그가 미래가 불안하다고 합니다.

하긴 두 가지 모두 틀린 말은 아닙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지나 놓고 보니 ‘그때 좀 더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걸’이란 아쉬움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책할 일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과거에 대한 아쉬움보다 더 클 것입니다. 시니어를 넘어 노인이 돼 간다는 것은 앞으로 살아 갈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사실 때문에 불안이 엄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의 생애 주기는 누구도 비켜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안해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노인의 반열에 오르게 될 후배 시니어를 위해 제 경험을 토대로 제 나름의 몇 가지 훈수를 적어봅니다.

첫째, 노인이 돼 간다는 것, 혹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선생님, 젊어 보이십니다.” 이런 말에 현혹돼서는 안 됩니다. 젊어 보인다면 물론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젊어 보여 봤자 먹는 나이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분은 좋지만 나이가 줄어든다고 믿진 마세요. 노인이 가진 조건이란 유리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둘러보세요. 우울한 일, 슬픈 일들이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단어를 여러분께 선사하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재간을 갖고 있다’란 자기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저도 정녀퇴임을 하면서 머리로는 받아들였지만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까진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노인 취급을 하면 그 때문에 기분이 나쁩니다. 어른 대접을 안 해주면 또 그 때문에 기분이 나쁩니다. 도대체 어떻게 대접을 해야 몽니가 없어질까요. 그것은 자신이 시니어란 점을 거부하거나 스스로 불쾌한 정서를 내려놓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는 몽니입니다.

괜한 노여움입니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공연한 노여움을 많이 부렸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을 다스리면서 찾아낸 단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였습니다. 노인이 가진 조건들이 악조건이 많은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하고 살펴보면 딱히 나쁜 조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보니 보이더란 뜻입니다. 몸도 불편하고 마음도 불편하지만 그래도 소일을 할 구석은 어디엔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 분명 할 수 있는 일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 숨어 있는 재간이 평소에 자신이 하던 일과 연관이 있다면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FROM SENIOR TO SENIOR] “추수한 곡식에 감사하며 어떻게 쓸까를 고민하시길”
정년 앓이를 많이 하고 있는 그 제자에게 제가 알고 있는 그의 재간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런 재간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라며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면 당연히 갖고 있는 재간이라고 생각하는 제자는 저의 설명에 머리로는 어렵게 동의를 했습니다. 이해가 된다는 마지못한 동의입니다. 정말 자신이 그런 재간을 갖고 있는지 의아해합니다. 갖고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모릅니다. 현역 시절에 축적된 지식과 경험이 바로 지금의 재간이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지금의 자신이 지난 과거의 결과물입니다. 다만 그 결과물의 가치를 과소평가하고 있을 뿐입니다. 크든 적든 결과물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 소중한 결과를 더욱이 자신이 일생을 투자해서 일군 결과를 자신이 과소평가한다면 남들이 그 가치를 소중하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나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틈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재간이 있는지 살펴보기를 권합니다. 누구에게나 나름 틀림없이 자기만의 것이 존재합니다.


“오늘은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 내가 거둔 곡식을 남과 비교하지 마세요”
둘째로는 알았다면 실천으로 옮겨야 합니다. 이어져야 합니다. 알았다고만 하고 실천이 없다면 머리만 복잡해집니다. 안다고 하는 것은 실천의 원동력이 됩니다. 놓치지 마세요.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야금야금’ 실천해보기를 권합니다. 남은 세월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초조해하지 마세요. 야금야금 행동한다는 것은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과 같습니다. 시니어 반열에 오르면 결과물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과정을 통해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젊었을 때 처절하게 경쟁하면서 살아왔던 그 가치를 보상받아야 합니다. 그 보상이 다름 아닌 ‘야금야금’ 하는 ‘과정의 즐거움’입니다.

물론 마음은 급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급함은 내려놓고 과정을 즐겨보세요. 즐겁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급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많이 뜨일 것입니다. 여유로움이 생길 것입니다. 이 새로운 경험을 통해 즐거움을 보상받아야 합니다. 큰 과정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사소한 과정에도 즐거움의 모퉁이는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이런 ‘야금야금’은 과거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때 훨씬 많이 다가옵니다. 미래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훨씬 가깝게 다가옵니다. ‘야금야금’에서 꾸준함으로 이어집니다. 설령 이어지지 못하고 우리의 생을 마감한다고 해도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해 불안해하는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온감이나 만족감이 높을 것입니다. 우리 생애는 과거도 중요하고 미래도 중요합니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오늘’이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늘이 없이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입니다.”

그래서 셋째로는 인생 이모작을 시작하는 시니어들에게 오늘의 꿈을 어떻게 꿀까 그 꿈을 스스로 만들어보기를 권합니다. 지난 젊은 날들이 책임과 의무에 짓눌려 허겁지겁 살았다면 이젠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을 한번 꿈꾸어보는 것도 가치 있는 일입니다. 내가 나답게 살 때 가장 빛나는 나의 존재감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내 인생입니다. 이런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바로 인생 이모작을 시작하는 바로 지금의 여러분입니다.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의 그림 ‘만종’이 생각납니다. 한 농부 부부가 해질 무렵 추수한 후 이삭을 주우면서 경건하게 기도드리는 모습입니다. 멀리 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말입니다. 이 순간을 경건하게 기도드리는 모습이 바로 우리 시니어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 년 동안 정성 들여 가꾼 농사를 추수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모습. 그 추수한 곡식이 풍족하든 모자라든 내 노고의 결과로 받아들이면서 기도하는 모습은 정말 나답게 살아온 내 자화상일 것입니다. 내가 거둔 곡식을 가지고 남과 비교하지 마세요. ‘봄에 좀 더 거름을 주었더라면’ 하고 집착하지 마세요. 추수한 곡식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마세요. 가진 것을 어떻게 쓸까 꿈 꿔 보기를 권합니다.


“젊은 날로 돌아간다면 어떤 인생을 살고 싶냐고요?
‘나’다운 삶이라야 행복합니다”

이런 충고는 제가 무단히 하는 것이 아니라 저도 제 제자처럼 시니어 앓이를 해보았기 때문에 터득한 경험입니다. 저도 노인 반열에 들면서 스스로 충고 받은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당시 노인요양원에 입원한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내용이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설문의 내용은 “만일 다시 젊은 나이로 되돌아간다면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란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자유롭게 서술 형식으로 응답을 받아 정리한 내용입니다. 많은 응답 중 상위 세 가지 응답이 마음에 와 닿아 저 스스로 받아들인 권유였습니다.

첫째, ‘자유롭게 살고 싶다’였습니다. 저는 평소에 입버릇처럼 그런 말을 가족들에게 했습니다. 반은 농담 삼아. 정말 그런 소망은 있었지만 주변 사정이 저로 하여금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진 않았기 때문에 그런 소망을 농담처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가족들의 반응은 당연히 저항적입니다. “일생토록 자기 마음대로 살아 놓고….” 가족들 눈에는 제가 자유롭게 살아온 사람으로 보이나 봅니다. 비록 가족들의 눈에 그렇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땐 자유롭다는 느낌을 갖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같은 느낌일 것입니다. 느낌뿐만이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오면서 실제로 자유롭지 못했던 부분이 많습니다. 시니어 반열에 오르면 명실상부한 자유로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더라도 상대적으로 젊었을 때보다 자유로워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 자유로운 것이 맞는지 아니면 소망일 뿐일지는 모르겠으나 자유로웠으면 참 좋겠습니다.

둘째로는 ‘맺힌 것을 풀고 싶다’고 했습니다. 참 지당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시니어 반열에 오르기까지 알게 모르게 맺힌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정서적인 사람들에겐 특히 맺힘이 많습니다. 서운하니까 맺히는 것이 많습니다. 별별 사소한 일들도 맺히려면 얼음덩이처럼 맺힙니다. 자신이 가해자든 피해자든 맺힘을 풀고 살고 싶다는 소망일 것입니다. 억지로 풀려고 하지 않더라도 시니어가 되면 지난 일들을 돌이키면서 참회에 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이가 그렇게 만드나 봅니다. 맺힘이란 관계에서 생기는 암 덩어리입니다.

셋째로는 ‘나누고 싶다’고 했습니다. 흔히 말로는 “저승 갈 때 갖고 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도 나누는 데는 인색합니다. 아까워서 그럴까요. 욕심 때문일까요. 요양원의 시니어들이 나누며 살고 싶다는 말은 후회를 담고 있는 말씀일 것입니다. 저는 젊었을 때부터 나눔이란 화두를 많이 강조했습니다. 저와 대화를 나눈 분들 가운데는 자신은 나눌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나누어줄 것도 없으려니와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누어 받을 것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경제적인 것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 이해됩니다. 정말 경제적인 것 말고는 나눌 것이 없을까요. 돈 안 들면서도 나눌 수 있는 나눔은 참 많습니다. 따뜻한 말 한 마디, 미소 짓는 표정. 예를 들자면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단지 우리가 잊고 살아왔을 뿐입니다. 저는 시니어가 되면서 이 세 가지 내용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동감하면서 살았습니다. 얼마나 그 소망을 성취하고 살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소망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실천해보려는 노력은 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답게’ 살 때 우리는 행복한 ‘내’가 될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기획 박진영 기자│글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