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보고, 책은 나를 보고

책을 읽는 것이 삶의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완전히 ‘건진’ 인생이다. 일단 싸고, 건강 측면에서도 우월하다.

책을 많이 본다고 간이 나빠지지도 않는다. 정말 좋은 내 삶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 독서인데 애주가는 많아도 애서가는 흔치 않다. 왜 그럴까?
[HOW TO ENJOY LIFE] 나의 자아와 저자의 자아가 소개팅 하는 시간
100년 전 소르본대 교수이자 문학비평가인 에밀 파게는 ‘독서의 기술’이란 책에 요즘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며 책을 읽지 않는 시대를 사는 한탄을 잔뜩 적어 놓았다. 100년 전 프랑스 파리 하면 내로라하는 철학, 인문학, 그리고 예술의 거장들이 한 커피 전문점에서 같이 놀던 시대인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문학의 시대는 언제 올 것이냐며 걱정하는 파게의 글을 읽으니 황당한 나머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화려한 인문학의 시대에 살던 저자가 인문학의 시대는 언제 올 것이냐 걱정하니, 시대를 막론하고 책이란 본능적으로 우리가 싫어하는 녀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책에 저항감이 크면 애서가가 될 자질 있다
술은 술술 넘어가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 책은 저자의 생각이 담겨 있기에 책을 읽다 보면 상당한 저항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게 된다. 자기애, 즉 나르시시즘에 기인한 저항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소중하기에 누군가 자기의 주장을 강력하게 내 마음에 집어넣으려고 하면, 내 기분이 나빠진다. 자기애적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닫아 버리게 되고 책을 집어 던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책에 저항감이 크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좋은 애서가가 될 자질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무조건 다 수용하는 독서는 좋지 않다. 책에 대한 저항이 있어야 건설적이고 선택적인 수용이 가능하다. 독서는 책을 만나는 것 같지만 그 책에 담긴 저자의 생각과 만나는 것이다. 나의 자아와 저자의 자아가 무의식적인 소개팅을 하는 시간이 독서다. 더 만나볼지 그만둘지는 소개팅 후 결정하면 된다.

연애를 하고픈데, 결혼을 하고픈데, 소개팅 등 이성과 만나는 시간을 갖지 않는 분들이 꽤 있다. 애인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 과정이 피곤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즐거움은 그 과정에 있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책 보는 것이 너무 싫어도 읽어야 독서의 참맛을 알 수 있다. ‘나는 정말 독서에 취미가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저항이 강한 것일 뿐 사실은 굉장한 애서가로서의 자질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책을 보는 걸까, 책이 나를 보는 걸까. 그런 뻔한 질문이 어디 있냐 싶지만 마음의 저항을 견디고 책장을 넘겨 3분의 1이 넘어가면 훅 몰입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순간부터는 책이 나를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필자 같은 마음 전문의를 찾아오면 해드리는 게 별것 없다. 인생을 쳐다보는 관점의 위치를 바꿔드린다. 우리는 다 영화 속 주인공이다. 영화의 제목은 ‘My Life, 내 인생’이다. 내 인생이란 영화의 주인공인 것이다. 영화에 재미있는 순간도 있고 슬픈 순간도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이란 영화에도 희로애락이 오고간다. 인생이 힘들 때 주인공에게 너무 몰입되면 그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런데 우리 뇌는 신기하게 설계돼 잠시 주인공의 위치에서 벗어나 관객의 위치에서 내 인생을 바라보면 특별한 변화가 없는데도 인생이 살 만한 것으로 여겨지도록 돼 있다. 이를 자아 분리라고 하는데 인생을 실제 사는 자아와 내 인생을 바라보는 관찰자적 자아를 분리시키는 현상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관찰자적 자아가 멀리서 인생을 보니 나만 힘든 것도 아니고 ‘워낙 인생이 그런 거구만’ 하는 철학적 성숙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꼭 정신과 의사를 만나지 않아도 된다. 소설이든 시집이든 문학 작품을 읽다가 몰입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내가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보는 심리 변화가 마음에서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소설의 주인공이나 문학 작품의 작가와 내가 동일시되고 그 시점에서 내 인생을 바라보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은유에 반응하는 마음, 일주일에 시 세 편 읽어라
시를 읽는 것이 지친 마음을 충전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시는 은유적 소통이라 할 수 있는데 논리적 구조가 아니라 상징체계로 돼 있다. 시를 읽으면 뭔지 모르게 마음은 뭉클해지는데 무슨 소리인지는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직설적 화법이 아니라 은유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해석도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자신의 감정 상태나 인생의 경험에 따라 시가 주는 감성이 180도 반대로 느껴질 수도 있다.

과거 청춘 남녀가 사랑을 고백할 때 편지지에 시 한 편을 쓰고 그다음에 자신의 마음을 담는 것이 유행이었다. 왜냐하면 시에 담긴 은유가 상대방의 마음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던 거다. 여심을 사로잡는 영화나 소설 속 카사노바를 보면 은유적 표현의 달인들이다. 대표적인 유혹의 표현을 하나 이야기하자면 “네 밝은 미소 뒤에 숨겨진 슬픔을 내가 위로해줄게”다. 왠지 저 남자가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이해하는 것 같고 내 마음을 열어주고 싶어진다. 그런데 마음에 슬픔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은유적 표현은 논리를 넘어서 내 마음을 움직인다.

우리는 대화를 할 때 논리적으로 하지만 마음은 때론 상징과 은유에 더 반응한다. 그래서 은유로 가득 찬 시를 읽는 것은 피곤한 몸을 안마하듯 내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마사지하는 효과가 있다. 일주일에 시 세 편 읽기를 권한다.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읽어주는 것도 좋다. 무뚝뚝한 남자도 시를 읽다 보면 깊은 마음의 감성이 움직이며 지친 감성에 충전이 일어난다.


글·사진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