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경이로 바꾸는 시선, 김덕기 작가
벨기에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동화 ‘파랑새’는 어린 남매가 파랑새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다. 꿈속의 모험이 끝나고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은 그제야 새장 속 파랑새가 바로 곁에 있다는 걸 깨닫는다. 행복이라는 파랑새는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누이가 그랬듯이 오늘도 우리는 행복의 신기루를 좇고 있다. 그림을 시작한 뒤로 행복이라는 주제에 긴 시간 천착해 온 김덕기 작가의 작품은 그래서 새롭게 다가온다. 가장 진부하지만 가장 소중한 가족의 가치를 따뜻하게 그려 왔던 김 작가의 행복론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다. 그의 그림 안에는 그림자가 없다. 화폭 안에 담긴 부부와 아이들의 얼굴은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고 배경 또한 낙원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그래서인지 삶의 무게도, 가장의 어깨도 가벼워 보인다. 눈이 부실 정도로 평화롭고 예뻐서 한편으로는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느껴졌던 그림을 보며 작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철지난 유원지처럼 이제는 별 감흥 없이 매년 다가오는 ‘가정의 달, 5월’도 머릿속에 스쳤다. 김덕기 작가의 작품을 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눈다면 나이 들수록 의무와 역할이라는 굴레로만 여겨지는 ‘가족에 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싶었다. 더군다나 그의 작품은 ‘김덕기’라는 이름만으로 컬렉터들이나 오랜 시간 팬을 자처해 온 이들에게 ‘믿고 사는 그림’이 아닌가.전시회에 그림이 걸리기도 전에 ‘솔드(sold)’ 딱지가 붙여진 그림이 작업실에 대기할 정도로 그는 이른바 ‘잘 팔리는’ 작가였다. 그래서인지 ‘원래 아티스트는 회의적이지 않나’라는 다소 삐딱한 질문을 가슴에 품고 그가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경기도 여주를 향한 것이 사실. 그림에 담아 온 행복의 구심점은 어디서 출발했는지, 그가 어떤 답을 꺼내놓을지 궁금해하며 여주 작업실에 도착했다. 작가의 그림 속 집을 꼭 닮은 붉은 지붕을 눌러 쓴 하얀 단층집이 봄 햇살을 맞으며 광합성 중이었다.
오라, 내 가장 아득했던 고향의 시절
가족을 그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 고향이 아닐까. 김 작가는 서울예고에 입학하기 위해 떠난 고향을 다시 ‘그리기 위해’ 2008년 22년 만에 귀향했다. 작업실 앞으로는 남한강의 금당천이 흐르고 여인의 젖무덤처럼 봉긋한 앞산이 보인다. 그는 아버지가 예순일곱의 나이에 얻은 늦둥이 아들이었으니 그가 받은 사랑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김 작가의 따뜻한 가족의 모습이 담긴 화폭의 심지는 아마 이 시절을 기원으로 했을 것이다.
“학교가 끝나고 난 뒤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한약방에 곧장 뛰어갔어요. 마루에 배 깔고 누워서 감초를 씹어 먹으며 받아쓰기 같은 숙제를 했거든요. 그러면서 아버지와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아버지가 손님들이랑 나누는 이야기도 듣곤 했지요. ‘어른들의 세계는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도 하면서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는 김 작가의 목소리가 금세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보니 그에게 부모의 존재가 얼마나 큰 산인지 가늠할 수 있다. 어릴 적 아버지 손을 잡고 동물원에서 보낸 나른한 봄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이 말갛게 빛나는 열 살짜리 소년의 얼굴을 닮았다. 어릴 적 부모의 각별한 정은 지금의 따뜻한 색채, 동화적 분위기의 ‘김덕기 풍’ 그림을 가능하게 했을 터. “너무 밝기만 한 거 아니냐”는 물음도 숱하게 들어왔을 법한 그가 ‘성냥팔이 소녀’ 동화 이야기를 꺼낸다. 맨발에 성냥을 팔아야 하는 비참한 소녀 이야기를 굉장히 아름답게 그려내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현실은 비참하지만 성냥의 빛이 발하는 범위 내에서 아이는 그 환하게 빛나는 세계로 빠져들죠. 제 작품도 그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싶어요. 불빛 안에 존재하는 그 아름다움을 그려내고 싶은 마음인 것 같아요.” 행복이 넘쳤던 유년시절에 반해 10대 시절 그가 겪어야 했던 갑작스럽고 깊은 슬픔은 그가 문득 꺼낸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와 접점을 같이 한다. 중학교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고등학교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게 된 것.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더라고요”라고 말할 정도로 김 작가의 10대 시절은 우울과 방황의 시기였다. 혼자였고 외로웠던 시절, 그는 하숙방이나 고시원에서 지내면서 친구들은 실기레슨을 받았을 때 자신은 무작정 밖으로 나가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고 한다. 서울대 동양학과에 입학한 뒤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첫 개인전을 열 때까지만 해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아내의 아르바이트 벌이와 자신의 새벽 신문배달비로 생계를 이어갔다고. 하지만 가난했던 화가를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며 가족만이 줄 수 있는 ‘삶의 축복’은 그에게 다시 이어졌다. 지금은 축구를 좋아하고 아버지와 단 둘이 갤러리에 가는 고등학생 아들과 작업실 주변 텃밭을 정성으로 가꾸는 아내가 있다. 내리사랑이라 했던가. 김 작가의 개인 홈페이지에 차곡차곡 수년간 써 올린 그의 작가노트는 아들에게, 아내에게 바치는 ‘감사기도’를 연상케 할 정도로 애틋하고 뭉클하다. 아들이 태어난 날, 그치지 않는 울음에 아빠 배에 올려놓고 조곤조곤 말하며 얼렀더니 금세 눈물을 그치던 아들 이야기가 일기처럼 쓰여 있다. 또 작업하느라 바쁜 요즘이지만 김밥 싸서 손잡고 학교 캠퍼스로 소풍 가자고, 행복한 추억 하나 만들자고 아내에게 쓴 연애편지도 수두룩하게 올려져 있다. 섬세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그의 이런 면면은 그의 그림을 이해, 아니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되고도 남는다. 구김살 하나 없어 보이는 김 작가의 이미지 저 안쪽에는 실은 그가 꿋꿋이 감내하느라 먼 길을 에둘러 왔음을 이제는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시기들이 작가에겐 지금의 초심을 잃지 않는 작가 소양의 밑거름이 됐던 것일까. 그가 자신의 그림을 지칭하며 “나를 닮은 투명한 거울” 같다고 말하는 것도 가족과의 추억이라는 징검다리로 힘겨웠던 시기를, 그럼에도 밝고 따뜻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이유 혹은 내공이기도 하리라.
어릴적 언젠가의 빛나던 한 조각
여주로 내려오면서 그는 전업 작가의 길을 결정하고 9년간의 서울 보성고등학교 미술 교사 생활을 마감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아들인 전성우 이사장의 지원으로 학교 안에서 따로 작업실을 갖고 방학 동안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그림을 향한 열정은 그를 ‘오직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하지만 교편을 잡은 당시의 경험은 지금도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시간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간혹 귓가에 아이들 재잘대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요. 아이들이랑 소풍 갔던 기억도 나고 너무 그립지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보람이 컸습니다.”
밤새 작업실에서 그림 작업을 하고 새벽녘에 학교를 나서다가 보안감지센서가 시끄럽게 울려 깜짝 놀라 사태 수습을 하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선생님 시절 학생들과의 아련한 추억도 많지만 지금의 행복함은 또 관객과의 소통으로 채워지고 있는 듯했다. 꽤 오래전부터 김 작가 그림을 모아 온 한 컬렉터는 얼마 전 딸이 시집가는데 그림도 함께 시집보냈다고 연락을 보내왔다고 한다. 아이가 그림과 함께 성장해 가정을 이루고 새로 태어날 아이와 함께 자라날 작품을 생각하니 마음이 애틋해지더라는 것이다. “저는 누군가 ‘작품이 대단해요’라고 말하는 것보다 이렇게 누군가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 있다는 게 더 감격스러워요. 거실 벽에 걸린 제 그림을 보고 아이들이 자신을 투영한다고 하더라고요. 유명해지고 명예를 갖는 것보다 이런 것들이 저에겐 더 소중합니다.”
그는 얼마 전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다. 화가, 시인의 감성에 더해 영화에 출연한 덕에 국제영화제의 초청을 받은 것. 이만하면 ‘르네상스형 인간’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김선영 감독님이 로드무비 형식의 다큐멘터리 ‘아티스트’라는 작품으로 로마오버룩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아 저도 이탈리아에 초청되는 영광을 누렸어요. 저의 작품 활동과 한국의 아름다운 풍광이 배경으로 나오거든요. 작가의 내면세계를 다룬 영화인데 생각지도 못한 감사한 일이지요.”
이탈리아 여행의 영향을 받아서 신작들은 기존에 쓰지 않던 화이트와 그레이 톤이 그림에 쓰였고 좀 더 큰 사이즈의 그림에도 도전하고 있다고 한다.
오랜 시간 김 작가가 천착해 온 행복에 관한 주제는 여전할 것인지 물었다. 무거운 주제와 실험적인 표현 기법이 주를 이루고 있는 현대 미술 시장을 떠올리면 누군가는 여전히 그의 화풍에 물음표를 떠올릴지 모를 일이다. “김덕기 그림이 어둡고 무겁다고 하면 다들 의아해하지 않겠어요? 제 작품은 저에게 거울처럼 투명한 마음 같아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게 되는 것처럼 결국 제 세계관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저다운 작품이겠지요. 대중적인 화법으로 가지만 그 안에서도 충분히 묵직한 메시지는 꾸준히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작년부터는 200호 정도의 대형 작품도 그리기 시작했는데 사이즈만 커진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품을 수 있는 이야기는 갈수록 풍성해지고 있어요.”
그리고는 덧붙였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예술도, 작품도 아니라 눈 감았을 때 자신을 지탱해준 어릴 적 언젠가의 밝게 빛나던 어느 한 조각이라고.
그의 그림에서 ‘위대함은 청중을 설득시키지 않는다, 도취시킨다’라는 고대 그리스 격언이 떠오른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의 작품들이 오늘 우리에게 김덕기 표라는 필터를 덧댄 ‘행복’이라는 고갱이 덕분이다. 오래도록 찬찬히 그의 그림을 보며 우리 가슴 속 저 아래에 아직 말랑말랑하게 남아 있을 행복의 언저리를 다시 들여다볼 시간이다. 그 기억이 시간의 풍화작용에 떠밀려 휘어지고 구부러져 있더라도 김 작가 그림 앞에 선다면 봄 녘 들판의 아지랑이처럼 다시 피어오를지 모를 일이다.
기획 박진영 기자│글 이지혜 객원기자│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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