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의 임권택 감독이 바라본 세상

팔십이라고 했다. 그랬다. 임권택 감독이라는 존재감은 100편이 넘는 영화와 감독으로서 살아온 53년, 그리고 80이라는 숫자까지 더해져 묵직하기만 했다. 그러나 인생선배라고 하기에 한창 깊고 깊은 연륜의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예상대로 임 감독은 ‘꼬장꼬장한 어른 티’ 전혀 없이 삶을 통해 축적되고 ‘발효’된 이야기들로 잔잔하게 파고들었다. 이야기의 매개는 여든의 그를 설레게 하는 102번째 신작 ‘화장’이었다.
[PEOPLE INSIDE] “홍역 같은 삶, 지나고 보니 뭐 그리 대단할까”
고백컨대, 기자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꼬박꼬박 챙겨 보는 팬이 아니다. 물론, 임 감독이 연출한 작품들은 (‘줄줄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꿰고 있다.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개인적 관심사와 상관없이 알게 될 수밖에 없는 게 현재 임 감독의 존재감이기도 하니까. 헌데 이번엔 좀 반대였다. 영화 ‘화장’이 임 감독의 102번째 작품이라는 사실에 다소 놀랍기까지 했다. 2004년 작가 김훈의 첫 번째 단편이자 ‘이상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그 ‘화장’을 임 감독이 그려낸다니. 100편이 넘는 영화를 해 오는 동안, 적어도 우리가 기억하는 시절의 필모그래피만 봤을 때는 짐작하기 어려운 그림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그만 한 적임자가 없기도 했다. 죽어가는 아내 곁에서 헌신하며, 자신도 모르게 젊고 싱싱한 활기를 띠는 부하 여직원을 연모하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는 자칫하면 통속적으로 흐를 수 있는 일이었다. 여든의 임 감독은 이 상황을 철저히 자신의 나이에서 바라봤다. 잔인하디 잔인한 현실 속에서 들끓고 흔들리는 남자의 갈등과 갈망을 그렇게 현재진행형이 아닌, 과거완료형의 입장에서 보면 같은 상황도 다르게 읽힐 수밖에 없는 법. 이 영화가 임 감독에게 ‘모험’이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여든의 감독이 본 세상이 어떻게 관객들의 그것과 맞아떨어질 것인가. 영화 개봉을 하루 앞두고 만난 임 감독은 여러 감정이 뒤섞인 채 떨리는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영화를 해 왔어도 개봉 때마다 긴장되기는 마찬가지라고 했지만, 이번엔 분명 다른 감정일 터였다.


he said, “인생에서 도리 없이 겪어야 하는 감정, 그게 영화지요”
영화를 몇 년 동안 안 했어요. (2007년 100번째 영화 ‘천년학’을 찍은 뒤 2010년 ‘달빛 길어 올리기’가 최근작이었으니 5년 만이다.) 그래서 현재 영화계와 간극이 있는 상태에서 만들었는데, 기왕 하는 거면 기존에 해 왔던 것들과는 다른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십 년을 해 온 틀에서 벗어나자고 생각했지요. 지난날 제 영화들을 돌아보면 수난사, 미술, 판소리 등 우리 민족이 살아내면서 겪었거나 문화를 향유했거나 발전시켜 왔던 것들을 주로 담았습니다. 물론 영화감독으로 산 53년 중에 처음 10년간 찍은 50편은 별로 내세울 게 못 되고, 그 이후엔 정직한 영화, 참스런 영화를 찍자고 생각하면서 여기까지 왔지요. 그러다 보니 제 자신도 너무 지루해지는 겁니다. 인간의 한계도 있는데 제가 이 안에 계속 머물러서는 감독으로서의 생명력을 이어가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지요. 어떤 영화에서 큰 성과가 있었다 하더라도 반복하면 죽는 겁니다. 관객들도 ‘저 사람이 좀 달라졌구나’ 해야 할 것 아닙니까. 해서, 이번 영화에서 여러 노력들을 했습니다. 실제로 제가 노력한 것과 보여주고자 한 것들이 지금 시대의 관객들과 호흡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습니다. 더구나 저는 팔십인데, 팔십의 고령자가 본 세상이 관객의 그것과 어떻게 맞아 떨어질지.

그런데 영화란 결국 제가 살아 온 삶을 바탕으로 하는 것 아니겠어요. 팔십이라는 나이까지 오는 동안 살아 온 삶의 체험이 쌓이고 쌓여 제 안에서 발효되고 그런 것을 바탕으로 소설이든 콘텐츠든 받아들여 영화화하게 되는 것이지요. 젊은 영화를 한다고 젊은 나이가 되지 않고, 아주 나이 든 영화를 한다고 해서 제 나이를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느낀다는 얘깁니다. 물론, 그러니 낡아서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이든 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담아낸 영상일지라도 거짓으로 꾸미지 않고 정직하게 생을 바라본 것이라면 설득력을 지니게 되지요. 그게 통하지 않으면 도리가 없지 않겠어요. 소화하기 어려운 것, 따라오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고 해도 크게 봐선 공감할 수 있어야 해요. 유행을 좇아서는 관객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도리 없이 겪어야 하는, 젊건 늙었건 도리 없이 관통해 가야 할 감정들 그 길목을 찾아서 영화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도리 없이 관통해야 할 감정’이라. 그러고 보면 ‘화장’의 남자 주인공이 아내를 보며 느끼는 안타까우면서도 지치는 감정과, 젊은 여직원을 갈망하면서도 드러내지 못한 채 속으로만 품는 이중적 감정은 상황과 형태만 다를 뿐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감정적 소용돌이의 한 단면에 불과했다. 바로 그런 너무나 현실적인 ‘리얼리티’가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생각난 김에 얼마 전 만난 한 지인의 이야기를 임 감독에게 들려주었다. 10년을 연애한 아내와 20년째 문제없이 살고 있는 쉰 줄의 남자가 느닷없이 찾아온 다른 연애 감정에 고민하다가,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될까 두려워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정리 아닌 정리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마침 영화 이야기가 나오자 그 지인은 마음이 아파서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도 했다. 20대에게 두근두근하는 ‘심쿵(심장이 쿵)’이 중년들에겐 당황스러운 ‘심컹(심장이 덜컹)’임을 증명하는 일화였다.
[PEOPLE INSIDE] “홍역 같은 삶, 지나고 보니 뭐 그리 대단할까”
he said, “누군가에게 쏠리는 마음, 허나 차마 저지를 수 없는 겁니다”
물론 너무 현실적이라 불편한 것도 있을 겁니다. 자기 안에 있지만 밖으로 드러내기 부끄러운 솔직함도 영화에서 일부 드러냈고요. 소설에서도 그렇지만, 좋아하는 여자에게 치우치는 마음, 그 여자 생각에 빠졌을 땐 별의별 망상을 다하고 갈망하고,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환각에 빠졌다가 현실로 나왔다가 하는 게 인간 아닌가요. 그런데 그 부분을 못 찍겠더군요. 솔직하게 내놓자니 부끄러운 것도 많고요. 해서, 주인공의 감정을 따라가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상상을 하든 환상에 빠지든 그로 인해 관객도 같이 그런 생각에 빠져들게끔 말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자칫 잘못하면 리얼한 삶 자체를 가상의 세계로 끌고 가는 듯한 느낌이 들까 봐 조심스러웠지요. 게다가 김훈 선생의 문장이 너무 세고 박력 있기 때문에 그대로 표현했다가는 위험에 빠질 것 같았지요. 그래서 이 사람들의 삶 자체가 주는 사실감을 리얼하게 표현하는 데 주력했어요. 그러다 보니 삶을 직시하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제가 남자 주인공의 입장이라 해도 오랫동안 아내 병 수발을 들면서 어차피 살아내지 못할 바에야 주변 사람 괴롭히지 말고 죽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안 들겠어요. 젊을 때 불타올랐던 감정이 50대까지 지속될 리도 없고. 그렇지만 또 성심성의껏 부인을 간병하지 않을 수 없는, 옛날의 그 사랑이라는 감정은 아니라도 자신과 오랜 세월 함께 해 온 아내에게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해보고 싶은 이지적인 마음과 희생도 당연한 거예요. 반대로 심한 갈등을 안고 사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쏠리는 감정과 갈망도 이겨낼 수가 없는 거고요. 여든인 저도, 그런 감정이 있을 수 있는 거고. 이건 나이 불문, 성별 불문하는 겁니다. 다만, 100번 저지르고 싶어도 차마 저지를 수가 없는 것. 산다는 건 그런 거예요. 젊었을 때는 큰 희망을 안고 이상을 향해 살지만, 나이가 들면서 어차피 몰려오는 자기 생 자체를 이지적으로 받아들이고, 도리 없이 와 닿는 상황들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이면서 사는 거지요. 인간은 흔들리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런 홍역을 앓아가면서 살 수밖에 없어요.

중년의 시기를 거친 감독의 시선은 그랬다. 단적으로, 아내가 죽은 뒤에도 주인공 남자와 연모의 대상인 여직원의 관계는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다. 감독의 연륜이 묻어나는 해석이다. 인정사정없이, 연연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조차 연연하게 드러내지 않는 원작 소설과 달리 남편에 연연하는 아내의 미묘한 감정, 그 감정을 알게 된 후 남자의 심리 등이 섬세하게 터치돼 있다. 임 감독은 “중년의 세월을 지나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면서 다시 돌이킨다 해도 젊은 날의 그로는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노라고 했다. 뜻밖이었다.
[PEOPLE INSIDE] “홍역 같은 삶, 지나고 보니 뭐 그리 대단할까”
he said, “그리도 소원했던 갈망이 이뤄진들 또 뭐합니까”
저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 중 한 명입니다. 그땐 온통 일에 묻혀 그 나이를 지나왔기 때문이에요. 일이 끊기면 금단현상을 겪으며 불안하게 지냈지요. 삶 자체에 대한 무게감 없이 다른 데를 돌아볼 여지도 없이 늘 과제 안에서만 살았습니다. 제가 1960년대 초에 감독으로 데뷔해 초기 10년 동안 50여 작품을 찍었어요.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지요. 지금은 무척 부끄럽고, 그때의 작품들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일화가 있어요. 어느 날, TV에서 1960년대 액션물을 방영하는데 어디서 본 것도 같고 처음 보는 것도 같은 저급한 영화가 나오더란 말입니다. 근데 끝에 자막 올라가는 걸 보니 제가 만든 영화더군요. 얼마나 정이 떨어졌으면 그 영화의 타이틀이 무엇인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고, 끝내 알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모르고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잘 찍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해도 싫습니다. 왜냐면, 휘뚜루마뚜루 만든 영화라 해도 그 당시엔 최선을 다했던 것이니까요. 매번 필사적으로 찍었기 때문에 고통이었고, 그 고통 속으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겁니다. 그런 시절들을 다 겪고 지금에 이르렀기 때문에 ‘화장’ 같은 영화도 찍을 수 있었던 거지요.

‘화장’에서 장사 지내는 장면을 찍었어요. 그전에도 사람의 죽음을 다룬 영화를 여러 번 했고, 정면으로 다룬 ‘축제’도 있었지요. 그때 제 나이가 60쯤 됐을 때인데, 그때의 죽음관과 지금은 생판 달라졌습니다. 60대에는 죽음을 치장하고 엄청나게 큰 일로 알았는데, 지금 저에게 죽음은 오게 되면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순리 정도로 바뀌었지요. 매사가 그렇습니다. 영화가 끝까지 아쉽게 끝나는 것도 ‘제 방식’이고 ‘저’인 것 같아요. 그리도 소원했던 그 갈망이 이뤄진들 그게 뭐겠어요. 설령 그것이 부인을 향한 마음이라 해도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닌 거예요. 이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인생의 홍역을 앓고 그냥 지나갈 수도 있다는 것을, 대단해 보이지만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다 그랬었구나’ 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이것도 노인들 생각이지만요. (웃음)

개봉 전부터 베니스 국제영화제를 비롯해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되고, 기립박수를 받는 등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던 영화 ‘화장’은 개봉 후 예상대로 중장년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인터뷰 말미에 “도리어 관객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궁금한 게 많다”고 말하던 임 감독은 그 답을 얻었을까. 화장(火葬)과 화장(化粧)이라는, 같은 말이지만 생과 사로 갈리는 극단의 이야기도 아닌, 죽음의 시선에서 바라본 삶의 이야기도 아닌, 그저 우리네 삶을 둘러싼 서글픈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어 있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었다고 하면 답이 되려나.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