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을 열광케 하는 그들만의 콘텐츠_열두 번째

‘너무 높이 날면 태양에 날개가 녹고, 너무 낮게 날면 바닷물에 날개가 젖는다’는 그리스 신화 속 이카루스의 날개가 주는 ‘경고’를 기억하는가. 늘 더 높은 곳을 갈망하는 남자의 본능을 일깨우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 ‘버드맨’은 그래서 더 격하게 감정이 이입된다.
[MEN`S CONTENTS] 남자에게 숨은 이카루스의 본능, 영화 ‘버드맨’
얼마 전의 일이다. 친분이 있는 제작자가 술 한 잔 하자며 불러내더니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누군가를 또 호출한다. 그의 부름에 달려 나온 이는 모 배우였다. 경력도 제법 되고 히트작도 적지 않은, 그래서 딱 봐도 누구인지 아는 그런 ‘급’의 배우. 제작자는 그와 필자가 서로 비슷한 또래라 친해지기 쉬울 거라며 도원결의 당시의 유비마냥 술을 따라댔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15년쯤,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에서 그는 아리따운 여성을 대동한 채 명품 의류를 쇼핑 중이었고 약속을 기다리던 필자는 그 모습을 한동안 부럽게 바라보았던 적이 있었다. 성공적인 데뷔를 치룬 배우와 보잘 것 없는 작가 지망생, 반짝이는 쇼윈도를 사이에 두고 그와 나의 세계는 그렇게 달랐다. 술이 아닌 격세지감에 취해 우쭐거리고 있을 때 즈음 그가 이런 말을 건넸다. “이제야 비로소 내 모습이 보입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그로부터 며칠 후, 필자는 그 배우와 몹시도 닮은 영화 한 편을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올해 아카데미 최다 부문 수상에 빛나는 영화 ‘버드맨’이다.
[MEN`S CONTENTS] 남자에게 숨은 이카루스의 본능, 영화 ‘버드맨’
성공에 취해본 자만이 느끼는 숙취 같은 후회
언뜻 제목만 봐서는 히어로 무비 같다. 그러나 영화 ‘버드맨’의 주인공은 공력 출중한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머리숱 듬성한 환갑 줄의 퇴물 배우다. 배경은 뉴욕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 주인공 리건(마이클 키튼 분)은 한물간 배우라는 세간의 비아냥을 종식시키고자 말리부의 저택마저 저당 잡힌 채 연극에 올인하고 있다.

대중은 그를 여전히 ‘버드맨’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그 꼬리표가 넌더리 난다. 버드맨의 우스꽝스러운 슈트와 마스크가 배우로서의 표정과 연기력을 모두 집어삼켰다고 여기고 있다. 연극을 고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상업 영화와는 격이 다른 예술, 컴퓨터그래픽(CG)을 덧입힌 필름이 아니라 관객과의 대면 연기로 재평가를 받겠다며 연극을 고집하는 중이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다. 자금 압박의 수위는 점점 높아지고, 언론의 외면은 계속 됐으며 그럴수록 재기에 대한 불안과 강박도 심해진다. 설상가상, 중요 역할을 맡은 배우마저 사고로 쓰러진다. 다행히 마이크(에드워드 노튼 분)라는 핫한 배우가 구원투수로 등장하지만 그는 통제 불가의 행동으로 혈압만 오르게 할 뿐이다.
[MEN`S CONTENTS] 남자에게 숨은 이카루스의 본능, 영화 ‘버드맨’
하지만 그를 내치기엔 이미 늦었다. 마이크의 합류 소식에 예매율이 치솟고 싸늘하던 평단도 앞 다투어 기대 섞인 찬사를 쏟아낸다.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인정받고 싶은 리건으로서는 미칠 노릇이다. 결국 그는 마이크에게 빠질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철저히 무시된다. 동업자는 티켓파워를, 스태프로 일하는 딸아이는 인지도를 내세우며 마이크를 옹호한다.

실험정신 가득한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일련의 사건들을 단 한 번의 끊어짐 없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는다. 그 덕분에 아카데미 촬영상과 감독상을 거머쥐었는데 주목할 것은 그러한 것들이 어우러진 영화의 미쟝센이 아니라 배우 마이클 키튼을 통해 그려지는 내적 갈등이다. 성공의 뒤안길에서 끝없이 추락하는 남자의 처절한 심리. 재기에 대한 집착이 환각으로까지 번지는 장면들을 접할 때마다 남자로서 격한 감정 이입이 생긴다.

리건은 자신이 몸부림치는 이유를 이 한마디로 일갈한다. “파라 포셋이 마이클 잭슨과 같은 날 죽은 거 알아?”(파라 포셋은 미국 TV 드라마 ‘600만불 사나이’로 유명한 리 메이저스, 영화 ‘러브 스토리’의 라이언 오닐 등과 염문을 뿌린 당대 섹스 심벌. 그러나 굴곡 많은 인생 말년을 보냈다.) 그제야 술자리에 동석했던 그 배우의 말이 몹시도 뼈저린 후회와 자기 깨달음이 담긴 말이었음을 실감했다. 또 한 번 멋지게 날아오르기 위해 그가 얼마나 수없이 떨어진 날개를 이어붙였을지.


김상명 시나리오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