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테이블의 화려한 조연

[ANTIQUE SALON] 와인글라스, 그리고 디캔터
현대인들이 바쁜 일상과 지나치게 편리한 모든 것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한 걸까. 언제부턴가 ‘슬로(slow)’가 사회적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훨씬 이전부터 불편함을 동반하는 아날로그적 삶을 좋아했던 필자에게 ‘슬로 라이프(slow life), 슬로 시티(slow city), 슬로 푸드(slow food)’와 같은 단어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차를 우려내는 기다림을 기꺼이 즐기는 홍차가 우리에게 오기 이전부터 ‘디캔팅(decanting)’이라는 불편함과 느림을 수반하는 와인이 이미 우리 곁에 있었다.
빅토리안 시대 스털링 와인 시음용 컵.
빅토리안 시대 스털링 와인 시음용 컵.
크리스털 브릴리언트 컷의 진수를 보여주는 1870년대 영국 워터포드 디캔터.
크리스털 브릴리언트 컷의 진수를 보여주는 1870년대 영국 워터포드 디캔터.
‘디캔트(decant)’의 사전적 의미는 ‘용액의 웃물을 가만히 따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디캔팅의 원래 목적은 오래된 적포도주 밑에 가라앉은 침전물을 마시는 잔에 옮기기 전 걸러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디캔팅 과정을 거치면서 디캔팅이 침전물을 걸러줄 뿐만 아니라 와인이 산소를 접촉하게 해 맛과 향을 더욱 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바로 이것이 에어레이션(aeration) 또는 브리딩(breathing)이라고 부르는 작용으로, 디캔팅의 두 번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수천 년 와인의 역사 속에서 디캔터는 와인을 서빙하는 데 잔과 더불어 반드시 등장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귀족들은 사냥터를 제외하고 와인병을 테이블에 바로 올려놓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두 개의 바카라사 크리스털 에칭 디캔터가 시대의 간극을 넘어 너무도 닮아 있다.(왼쪽-1904년, 오른쪽-2000년대)
두 개의 바카라사 크리스털 에칭 디캔터가 시대의 간극을 넘어 너무도 닮아 있다.(왼쪽-1904년, 오른쪽-2000년대)
문장 새겨진 와인 디캔터, 가문의 애장품으로
숙성된 좋은 와인은 100년 아니 수천 년간 귀족들의 기호품이었다. 와인은 테이블에 서빙 되기까지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에서 글라스, 디캔터, 그리고 다양한 와인 액세서리가 사용됐다. 침전물을 부드럽게 가라앉히기 위해서 누워 있었던 와인 병을 하루 이틀 동안 똑바로 세워 놓는 와인 홀더, 손님에게 와인을 대접하기 전 주인이 시음하기 위한 테이스팅 컵, 그리고 코르크스크루 등이 있었다.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은식기가 있었듯 디캔터와 크리스털 글라스 등 와인 액세서리에도 가문의 문장이나 이니셜 모노그램을 새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오랜 기간 동안 가문의 애장품으로 이어져 내려와 현대에도 소중한 앤티크 컬렉션 아이템이 되고 있다. 여러 테이블 세팅 중에서도 와인 테이블에는 특히나 유리 혹은 크리스털 제품이 많이 들어간다. 와인 테이블의 주연은 물론 와인이겠으나 와인글라스와 디캔터 없는 와인 테이블을 상상할 수 없으니 그들이 화려한 조연임에 틀림없다.
사용하는 사람의 이니셜 모노그램이 마개에 새겨져 있는 아르누보 시대 디캔터.
사용하는 사람의 이니셜 모노그램이 마개에 새겨져 있는 아르누보 시대 디캔터.
글라스는 와인의 종류에 따라 레드, 화이트, 그리고 스파클링 글라스가 있다. 여기에서 레드 와인 잔은 타닌이 강한 와인을 위해 고안된 튤립 모양의 보르도 레드 와인 잔과 타닌이 적고 신맛이 강한 피노 누아 같은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을 위한 것이 있다. 부르고뉴 와인 잔은 약간 짧고 뚱뚱해서 좀 더 오랜 시간 향을 간직할 수 있다. 화이트 와인 잔은 작고 덜 오목해서 상큼한 맛을 더 잘 느낄 수 있도록 디자인 됐다. 스파클링 와인 잔은 길쭉한 튤립 모양으로 와인의 탄산가스가 오래 보존될 수 있고 거품이 올라오는 것을 잘 관찰할 수 있다.

디캔터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암포라(amphora)로 거슬러 올라간다. 암포라는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호리병 모양의 항아리다. 이것이 테이블에 놓여 글라스로 바로 와인을 옮기기에는 다소 컸기 때문에 더 작은 디캔터가 필요했다. 이러한 필요로 유리를 소재로 한 디캔터가 유행했고 로마제국 이후에는 유리 대신 주석이나 은 소재로 된 것들이 등장했다. 당시 주석 잔은 와인을 차게 해주면서 독이 들었을 경우 색깔이 변하기 때문에 귀족들이 선호했다고 한다. 이후 르네상스 시대에 베네치아인들은 뛰어난 미감(美感)으로 다양한 색의 유리 디캔터를 새롭게 만들게 된다. 당시의 유리 제품은 표면을 긁어서 글씨나 그림을 새겨 넣거나 은장식 등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사치품이었다. 17세기 말엽에는 유리에 산화납을 첨가해 투명도와 내구성을 높인 제품이 영국의 유리 제조공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털이다. 크리스털은 유리보다 더 투명하고 반짝여 고급 디캔터로 인정받게 됐다. 그 당시에 다양한 커팅의 디캔터가 많이 제작됐고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1800년대에 만들어진 영국 워터포드 크리스털 디캔터는 그 화려한 커팅 기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아름다운 커팅과 크랜베리 색이 돋보이는 1900년대 디캔터.
아름다운 커팅과 크랜베리 색이 돋보이는 1900년대 디캔터.
또 다른 스타일의 디캔터로는 클라레 저그(claret jug)가 있다. 클라레 저그의 탄생에는 귀족들의 신분과 부에 대한 과시욕이 있다. 본래 클라레(claret)는 보르도 지방에서 나오는 가벼운 스타일의 레드 와인으로 평민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비교적 값싼 와인이었다. 클라레 와인을 즐기고 싶으나 평민과의 간격을 두고 싶었던 귀족들은 클라레 와인을 마실 때 은이나 보석으로 치장된 값비싼 저그를 사용하게 된다. 이것이 클라레 저그가 생기게 된 배경이지만 현대의 우리는 종종 골프대회 우승컵으로써 클라레 저그를 만나곤 한다. 유서 깊은 브리티시 오픈 골프대회의 우승컵 또한 클라레 저그다.


1800년대 디캔터와 최신 와인 잔의 하모니
앞선 기고에서 언급했듯 필자가 지향하는 앤티크 컬렉션의 키워드는 믹스 앤드 매치와 유저블(usable)이다. 과거와 현대, 그리고 동양과 서양을 함께 혼합하고 근사한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실제 필자가 세팅한 와인 테이블에서는 1800년대나 1900년대 초의 크리스털 디캔터와 요즘 구입한 와인 잔이 아름답게 조우한다. 100년에서 200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를 넘어 같은 브랜드의 아주 비슷한 모양을 한 디캔터가 같은 식탁에 놓인다. 그들은 너무도 닮아 있어서 ‘모든 명품은 클래식에 그 기원이 있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앤티크 컬렉터 백정림은…
품위 있고 따뜻한 홈 문화를 추구하는 하우스 갤러리 이고 대표다. 앤티크 테이블 웨어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테이블 세팅 클래스를 티파티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백정림 이고 갤러리 대표 | 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