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섭 기자의 금융레시피

전통 음식점에서 차려 나오는 만찬은 맛도 맛이지만 상 한가득 담겨 있는 요리 장인의 정성이 때때로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유언대용신탁(信託) 상품의 경우 고객들의 눈높이에 맞춰 생전의 노후 준비나 사후의 재산 상속 등을 꼼꼼하게 지원하는 등 맛깔 나는 만찬으로 진화하고 있다.
[INSIDE MONEY] ‘노후의 만찬’으로 진화한 유언대용신탁
예약을 하려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스페인 지로나의 엘 블리(El Bulii) 레스토랑. 세계 최고의 식당으로 불리는 이곳의 주 메뉴는 다름 아닌 분자요리다. 음식을 분자 단위까지 연구해 조리한다고 해 붙여진 분자요리는 정상급 요리사들의 뼈를 깎는 노력이 더해지며 미식가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금융상품을 분자요리에 직접적으로 비유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최근 금융상품들은 오랫동안 고객 니즈 분석과 정성스러운 담금질을 거쳐 나오는 일이 일반화 됐다. 맛(금리, 수익률)은 기본이 된 지 오래고, 정성(고객맞춤형 포트폴리오)까지 곁들여진 상품들이 시장에서 살아남는 구조가 된 것이다.

80세를 바라보는 고액자산가 A씨가 있다. 어릴 적 부모를 여의었지만 타고난 성실성으로 수백억 원의 재산을 모은 그였다. 하지만 국내외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자녀들에게 어떻게 잡음과 분쟁 없이 재산을 상속해줄지 생각하면 밥맛도 떨어질 지경이다.

또 다른 자산가 B씨는 최근 급격히 체력이 저하되며 갑자기 예기치 못했던 큰 병이나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있다. 부동산도 골칫거리다. 노후에 자식들에게 부동산을 상속해줄 요량으로 과거에 매입했던 빌딩을 최근 리모델링하려고 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도통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 같은 고객들의 고민에 해답을 줄 수 있는 ‘노후의 만찬’이 있을까. 금융권 관계자들은 최근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유언대용신탁 상품을 추천한다. 이 상품은 생전에는 고객의 자산관리를 도와 재산을 불리게 해주고, 유언장을 대용해 골치 아픈 생후 재산 분배까지 해결해주는 기특한 상품이다.

금융상품으로서 유언대용신탁 상품은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게 사실이다. 최근까지도 대부분의 금융회사에서는 유언장을 금고에 보관해주는 수준의 신탁 상품만을 취급해왔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유언대용신탁 상품은 살아 있을 때 돈을 맡겨 자산관리를 받고 사후에는 유언을 대체해 상속 절차까지 밟을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한다. 2012년 7월 신탁법이 개정되며 민법에서 허용하는 5가지 유언 방식(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비밀증서, 구수증서) 외에 유언대용신탁도 유언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상속형 신탁에 대해 제도 및 세제상 혜택을 부여해 활발한 편이지만 아직 국내는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가장 앞서 있다는 하나은행의 ‘하나토탈 케어 트러스트’ 상품이 올해 1월 말 현재 60건 정도의 계약을 맺었으니 이제 막 싹이 트고 있는 것이다.


고령화 겪는 한국, 유언 관련 신탁 상품에 관심 증가
하지만 일본도 2011년 전체 64건에 불과했던 유언대용신탁의 판매 건수가 2012년을 기점으로 1만8742건으로 급증한 점은 곱씹어볼 대목이다. 일본과 비슷한 심각한 인구 고령화를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부유한 고연령층 인구가 증가하며 유언 관련 신탁 상품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늘어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과거 재산상속의 정석은 유언장이었다. TV 드라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면은 자산가의 상속인들이 모인 자리에 변호사가 007 가방을 들고 나타나 고인의 자필증서나 녹음을 내밀며 재산 분할을 돕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같은 방법은 최초 상속인 지정만 가능하고 상속인이 숨지면 대응이 불가하다는 취약점이 있다. 할아버지가 자식세대를 거쳐서 손자에게 재산을 넘겨주려고 하거나 남편이 아내를 거쳐 자식들에게까지 유산을 물려주는 연속 상속이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는 것이다. 유언대용신탁의 경우 2대, 3대 등 연속 상속도 가능하다는 점이 유언장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나은행의 ‘하나 토탈 케어 트러스트’는 신탁 상품이 최근 어디까지 진화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상품의 경우 신탁법이 개정되기 전인 2010년 4월에 출시됐는데 고객 유형별 니즈를 파악하기 위해 1년여 동안 시장조사와 분석에 공을 들였다.
[INSIDE MONEY] ‘노후의 만찬’으로 진화한 유언대용신탁
이 상품은 고객들을 위해 4가지의 풀코스 요리를 제공한다. 갑자기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찾아온 큰 병이나 치매 등의 우려는 ‘하나 케어 트러스트’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평상시에는 정기예금이나 채권 등 안전한 상품으로 자금을 운용하다가 고객을 케어할 필요성이 생길 경우 병원비는 물론 요양비, 간병비, 생활비 등에 대해 은행이 직접 비용 처리를 도와준다.

골치 아픈 부동산 관리도 ‘하나 부동산 관리 트러스트’로 깔끔하게 도와준다. 부동산과 관련된 금융·세무·회계·법률 컨설팅부터 상속 및 증여 문제를 해결해주고 낡고 노후한 건물의 신축이나 리모델링 설계·시공을 원할 경우 이에 대한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실제 하나은행은 국내 건축설계 회사 중 ‘톱 5’에 속하는 정림건설과 제휴를 맺고 낡은 건물의 설계와 시공, 임대계약 및 관리까지 일사천리의 서비스를 진행해 호평을 얻고 있다. 2월 중 서울 역삼동에 완공되는 A씨 소유의 8층 규모 건물이나 같은 달 8층 규모로 신사동에 착공되는 B씨의 부동산도 이전에는 각각 3층 규모의 허름한 상가와 일반 나대지에 불과했지만 하나은행의 도움을 받아 금싸라기 부동산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1억 원 이상 기부 의사를 밝히면 생전 분당서울대병원에서 VIP급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하는 ‘하나-SNUH 기부 트러스트’, 따로 유언장을 작성하지 않아도 본인이 뜻한 대로 분쟁 없이 재산 분배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 리빙 트러스트’도 고객들을 위해 상찬처럼 마련해놨다.

배정식 하나은행 신탁부 팀장은 “지금까지 4건의 상속집행을 했는데 유산을 물려받은 자녀들이 서비스에 만족하고 자연스럽게 하나은행의 고객이 됐다”며 “현재 이 서비스는 현금자산 5억 원이나 부동산 10억 원 이상의 자산가들에게 지원되고 있는데 입소문을 타며 점차 문의가 늘어나고 있다”고 귀띔했다.

하나은행을 필두로 유언대용신탁 판매사는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은행에서는 신한은행과 KB국민은행이 관련 상품을 출시했거나 준비 중이다.

특히 신한은행은 지난해 10월 숙명여대와 유언대용신탁 업무 협약을 체결하고, 기부자가 유언서 작성 없이 재산을 생전에 지정한 대학이나 병원 등에 승계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신한은행은 기부자를 위한 다양한 형태의 상속 설계를 비롯해 재산관리 서비스도 제공할 계획이다.

보험사 중에서는 한화생명과 삼성생명이, 증권사 중에서는 하나대투증권, 한국투자증권, NH투자증권(구 우리투자증권), 신영증권 등이 유언대용신탁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유언대용신탁은 점차 고객 생활과 밀착되고 있다. 평상시는 집사처럼 자금 집행 관리를 맡고, 고객의 건강관리나 기부 공헌, 사후의 재산 분배에 이르기까지 세밀한 서비스를 고민하고 있다. 단순히 고객의 재테크만 고민했던 금융사들이 마치 요리사들이 분자요리를 만들어 내듯 고객들의 생활 속 고민 하나하나에 현미경을 깊숙이 들이밀며 금융상품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용섭 기자 poem197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