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는 현재 11대와 12대, 13대 자손들 수백 명이 한 가문을 이루고 사는 사례가 여럿 있다. 이들은 가문이 처음 시작된 시골 마을에서 매년 회의를 열어 가족헌장을 재확인하고 통과시킨다. 회의의 주목적은 가문 구성원들에게 자신들이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다른 가문과의 ‘차별점’은 무엇인지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가족들은 헌장에서 정한 바에 따라 가문을 대표할 사람들을 선임하고, 가족헌장에서 명시한 기준에 해당하는 사람만이 가족기업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런 가문들이 수대에 걸쳐 창업자의 가문에서 기업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역시 바로 가족회의와 가족헌장이다.
[FAMILY BUSINESS CONSULTING] 가족헌장은 가족 화합과 영속 기업 위한 로드맵
유럽에는 세계적으로 200년 이상 된 가족기업 경영자들의 친목 모임이 있다. 기업이 200년 이상 지속되면 최소 7~8세대를 넘어 생존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들의 장수는 우연으로 볼 수만은 없다. 장수기업 연구로 유명한 미국의 윌리엄 오하라 교수는 “장수기업들의 공통된 비결은 시간이 지나고 기업이 커나가도 처음 가졌던 이념과 삶의 본질을 잊지 않고,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기준으로 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과업 하나하나에 적용해온 가풍에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가족들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문서로 작성해 두고 있다.

이와 같이 문서로 작성된 규약을 가족헌장이라고 한다. 존 워드 박사는 “가족헌장은 미래의 가족, 기업, 오너십 간의 균형과 안정을 위해 포괄적인 가족의 철학과 원칙, 정책 등에 관해 명백하게 밝혀 놓은 문서다”라고 했다. 만일 가족 간의 이견이나 갈등이 발생했을 때 이에 대처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이 없다면, 가족기업으로서의 영속성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가족헌장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족들이 함께 자발적으로 결의하고 문서화한 것이다. 여기에는 창업자의 철학뿐만 아니라 미래에 가족들이 맞을 수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가이드라인과 절차가 포함된다. 국가에는 헌법이 있고, 기업에는 사규가 있듯이 가족헌장은 가족과 기업을 보호하고 가족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한 가족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장수 기업의 특징은 훼손되지 않은 가풍
가족헌장이 가족기업의 영속성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가족기업을 경영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가족헌장을 만드는 것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오너경영자들은 가족헌장이 자신의 철학과 가치를 계승하고, 미래 후손들이 겪을 어려움들을 해소해줄 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화합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헌장을 제정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가족들은 변호사에게 작성을 의뢰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 유용성이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마치 나의 꿈을 다른 사람이 대신 꾸어주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족헌장은 누가 만들어야 하는가. 가족헌장을 만드는 일은 가족들이 함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연구에 따르면, 규정을 만드는 과정에 가족이 참여하는 경우 다함께 규정을 준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뿐 아니라 가족들이 함께 가족의 꿈과 미래를 공유하고 헌장에 포함될 많은 이슈들에 대해 협의하는 과정은 가족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향상시키고 결속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물론 가족기업의 발전 단계나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경우라도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래서 많은 가족들이 가족헌장을 개발하는 전 과정에 가족기업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이 서명할 수 있는 실행 가능한 가족헌장을 개발하려면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이 소요되기도 한다. 이는 1회적인 협약이 아니며, 가족과 기업의 변화를 반영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하며 진화한다. 어떤 가족들은 세대별로 협약을 체결하기도 하고, 또 어떤 가족은 매년 회의를 열어 가족헌장을 재확인하고 통과시키는 행사를 갖는다. 가족헌장의 내용이나 운영 방식은 가족에 따라 다르지만, 장수기업들은 가족들이 함께 공식적인 가족헌장을 개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거기에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다. 가족 간 협약이나 공동의 비전 없이 한 기업이 동일한 가족 내에서 수대에 걸쳐 존속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머크家, 전체 가족 인트라넷 운영·가족 뉴스 발행
가족헌장에는 가족의 비전, 미션, 가치 및 행동강령과 같은 가족 철학과 가족들이 가족과 기업을 지원하는 방법을 기술한 가족 정책과 규정, 그리고 소유권의 권리와 책임에 관한 주주 협약 등을 포함한다. 가족 상황에 따라 매우 짧고 간단하게 작성할 수도 있고 아주 길고 복잡해질 수도 있다. 가족헌장은 소유권의 규정에 관한 주주 협약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법적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 이는 가족과 회사에 관한 가이드라인과 원칙을 서술한 강령에 가깝고 도덕적인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가족헌장의 최우선 목적은 가족의 안녕(welfare)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가족들이 이를 잘 준수하고 계승하기 위해서는 가족 간의 화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대부분의 가족헌장에는 가족회의나 가족협의회 구성 등을 포함해 가족의 정기모임에 관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다음의 사례를 통해 장수기업들이 가족 화합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는지 살펴보자.

앞서 소개한 13대째 창업자 가문에서 기업을 이어가고 있는 독일의 머크(Merck)가 이야기다. 머크는 1668년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학·의약 기업으로 전 세계 67개국에 4만여 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현재 11대에서 13대에 이르는 전체 가족의 수는 약 217명이고 이들 중 130명이 기업 지분의 70%를 보유하고 있다. 이 기업이 가족기업으로 수백 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가족기업을 이어가겠다는 가족 공동의 꿈에 합의한 결과다. 그래서 가족주주 전체가 주식은 가족 간에만 매매하겠다는 주주합의서를 작성해 가족헌장에 포함시키고 있다. 특히 머크가는 전체 가족들의 화합과 결속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그 일환으로 217명 전체 가족을 대상으로 인트라넷을 운영한다. 또한 가족들 모두가 참여하는 스키여행을 기획하기도 하고, 가족들이 돌아가며 가족파티를 주최하며 잦은 교류를 통해 가족의 화합을 다진다. 그리고 머크가 가족뉴스도 발행한다. 이를 통해 전체 가족들은 회사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가족과 주주로서의 책임과 결속을 위해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에도 적극적이다. 최근에는 13대 자녀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1년에 2번씩 15~20세, 21~30세 이상 그룹으로 나눠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여기에는 트레이닝, 현장 견학, 세대 간의 대화 등이 포함된다. 그들은 이런 체계적인 방법으로 미래 머크의 가족과 주주들을 지도한다. 소유권을 가진 가족들은 그들의 생활을 배당에 의존하지 않는다. 머크가의 가족주주 대부분은 의사, 직장인, 교사, 농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한 가족으로서의 동질성을 유지하고 가족 간의 갈등 없이 대를 이어 기업을 계승, 발전시켜온 것은 이러한 노력에 따른 것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가족들이 함께 문제를 합의하고 가족 간의 화합을 다지는 가족회의와 가족 전체를 지배하는 가족헌장이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창업자가 아무리 훌륭한 철학과 가치를 가지고 가족과 기업을 이끌어간다고 해도, 이것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가족들이 단지 듣고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후대까지 전해질 수 있도록 가족헌장과 같은 형식으로 명문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족회의 등을 통해 가족의 친목을 도모하고 가치를 계승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창업자의 가치는 세대를 이어 계승되며 가족과 기업의 DNA가 되는 것이다.


김선화 한국가족기업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