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림의 스타일이 있는 식탁

어린 시절 엄마가 즐겨 마셨던 홍차가 아련한 향기와 함께 슬그머니 우리 곁에 다가왔다. 커피의 열풍 속에서도 동네 골목길에 어느 날 들어선 홍차 전문점이 반가운 것은 아마 오랜 시간 모아온 필자의 소장품 중 많은 것들이 홍차와 깊은 연관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ANTIQUE SALON] 홍차의 향기, 일상의 쉼표가 되다
앤티크 컬렉터 백정림은…
품위 있고 따뜻한 홈 문화를 추구하는 하우스 갤러리 이고 대표다. 앤티크 테이블 웨어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테이블 세팅 클래스를 티파티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홍차가 새로운 트렌드로 부상한 것은 유럽 지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젊은 유학파들과 무관하지 않다. 커피가 대세인 미국 문화에 비해 유럽에서는 아직도 ‘애프터눈 티 타임’이 근무시간 중간에 버젓이 남아 있으니 그들의 홍차 사랑은 현대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근대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홍차만큼 역사적인 여러 사건에 단초(trigger)가 된 식품도 없다. 중국의 차 맛을 새롭게 알게 된 영국인들은 다량의 차 수입으로 무역역조가 커지자 중국과 아편전쟁을 일으켰고, 보스턴 차 사건은 미국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모두 홍차가 그 중심에 있었다. 차의 역사는 중국에서 기원전부터 시작됐지만 동양의 차 문화를 서양인들이 알게 된 건 15세기 후반 대항해 시대였다. 16세기를 거쳐 17세기에는 차의 인기가 더욱 높아지면서 중국으로부터 더욱 많은 찻잔이 수입됐다. 이때 수입된 중국 찻잔은 손잡이가 없는 볼(bowl) 형태여서 당시 유럽인들은 차를 차받침에 옮겨서 마셨다. 실제로 필자가 컬렉션한 1800년대 티 볼과 받침 중에는 홍차 색이 많이 배어 있는 받침접시(saucer)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런 고가의 중국 자기로 차를 마시는 것은 귀족들에게 그들의 부와 높은 지위를 과시하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래서 당시 수많은 귀족들은 차 도구를 손에 든 초상화를 그리도록 요구했다고 한다.

18세기 무렵 서양인들은 빛이 투과될 정도로 얇지만 내구성이 뛰어나고 우아한 중국 자기에 열광했다. 특히나 흰 바탕에 청색 안료로 문양을 그려 넣은 청화백자는 이국적이고 고급스러운 기호품의 상징이 됐다. 당시 도자기는 매우 값비싼 귀중품이어서 그 관리 역시 엄격하기만 했다. 귀족들의 사용인 중에서도 높은 직급인 집사와 같은 상급 사용인만이 은식기와 더불어 도자기의 총괄 관리자가 됐다. 따로 보관하는 방과 캐비닛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인이 멀리 여행을 떠날 때는 은행금고에 찻잔을 맡기기도 했다.


빅토리안 시대 후반, 더 화려해진 티 문화
1840년대 중국을 벗어나 인도 등에서 차 재배에 성공하면서 차의 대중화가 실현된다. 이때부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국의 ‘애프터눈 티’ 문화가 생겨났다. 애프터눈 티 문화의 발생은 산업혁명과도 무관하지 않다. 가정용 램프가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깨어 있었고 늦은 저녁식사를 하게 됐다. 즉 점심과 저녁 사이의 간격이 커지면서 사람들이 허기를 느끼게 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점심과 저녁 사이 마시게 된 차가 바로 애프터눈 티다. 당시 차는 ‘약’으로 취급됐기에 공복에 마시는 것이 몸에 좋지 않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애프터눈 티에는 빵과 버터, 설탕과자, 비스킷 등의 티푸드가 함께 서빙됐다. 식탁 문화의 화려함이 정점을 이루었던 빅토리안 시대 후반기가 되면서 차 문화는 더욱 화려해져서 3단 트레이가 등장하게 되고 티파티에 빼놓을 수 없는 스콘 역시 이때 등장하게 된다. 3단 트레이에 놓이는 음식은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맨 아래에는 속을 든든히 해주는 샌드위치, 가운데는 스콘 등의 베이커리, 맨 위에는 달콤한 초콜릿, 마카롱 등으로 구성된다.

품위 있고 따뜻한 홈 문화를 추구하는 필자의 하우스 갤러리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티파티가 열린다. 티파티를 준비하면서 가장 신나고 재미있는 과정 중 하나가 티푸드 메뉴를 정하는 일이다. 필자는 앞에서 말한 3단 트레이보다 2단 트레이를 더 선호한다. 앉아서 먹는 손님들에게 3단 트레이가 다소 높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맨 위칸에 놓이는 달콤한 디저트를 스털링(순은 95% 이상)이나 크리스털로 된 센터피스에 담아낸다. 티푸드의 내용도 집에서 만든 약과나 송홧가루를 꿀에 반죽해 만든 달콤한 다식으로 구성하는 등 꼭 서양 것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1 (왼쪽) 빅토리안 시대 디캐디. 화려하고 정교한 꽃무늬 조각이 수공예의 진수를 보여준다. (오른쪽) 방짜 스털링 디캐디로, 아르누보 시대이지만 간결한 라인은 아르데코로 이어지는 트렌드를 느낄 수 있다. 2 아트앤크래프트 시대의 티 스트레이너. 아름다운 문양이 핸드메이드의 진수를 보여준다.3 아르데코 시대의 퓨포카 초콜릿 포트. 초콜릿 포트는 손잡이가 가로로 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1 (왼쪽) 빅토리안 시대 디캐디. 화려하고 정교한 꽃무늬 조각이 수공예의 진수를 보여준다. (오른쪽) 방짜 스털링 디캐디로, 아르누보 시대이지만 간결한 라인은 아르데코로 이어지는 트렌드를 느낄 수 있다. 2 아트앤크래프트 시대의 티 스트레이너. 아름다운 문양이 핸드메이드의 진수를 보여준다.3 아르데코 시대의 퓨포카 초콜릿 포트. 초콜릿 포트는 손잡이가 가로로 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홍차의 매력은 분위기에 따라 그날그날의 홍차를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루를 차분하게 열어주는 우아한 잉글리시 블랙퍼스트, 우울한 기분을 업 시켜줄 수 있는 꽃향기나 과일 향기가 가미된 플래버드(flavored) 티,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다즐링 등으로 변화를 줄 수 있다.
1920년대 영국 민턴사의 티 잔.
1920년대 영국 민턴사의 티 잔.
20세기 초 영국 블랙퍼스트 잔.
20세기 초 영국 블랙퍼스트 잔.
불과 몇 년 전 스타벅스가 전부였던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지금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된 것처럼 조만간 홍차 전문 티 룸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희망이 차츰 현실이 되기를 바라며, 깊은 역사와 내공을 가지고 있는 홍차를 접함에 있어서 부디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기꺼이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실상 우리들은 시간의 대부분을 중요한 일보다 급한 일을 처리하는 데 쓴다. 처리하기에 급급한 일을 하느라 정작 나를 귀하게 대접하는 시간은 늘 없기 마련이다. 바쁜 일상을 핑계로 ‘빨리빨리’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홍차는 차분하게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줄 것이다. 막 시작되는 봄과 함께 천천히 우러나오는 홍차 향 속에서 ‘슬로 라이프(slow life)’의 여유를 마음껏 누리길 권하고 싶다.
1880년 영국 이마리풍의 티 잔으로 당시 자포니즘의 영향으로 화려한 색에 금박을 입혔다.
1880년 영국 이마리풍의 티 잔으로 당시 자포니즘의 영향으로 화려한 색에 금박을 입혔다.
티파티 세팅 tip
1 찻잔은 오른쪽, 디저트 접시는 왼쪽.
2 물컵은 오른쪽 상단(샴페인이 곁들여지는 티파티인 경우 물컵이 가장 오른쪽, 바로 옆 샴페인 컵).
3 3단 트레이가 없어도 티파티는 가능하다. 집에 있는 어떤 접시라도 훌륭한 센터피스 역할을 할 수 있다.
4 티푸드로 내는 디저트는 티와 어울리는 것이면 동서양 어느 것이든 OK!
5 티파티를 준비하는 안주인이 적어도 티푸드 하나 정도는 직접 만들자.
6 여자들의 화장처럼 모든 테이블 세팅의 마무리는 적절한 매트와 그와 어울리는 테이블 클로스임을 잊지 말자.


백정림 이고 갤러리 대표 | 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