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아의 정원에서 보낸 편지_1월 이야기

식물이 주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꽃과 푸른 잎들이 무성한, 화려한 자태는 물론이고, 숱한 고난을 견디고 어김없이 생명을 이어나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경이롭고 숭고하기까지 합니다. 많은 이들이 정원에 대한 로망을 갖고 있는 건 이처럼 식물이 주는 많은 이야기들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정원에서는 더 많은 이야기들이 피고 집니다. 그 안에서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크지요. 최근 강원도 속초시로 터전을 옮긴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 씨가 정원을 만들며 느끼는 단상과 함께 들려주는 생생한 정원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 마음속에서도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길 바랍니다.
정원에서는 수많은 이야기가 피고 진다.
정원에서는 수많은 이야기가 피고 진다.
# 인연과 변화
운명처럼 속초에 터를 잡은 후 달라진 삶

2013년 겨울, 우리 부부는 설악산 바로 밑 작은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가든 디자인을 의뢰하고 싶다는 속초에 사는 분의 연락을 받고 찾아간 마을이었다. 7년여의 긴 유학 끝에 한국에 다시 돌아와 전국 어디라도 좋으니 정원을 가꾸며 살 수 있는 곳을 찾아보자 하고 헤매 돈 지 3년 만에 찾아온 뜻밖의 만남이고 선택이었다. 마을이 마음에 들어 빈집을 물었더니 그날 만난 의뢰인이 파란 양철이 씌워진 기와집을 가리켰다. 집은 이미 2년이나 사람이 들지 않아 마당엔 사람 키를 훌쩍 넘긴 잡초가 무성했다.

그때 우리는 참으로 신기한 경험을 했다. 누가 봐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폐가가 우리 눈에는 시간을 거슬러 화려했던 기와집으로,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과 온정을 함께 나눴을 옛집의 따뜻함으로 다가왔다. 운명처럼 첫눈에 반해 그날 집을 계약했고, 그로부터 한 달 후 온전히 우리의 터전으로 삼았다. 가끔 정신을 차려보면 이렇게 무모할 수 있을까 싶은 결정이었다.

1년여가 지나가는 지금 필자는 매우 다른 아침을 맞고 있다. 아침 7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콩나물이 있어, 짭짤한 간고등어가 왔어”로 시작되는, 분명 아무리 들어도 반말 조인 듯한 1톤 트럭 행상 아저씨의 목소리를 알람을 대신해 눈을 뜬다. 지난 밤 불을 지핀 아궁이의 뜨끈함이 아랫목을 여전히 달구고 있어 일어나기 싫은 마음과 길게 대치하다, 결국 옷을 주섬주섬 입고 주방으로 향한다.
식물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열심히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며 진화한다.
식물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열심히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며 진화한다.
1년여 전만 해도 생각할 수 없었던 생활의 변화다. 하는 일이 분명 정원 관련 일이지만 설계와 디자인 작업이다 보니 밤일이 많아 새벽에 잠이 들면 한낮이 돼야 깨어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설악산 밑에 자리를 잡고서는 밤일이 수월치가 않아졌다. 자연스레 해가 떨어지면 마을에 짙은 어둠이 찾아오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나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잠이 쏟아진다. 일어나는 시각은 해가 뜨는 시각에서 그리 멀지 않다. 창호지 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셔 늦잠을 자려 해도 쉽지 않은 까닭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시각은 정확하게 오후 6시 30분경이다. 이는 남편이 하는 고유의 영역으로, 매일 이 시간에 30분 정도 불을 땐 뒤 아궁이를 덮어주면 밤새도록 따뜻함이 구들장을 통해 올라온다. 그런데 요즘, 우리 집을 감시하는 눈길이 따갑다. 설악산 국립공원의 산불 감시원 할아버지가 우리 집을 배회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기후는 겨울이 매우 건조하다. 낙엽 자체로도 건조하게 바싹 말라 있는데, 건조한 바람까지 불면 작은 불씨 하나에도 큰불이 일어나고, 자칫하면 걷잡을 수 없이 번질 수가 있다.


# 진화의 결과
화재를 ‘기회’로 삼은 씨앗의 지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집계에 따르면 지구의 반 이상이 화재의 경험을 안고 있는 땅이라고 한다. 물론 화재가 났다고 해서 모두 사람의 잘못에 의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 상태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기도 한다. 화재의 피해는 인간에게도 치명적이지만 식물과 동물이 입는 상처와 위험은 더하다. 하지만 정말 이런 재앙이 재앙으로만 끝날까.

지금도 우리는 풀지 못하고 있는 식물의 신비가 아주 많다. 특정 식물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원인 때문에 인간이 재배하는 일이 아직도 불가능하다. 씨앗은 대부분 두껍고 딱딱한 빗물조차 스며들지 않는 겉옷을 입고 있다. 대부분의 식물은 적당한 수분과 영양분이 확보되면 이 딱딱한 겉옷을 벗어버리고 싹을 틔워낸다. 하지만 그 과정을 우리의 과학으로는 다 풀지 못하고 있다.
‘화재 이후’라는 제목으로 출품된 2013년 영국 챌시 플라워쇼의 가든 디자인 작품. 화재 이후 땅에 어떤 변화가 찾아오는지를 디자인으로 보여준 작품으로 금메달을 수상했다.
‘화재 이후’라는 제목으로 출품된 2013년 영국 챌시 플라워쇼의 가든 디자인 작품. 화재 이후 땅에 어떤 변화가 찾아오는지를 디자인으로 보여준 작품으로 금메달을 수상했다.
그중 최근 밝혀진 이야기는 화재 시 발생하는 연기가 특정 식물의 씨앗을 틔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사실 산불은 이미 자라고 있던 식물, 그곳에 살고 있던 동물들에게는 더없는 재앙이지만, 기회를 노리며 언제든 새싹을 피워보겠노라 기다리고 있는 씨앗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다. 키 큰 나무가 사라져 햇빛을 마음껏 받을 수 있게 되고, 영양분을 다툴 잡초도 사라지고, 성장을 힘들게 할 해충들까지도 화재에 의해 일시적으로 전멸되기 때문이다. 산불이 난 지역이 몇 년 후에 다시 초록으로 생명을 되찾게 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 씨앗은 어떻게 화재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까. 흙 속에 묻힌 씨앗들이 화재를 감지하는 것은 연기다. 연기가 씨앗에 닿게 되면 씨앗은 화재가 났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 싹을 틔워내도 된다는 신호로 본다. 이런 연관관계를 풀어 그간 재배에 실패했던 식물들의 싹을 틔운 사례가 남아프리카의 키르스텐보시(Kirestenbosch) 식물원에서 있었다. 불을 피워 종이에 연기 냄새를 배게 한 뒤, 그 종이를 물에 담가 씨앗에 뿌려주니 인간의 힘으로는 싹을 틔워낼 수 없었던 씨앗이 발아됐다는 것이다. 물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아 아직도 활발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대부분의 씨앗은 두껍고 단단한 껍질로 보호된다. 이 겉껍질을 씨앗 스스로 깨고 나올 수 있어야 발아가 시작된다.
대부분의 씨앗은 두껍고 단단한 껍질로 보호된다. 이 겉껍질을 씨앗 스스로 깨고 나올 수 있어야 발아가 시작된다.
식물이 화재의 효과를 받아들인 것은 경험과 진화의 결과다.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났던 것이 아니라 재앙 속에서 장점을 찾아내고 그 장점을 활용하려는 생존의 지혜가 연기를 감지해 싹을 틔우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진화는 변화 속에서만 찾아온다. 그리고 그 변화가 달콤할 수만은 없다. 때로는 재앙이 돼 우리를 파괴하기도 하고, 지독한 갈등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런 불­­편한 변화가 찾아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식물에게서 그 답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식물은 직접 움직여 환경을 바꾸지 못할 운명을 스스로를 변화시켜 진화하는 길을 찾았다. 매년 피고 지는 똑같아 보이는 식물이지만, 가물었을 때는 가뭄의 경험을, 홍수가 났을 때는 홍수의 경험을 기억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그 기억을 씨앗에 담아 전달한다. 이런 노력이 1년의 반 이상을 비 한 번 내리지 않는 사막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선인장으로, 키 큰 나무들로 우거져 빛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아마존 숲에 공중에 매달려 살 수 있는 티란시아(Tilandsia)로 진화된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의 부주의와 잘못으로 일어난 화재까지도 자연 효과를 주장하며 두둔해줄 수는 없다. 다만 어떤 경험에서든 그 경험의 교훈을 축적하지 않고 잊고 다시 또 반복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는 식물의 지혜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오랜 기다림 끝에 갖게 된 정원에서 필자는 많은 실수들을 저지르고 있다. 봄에 피는 수선화, 튤립, 크로커스 등의 알뿌리는 겨울 추위에 대한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겨울이 오기 전에 심어주어야 한다. 속초의 겨울이 따뜻하다는 것만 믿고 2014년 12월 조금 늦게 튤립의 알뿌리를 심었는데, 이후 바로 한파가 몰아쳤다. 땅속은 이미 얼었을 텐데 그 안에서 움츠리고 있을 튤립의 알뿌리는 얼지 않고 잘 견디고 있을까. 매일 심어 놓은 자리를 쳐다보며 기원한다. ‘잘 이겨내고 꼭 살아남아다오’라고. 불안한 일을 해놓고 알뿌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필자가 어설프지만 이 경험 또한 필자와 튤립에게 긍정의 진화로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는…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정원 문화를 꿈꾸며 정원 관련 전문 글쓰기와 정원 설계를 함께하고 있다. ‘오 가든스(Oh Gardens)’의 대표이며, 저서로는 ‘정원의 발견’, ‘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 ‘영국 정원 산책’, ‘소박한 정원’ 등이 있다.


- 편집자 주 기획 박진영 기자 | 글 오경아 가든 디자이너·작가 | 사진 임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