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금융가가 ‘모뉴엘’ 충격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연 매출 1조 원의 잘나가는 기업에서 희대의 사기 기업으로 전락한 모뉴엘은
결국 2014년 12월 법원으로부터 파산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6768억 원에 이르는 은행권 부채는 여전히 분쟁의 불씨로 남은 상태다. 더구나 이 사건은 정부의 기술금융 강화에도 어둔 그림자를 드리우며 은행권에 말 못할 고민을 안기고 있다.
[ISSUE & FOCUS] 모뉴엘 사태로 벌벌 떠는 금융사
모뉴엘 사태라는 희대의 사기극에 정신 줄을 놓아 버린 금융권이 곧이어 다가올 후폭풍에 좌불안석이다.

사건을 요약해보면 로봇청소기와 홈시어터 PC 등을 생산해 연 매출 1조 원을 달성하며 화려하게 중소기업 신화를 써 가던 모뉴엘이 갑작스럽게 2014년 10월 법원에 기업회생관리를 신청했고, 화들짝 놀란 금융기관들이 그때서야 이 기업의 속을 들여다보니 매출의 90%가 가공매출이었다. 2008년 이후 가공매출 규모만 2조7397억 원에 달하니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던 ‘봉이 김선달’의 현대판 행보가 아닐 수 없다.

더욱 기가 막힌 대목은 모뉴엘이 자금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제주도 사옥 건립, 기업인수 등에 나서는 등 방만한 경영을 펼쳤지만 금융권에서는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모뉴엘은 수출 규모를 늘리기 위해 8000원짜리 제품을 250만 원짜리로 부풀리고 만기대출을 갚기 위해 위장 수출입을 반복했다. 허위로 위조한 수출채권으로 무역보험공사(이하 무보)에서 4928억 원의 신용보증을 받았고, 이를 통해 시중은행 10곳에서 3860억 원을 대출받았다.


모뉴엘 대출 피해 소송전 확산 불가피
한국수출입은행은 한술 더 떠 2012년에 모뉴엘을 ‘히든챔피언(수출우량기업)’으로 지정한 뒤 담보도 없이 1000억 원대의 신용대출을 해주기도 했다. 금융권에 따르면 모뉴엘에 대한 여신은 IBK기업은행이 1508억 원으로 가장 많고 KDB산업은행(1253억 원), 수출입은행(1135억 원), 외환은행(1098억 원), KB국민은행(760억 원), NH농협은행(753억 원) 등의 순이다.

이 중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무보의 무역보증으로 실행된 대출인데 이를 놓고 은행권과 무보가 서로 책임을 미루며 피 말리는 신경전을 펼치고 있다. 은행들은 무보에 대해 대위변제를 요구한 상태이지만 무보에서는 막대한 피해 금액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은행들의 요구를 있는 그대로 들어주기가 만무하다. 결국 모뉴엘 대출 건에 대한 심사와 이의신청 등 절차가 종료되는 오는 3월 초 이후 은행들과 무보 간 소송은 불가피해 보인다.

이와 관련해 시중은행의 고위 임원은 “무보의 보증을 믿고 모뉴엘에 이뤄진 대출에 대해서는 책임을 분명히 따져야 할 것”이라며 “만약 무보가 변제를 거부한다면 앞으로 무보의 보증을 더 이상 받지 않음은 물론 소송 등을 통해 강력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격앙된 모습을 보였다.

모뉴엘 사태를 겪은 은행들은 정부의 기술금융 강화 주문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는 분위기다. 예상치 못한 모뉴엘 한파로 기술금융이 된서리를 맞게 된 것이다.

믿었던 강소기업의 실적이 하루아침에 거짓으로 드러나고 막대한 규모의 충당금을 쌓아야 하는 상황에서 담보도 없이 기술만 믿고 대출을 하는 기술금융에 대한 껄끄러움이 상당한 것이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모뉴엘 사태로) 영업 현장이 위축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정부에서 기술보증을 강조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냐”며 “기술금융 대출 피해에 대한 책임을 줄이겠다고는 하지만 당장 현장에서 사고가 터지면 인사 등에 대한 불이익을 피할 수 없는 것 아니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모뉴엘 사태에도 불구하고 정부 당국에서는 은행권의 기술금융 실적을 점검하는 등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은행 혁신성 평가에서 기술금융 실적을 상당 부분 반영해 우수 은행에는 인센티브를 부여하겠다는 것인데, 사실 은행권이 무서워하는 것은 인센티브보다 실적 부진으로 당국의 눈 밖에 나는 것이다.

은행권 관계자에 따르면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2주가 멀다 하고 기술금융 우수 영업점을 방문해 독려하고, 주요 은행 담당부서 직원들은 매주 3~4회 금융위원회에 모여 기술금융 관련 회의를 한 후 한보따리 과제를 받아 오고 있다.

이 같은 당국의 독려 때문인지 기술신용평가(TCB)기관이 출범한 2014년 7월만 해도 486건에 그쳤던 은행권 기술금융대출 실적은 2014년 10월 말 6235건으로 늘었다.


무한질주 기술금융, 리스크 없나
최근과 같은 추세라면 중소기업 자금조달액(496조 원)의 5.2%인 기술금융을 20% 수준까지 높이겠다는 금융 당국의 목표가 불가능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 같은 속도를 뒷받침할 수 있는 리스크 관리다. 일부에서는 정부의 기술금융 다그치기가 결국은 후일 상당한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시중은행 마케팅부서의 한 임원은 “기술금융에 대한 정부의 실적 압박이 상당한 가운데 기업들에 대한 기술평가가 제대로 되지 않은 채 대출이 발생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며 불안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기술신용평가도 과부하가 걸린 상태. 과거에는 기업들이 기술평가를 신청하면 단 며칠이면 이뤄졌던 평가가 몇 주를 기다려도 제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일상사가 된 지 오래다.

이 관계자의 전언대로 기술금융대출을 받으려면 TCB를 반드시 받아야 하는데 현재 이 부문에 대한 과부하가 상당하다. 현재 기술가치 평가를 해줄 수 있는 곳은 국내에 기술보증기금, 한국기업데이터(KED), 나이스평가정보뿐이다. 전문기관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소리다.

한 은행 간부는 “기술금융 실적만 다그칠 게 아니라 관련 인프라 구축에도 신경을 썼어야 했다”며 “평가기관이나 인력 등 하드웨어는 그대로인데 엄청난 용량의 소프트웨어만 무리하게 돌리려다 보니 번번이 평가 시스템의 가동이 멈추거나 지체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며 현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무리수는 항상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마련. 과거 외환위기 이후 불같이 일었던 벤처 붐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거품을 키웠다. 1998년 정부에서 ‘벤처기업특별지원법’을 만들어 기술력과 성장성이 뛰어난 신생 기업 육성에 나선 게 대표적인 예다. 당시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2001년 1만1392개로 덩치를 키워 나갔던 벤처업계는 2003년 거품이 꺼지면서 업체의 반이 사라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최근 은행 현장 곳곳에서 나오는 우려의 목소리는 과거 벤처기업 거품 붕괴를 재차 상기시키며 정부의 실적 채근에 등 떠밀려 하는 금융 지원의 한계와 위험성을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한용섭 기자 poem197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