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직에서 CEO까지, 쿠킹 클래스에 열광 중
아내는 고교 동창과 여행을 떠났고 한 솥 끓여 놓은 곰국을 보며 한숨짓는 남편의 모습을 담은 광고가 한동안 화제였다. 그래서일까. 최근 은퇴 전후 남자들에게 요리교실이 인기다. 요리 늦바람이 골프나 주식투자보다 재미있고 가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남이 해주는 요리만 먹던 ‘상남자’들이 아내의 전유물로만 여기던 앞치마를 두른 이유가 뭘까.![[MEN`S FAVORITE] ‘상남자’가 앞치마를 둘렀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101/AD.25077523.1.jpg)
“선생님, 된장을 꼭 체망에 걸러야 하나요?”
“그래야 멍울이 지지 않고 국이 맑아집니다.”
요리 선생님의 설명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집중해 듣는 수강생들은 모두 중장년층의 남성들. 칼질을 하다 말고 수첩에 레시피를 꼼꼼히 적고 궁금한 건 바로 질문하는 등 열기가 후끈한 이곳은 서울 양천구 아버지 요리교실이다. 조리대 위에 레시피가 적힌 유인물과 함께 돋보기안경이 짝꿍처럼 놓여 있다. 수강생은 대부분 50~60대로 더러 머리가 하얗게 센 70대 은발의 신사도 보인다. 올해로 8년째 운영되고 있는 양천구 아버지 요리교실은 애초 여성주간 행사의 일회성 이벤트였다. 하지만 참석자들의 반응이 뜨거워 정규 강의로 개설됐고 온라인 추첨으로 수강 신청을 하고 매회 대기자들이 순서를 기다릴 정도로 문턱이 높은 인기 강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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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정예 요리수업은 성공한 남자들의 핫 스펙
초보 요리수업보다 심화된 요리를 배울 수 있는 전문 사설 요리학원에서도 중년층 남성 수강생들의 수가 점차 늘고 있다. 해외 유명 셰프를 초빙하는 경우도 있고 값비싼 식자재와 조리도구를 사용한다. 8~10명 정도의 수강생만 받아 소수 정예로 운영되는 만큼 전문직이나 사회적 위치와 함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수강생들이 찾는 것이 보통이다.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츠지원은 미국 CIA(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 프랑스 르 코르동 블루(Le Cordon Bleu)와 함께 3대 요리학교로 꼽히는 일본 요리 아카데미인데, 주로 40~50대 이상 기업체 간부 혹은 전문직 종사자 남성 수강생들이 찾아온다. 츠지원 업무팀 최은화 씨는 “해외 체류 경험이 있거나 각국을 여행 다니며 미식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는 분들이 많다”며 “일본, 이탈리아, 중국 등 다양한 강좌를 2년간 꾸준히 수강했다는 한 50대 의사 수강생은 처음엔 아내와 함께 다녔는데 요리에 재미를 느껴서 혼자서 수업을 계속 듣고 있다”고 전했다.
스포츠경향 국장으로 재직 중인 하재천 씨 또한 뒤늦게 요리의 즐거움에 빠져 안동찜닭, 탕수육, 파운드케이크, 피자 등을 쉽게 만든다. 후배들을 위해 직접 식빵을 구워 사무실로 배달을 할 정도다. 요리 하는 행위 자체가 창작 과정인 것이 매력적이라는 그는 초보딱지를 떼고 싶다면 좋은 조리도구를 사용하라고 한다. 주변 사람들을 초대해 음식을 만들어 주다 보니 최근에는 음식을 담는 그릇에까지 관심이 넓어졌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은퇴를 목전에 둔 그는 요리를 즐기면서 마음이 훨씬 느긋해지고 전혀 새로운 것을 해내면서 느끼는 성취감 또한 크다고 강조했다.
마포구에 위치한 쿠킹앤의 행복남 요리교실은 남성들만을 위한 특화된 요리교실로 유명하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나 임직원 등 사회 고위층 남성들이 주 수강생이라 밝히는 정동수 대표는 SK, 도래이첨단소재, 신한은행, 롯데 등 기업들과 함께 ‘쿠킹&팀워크’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고 전한다. “사내 요리 동아리에서 단체 강의 신청도 많은데 대부분 40~50대 이상 남성분들입니다. 현대모비스 해외 주재원들을 대상으로 한 한식 요리 코스도 진행했어요. 해외 체류 중 주재원 가족들은 물론 현지인들과 ‘요리’를 매개로 소통하고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을 꾀했습니다.”
해외 지사 업무 파트너가 한국을 찾았을 때 집으로 초대해 직접 요리를 만들어 대접하는 홈 파티 문화로 요리교실의 문을 두드리는 중년 남성들도 있다. 쿠킹앤의 행복남 요리교실을 수강한 이진수 씨는 생활용품업체 대표로 ‘요리’ 하나로 주변 아내 친구들의 남편들에게 공공의 적이 된 경우. 그는 무엇보다 가부장적인 남편, 아버지에서 탈출하게 된 계기로 요리를 꼽는다.
“아내의 고교 동창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 코스까지 4시간 동안 요리를 대접했어요. 내가 요리를 책임질 테니 실컷 수다 떨라고 했습니다. 대학생인 아들이 밤에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왔기에 앉혀 놓고 양장피를 만들어 먹였어요.”
집 안에서 늘 권위적이고 사업에 성공한 완벽하기만 한 아빠의 모습으로만 보던 아들의 반응부터 달라졌다.
“아들이 나를 무서워만 하지 좋아하지는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요리를 배우기로 마음먹었죠. 한번은 요리사 복장으로 직접 요리하는 내 사진이랑 음식 사진을 아들놈이 자기 페이스북에 올려 친구들 수십 명이 댓글을 달았다고 자랑하더군요. 사실 아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얼마 전에 난생처음 ‘아빠가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는 것 같다’는 고백까지 들었습니다.”
요리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고 강조하는 이진수 씨는 요즘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요리 배우라고 부추긴다고 한다. 요리를 하는 동안은 잡생각이 없어지고 시름이 사라지니 자기 치유 시간이 절로 될 뿐 아니라 가족관계가 달라진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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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눈뜬 ‘가족 중심’ 레시피
서울대 노화고령화사회연구소와 이화여대 글로벌식품영양연구소에서 함께 시행한 ‘골드쿡’ 프로젝트는 은퇴 전후의 중장년층 남성들을 대상으로 한 요리실습이었다. 현재는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진행 중이다. 2011년도에 시행했던 골드쿡 행사의 참가자 김대성 씨는 장기간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을 돌며 대사관에서 근무했던 외교관으로 지금은 은퇴 후 아내와 여수에서 노후를 지내고 있다. 평소 설거지 정도를 도왔지만 8주간의 요리 실습 과정을 마친 뒤 그는 많은 것을 느꼈다고 전한다. 무엇보다 집에서 복습해 만든 갈비찜을 맛본 며느리가 “아버님, 너무 멋지세요”하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뿌듯했다고. “갈수록 노령화되는 사회에서 노인에 대한 존경이나 권위가 줄어드는 추세다. 그런데 요리를 배운 뒤 삶의 재미가 크게 늘고 훨씬 젊어진 기분이다”라고 덧붙인다.
2012년 미래에셋 은퇴연구소에서 발표한 은퇴 관련 인식 조사에서 은퇴 후 함께할 시간을 묻는 항목이 있었다. 결과를 보면 남편은 54%가 하루의 절반 이상을 아내와 보내고 싶다고 답변한 반면, 아내의 47%는 하루 4시간 정도가 적당하다는 상반된 의견을 보였다. 치열한 경쟁을 버틴 뒤 직장에서 역할을 마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가족들에게 소외당하기 일쑤다. 아내 역시 괴롭긴 마찬가지. 고령화가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는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은퇴한 남편과 하루 종일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아내들이 손발 떨림, 두통 등 ‘은퇴남편증후군’을 겪는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에서 밥 세 끼를 먹는 ‘삼식이’ 남편의 위상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가 아닐까. 수명 100세 시대를 준비하고 남편들의 가사 참여 의식을 높이고자 시행한 남자들을 위한 요리교실은 회가 거듭될수록 가족, 넓게는 관계를 돌이켜보게 하는 매개체로 진화하고 있다.
‘아버지 요리교실’을 담당하는 양천구청 여성가족과 정책지원팀 김유진 씨는 “가족이 다시 모이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고 참가자들이 입을 모은다”며 “요리 기술을 배우러 오기보다는 가족 간의 소통을 원해 찾는 아버지들이 부쩍 늘어가는 추세다”라고 말했다. 주말에 아버지 요리를 먹으러 찾아오겠다는 출가한 자녀들의 전화를 받으며 좋아하는 60대 수강생의 이야기도 전했다. 곽충실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 교수 또한 은퇴 이후 가정 안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면서 “전혀 나의 영역이 아니었던 요리에 새롭게 도전하면서 의식이 변화되고 그 가운데 아내의 입장을 직접 겪으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했다. 가족이 다시 모이는 구심점, 그 가운데에 가장이라는 권위를 벗고 부엌에서 칼질하고 간이 맞나 묻는 아버지의 달라진 의식 변화가 흐르고 있다.
![[MEN`S FAVORITE] ‘상남자’가 앞치마를 둘렀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101/AD.25077527.1.jpg)
“제일 자신 있는 요리는 우럭찜, 전복 스테이크예요. 요즘 꽃게가 제철이죠? 꽃게찜, 꽃게볶음도 해먹습니다.”
주부 9단이라도 엄두가 안 나는 음식 아니냐고 놀라 묻자 “그렇게 ‘우와’ 하고 입을 쩍 벌릴 만한 요리 위주로 합니다. 남자들의 요리는 폼 나는 것이어야 하죠.(웃음)”
베테랑 셰프가 아닐까 짐작할지 모르겠으나 주인공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광고 히트작을 만들어온 국내 1세대 CF감독 이지송 씨다. ‘12시에 만나요, 브라보콘’, 장국영이 출연한 투유 초콜릿 광고가 그의 손에서 빚어졌다. 은퇴 이후 영상 작가라는 인생 2막을 열며 광고에서 다 쏟아내지 못한 예술을 담아내 개인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뜻밖의 ‘삶의 즐거움’이 찾아왔고 그것이 바로 요리였다.
이 씨가 그럴 듯한 메인 요리를 스무 가지 이상 만들 줄 알게 된 데에는 1년 반 넘게 ‘김승용의 남자들의 요리’ 클래스를 한 달에 한 번씩 수강한 배경이 있다. 우연히 알게 된 ‘남자들만을 위한 쿠킹 클래스’에 호기심이 생겼다. 수입주방업체 최고경영자(CEO)에서 ‘요리 선생님’으로 인생 후반전을 사는 김승용 씨에게서 모종의 연대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나 같은 나이 있는 사람이 젊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리들을 해주면 훨씬 소통이 잘됩니다. 20대에서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 직업을 가진 친구들의 모임이 있는데 제가 하루는 그 친구들을 다 초대해서 음식을 차려주었어요. 다들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세대 간의 격차는 전혀 못 느낄 정도로 화제도 훨씬 풍부해지고요. 사실 맛있는 걸 만들어 먹는 것보다 같이 먹는 즐거움, 더불어 나누는 그 시간이 정말 좋습니다.” ‘남자들의 요리는 다르다’고 강조한 맥락에는 요리하는 시간을 함께 즐기고 공유할 수 있는 삶의 지혜가 들어 있었던 것. 파티에 손님으로 초대돼도 불쑥 주방에 들어가서 몇 가지 요리를 뚝딱 만들어낼 정도로 경지에 오른 이 씨에게 남자들을 위한 요리 팁을 물어봤다.
“무조건 쉬운 조리법의 거창해 보이는 메뉴를 선정하세요. 제가 만드는 우럭찜은 20분이 채 안 걸리죠. 그리고 최상의 식자재를 고르는 장보기에 공을 많이 들이세요. 신선한 제철 재료가 요리의 성패를 좌우하거든요.”
이지혜 프리랜서│사진 샘표·츠지원·쿠킹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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