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 장수기업이 되고자 한다면, 장수기업의 성공 방식을 따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가업승계를 위해서는 창업 정신과 핵심 가치를 명확히 하고 이를 다음 세대에 계승하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
[FAMILY BUSINESS CONSULTING] 명문 장수기업의 성공 DNA
창업자인 김 모 회장이 가장 아끼는 물건 중 하나가 40년이 넘은 빚 바랜 공책이다. 여기에는 1973년 창업하면서 직원들에게 얘기한 창업 정신과 핵심 가치가 달필의 펜글씨로 적혀 있다. 그 당시 창립선언문에 쓰인 설립 이념과 핵심 가치가 이 회사를 40년 이상 지탱해온 것이다.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불리며 가장 존경 받는 경영자 중 한 사람인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60년에 걸쳐 사업을 하면서 구체적인 경영 활동은 그때그때 환경에 맞춰 바뀌어왔지만 경영 이념만큼은 변함이 없었다며 경영 이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초지일관 한 가지 경영 이념에 입각해 경영해온 결과 사회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60년을 성장, 발전해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에 장수기업이 가장 많은 이유
현재 가장 많은 장수기업을 보유한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에는 100년 이상 되는 기업 약 5만여 개, 200년 이상 되는 기업 3146개, 심지어 1000년 이상 된 기업도 19개로 일본의 장수기업 숫자는 세계적으로 봐도 경이로운 수치다. 왜 일본에는 유독 장수하는 중소기업이 많을까. 이에 대해 일본 장수기업을 연구한 구보타 쇼이치 호세이대 교수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첫째, 창업자 후손들이 ‘가업 계승’과 ‘기업 이념 실현’을 목표로 경영해왔기 때문이다. 일본 장수기업 대부분은 가족기업이며, 경영자도 대개 창업자의 후손이나 양자다. 후계 경영자들이 창업자의 경영 철학과 기업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온 것이 장수기업이 된 가장 큰 이유다.

둘째, ‘전통의 계승’과 ‘혁신’을 동시에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전통이라는 것은 고객제일주의, 품질본위, 종업원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 지역사회 공헌 등 근본적인 가치를 말한다. 혁신은 시대와 고객의 니즈에 맞는 신상품이나 새로운 서비스 개발, 신시장 개척, 신사업 진출 등을 말한다. 장수 가족기업들은 전통을 지켜나감과 동시에 끊임없이 혁신하며 변화하는 시장에 적응해왔다.

일본에서 장수기업 4000개 사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장수 경영의 성공 제1조건으로 사훈(가훈)의 계승을 꼽았다. 장수기업 중 사훈, 기업 이념이 명문화돼 있는 기업이 40%, 구전되고 있는 기업이 38%로, 약 80%가량이 어떠한 형태로든 기업의 정신적 유산을 보존하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의 장수기업은 창업 이후 경영의 근간을 이루는 ‘기업 이념’이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생산 기술, 시장 개발, 상품 개발 등의 물리적 혁신에는 적극적으로 나서면서도 기업 이념이나 사풍은 그대로 계승해온 것. 즉 정신적인 부분은 100년이 넘도록 지켜오면서 기술적 부분은 끊임없이 혁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사 결과를 보면 가족기업의 장수 비결은 창업자가 보여줬던 기업가정신과 경영 철학이 어떻게 꾸준히 후대로 대물림돼 발휘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유럽의 장수기업들은 어떠한가. 유럽에는 레 제노키앙(The Henokiens)이라는 세계적으로 200년 이상 된 가족기업 경영자들의 친목 모임이 있다. 여기에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8개국 40여 개의 기업이 회원으로 있다. 기업이 200년 이상 지속된다는 건 최소 7~8세대를 넘어 생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가족기업이 4대까지 생존하는 비율이 약 4%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이들의 장수를 우연으로 볼 수만은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200년 이상 생존할 수 있었을까.


장수기업은 수익성에 연연하지 않아
톨스토이는 소설 ‘안나 카레리나’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가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족은 불행한 이유가 각기 다르다”라고 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장수기업 연구로 유명한 미국의 윌리엄 오하라 교수는 장수기업들의 공통된 비결을 시간이 지나고 기업이 커나가도 처음 가졌던 이념과 삶의 본질을 잊지 않고,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기준으로 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과업 하나하나에 적용해온 가풍에 있다고 했다. 그러면 실제 장수기업 오너들은 자신들의 장수 비결을 어떻게 생각할까.

현재 레 제노키앙 모임에는 1731년 창업한 이탈리아 기업의 대표 피나 아마렐리(Pina Amarelli)가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자신의 회사가 400년 가까이 생존한 비결이 “윤리적 경영과 창업 초기부터 전수된 회사의 가치를 지켜온 것에 있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대부분의 회원들 역시 “핵심 가치를 지켜온 것”을 가장 중요한 장수 비결로 꼽는다. 한 회원은 “사회와 조화를 이루는 회사의 지배적인 가치와 기본 원칙을 지켜온 것”이 장수 비결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가치’라는 게 대체 무엇일까. 물론 나라마다 기업마다 차이가 있지만 가장 많이 꼽힌 가치는 ‘품질’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많이 꼽힌 가치는 ‘근면’과 ‘정직’이다. 그밖에도 다양한 핵심 가치가 언급됐는데, 이를 분류해보면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가족의 화합과 결속에 기여하는 가치다. 여기에는 존경, 충성, 정직, 명성 등이 있다.

둘째는 기업의 지속적 생존에 기여하는 가치다. 여기에는 기업가 정신, 근면, 최고 지향, 품질, 혁신 등이 있다. 셋째는 세대 간 핵심 가치로서 계승하고자 하는 가치다. 여기에는 스튜어드십, 책임감, 사회적 책임, 투명성 등이 있다.

200년 가족기업들은 수익성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수익성이란 사업을 영위해 나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결과일 뿐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다. 그들은 수익보다는 기업의 사명과 그들이 중요시하는 가치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고 자녀들은 가정에서 일상생활을 통해 가족의 가치를 배우며, 이 과정에서 가족의 가치가 자연스럽게 자녀들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기업에서도 창업 초부터 계승된 가치를 신봉하고 이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므로, 핵심 가치는 가족문화를 넘어 기업문화로 이어진다. 그런데 단지 듣고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구성원들이 가치를 따르게 할 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전해질 수 있도록 명문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어떤 가족은 가족헌장과 같은 형식으로 가치 및 가족의 행동 규범을 명문화해 후세에 전하고, 어떤 가족은 할아버지가 손자 세대에 직접 편지 형식의 글을 남김으로써 후대의 마음속에 본보기가 된다. 이러한 노력으로 창업세대의 가치는 세대를 이어 계승되며 가족과 기업의 DNA가 되는 것이다.


김선화 한국가족기업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