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 컬쳐 & 소사이어티 노혜원 대표

노혜원 대표는 스물두 살에 망막색소변성증 판정을 받았다.

점점 시력을 잃게 되는 이 병은 우울증을 동반했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우울증 탓에 그는 항상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았다. 그런 그가 최근 공연기획사를 차려 세상과 자신을 밝힐 빛을 찾아 나섰다.
[PEOPLE] 이야기가 있는 재즈 콘서트
노혜원 대표는 한국 나이로 마흔 살이다. 서울예고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그가 망막색소변성증 판정을 받은 건 스물두 살 나던 해였다. 유전자 이상이 원인인 망막색소변성증은 야맹증으로 시작해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희귀병이다. 국내에는 개그맨 이동우가 이 병을 앓으면서 병명이 알려졌다.

그가 망막색소변성증 판정을 받은 건 미국 유학 생활 중이었다. 망막색소변성증은 환자마다 원인이 다르고, 진행 속도도 제각각이다. 따라서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닥친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증의 상흔
노 대표의 경우도 그랬다. 그가 살던 미국 샌디에이고는 전쟁으로 팔, 다리가 잘린 상이용사가 많았다. 그들을 보며 자신이 처한 상황이 최악은 아니라고 자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빨리 병이 진행된다는 증상이 발견되면 어김없이 우울증이 찾아왔다. 주기적으로 반복된 우울증은 회를 거듭할수록 더 큰 무게로 그를 짓눌렀다.

“처음 시도했던 자살에서 깨어났을 때 의사 선생님에게 던진 첫 마디가 ‘얼마나 더 먹어야 죽을 수 있나요’였어요. 죽는 것도 너무 힘이 들었어요. 그럴수록 죽음에 대한 유혹은 점점 더 강해졌고요.”

몇 번의 병원행을 겪은 그에게 절실한 건 삶의 목표였다. 그렇게 국내 한 리서치회사의 번역을 시작했다. 2년 전 그는 그마저도 쉽지 않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어느 날 밤 번역을 하려고 컴퓨터를 켰는데 모니터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무렵부터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심장에 문제가 생긴 줄 알고 병원을 찾았지만 의사는 정신과 진료를 권했다. 한 번 시작된 패닉은 매일, 3개월 동안 이어졌다. 그 끝에 자살 충동이 찾아왔고 그는 다시 병원으로 실려 갔다. 시립병원에서 하루를 보낸 후 그는 가족이 있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PEOPLE] 이야기가 있는 재즈 콘서트
그때는 이미 시력을 잃어 혼자서 다닐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온종일 집에 있으면서 그는 어떻게 죽을까만 생각했다. 그런 사이 병은 더 진행됐고, 그 충격으로 그는 다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이번 충격은 전과 비할 바가 못 돼 7월에 입원해 8월 초에야 퇴원했다.

“병원에 있을 때 정신과 선생님이 음악회를 해보라고 권하셨어요. 병원에는 오랫동안 입원한 환자들이 많아요. 그들만큼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보호자들도 있고요.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낸 친구 중에 클래식을 전공한 친구 10명을 모아서 그들을 위한 공연을 했어요. 다들 너무 좋아하셨어요. 함께 공연한 친구 중에 얘 낳고 전업주부가 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지난 10년 중 그날이 가장 행복한 날이었대요.”


12월 13일, 학동사거리 설악홀서 첫 공연
그 모습을 보며 그는 다음번에 죽고 싶은 생각이 들 때까지라도, 살아 있는 나를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장애라는 멍에가 그를 힘들게 하지만 자신이 가진 것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해줄 때 자신이 가장 행복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이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병이 깊어 실명에 이르더라도 자신의 일을 통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게 행복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닿았다.

릴 컬쳐 & 소사이어티는 그런 고민의 소산이다. 다행히 강남에 건물을 가진 지인이 언제든 공연장을 쓰라며 그를 응원했다. 회사를 차리면서 그는 ‘관객이 즐길 수 있는 공연’을 모토로 잡았다. ‘멋진 척’만 하는 공연은 의미가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공연을 보며 즐겁고, 마음 따뜻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이다. 조금 욕심을 부리자면 공연을 통해 ‘우리 사는 세상이 살 만하다’는 걸 느꼈으면 좋겠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한국에서 엔터테인먼트는 돈을 벌기 위한 산업이라는 걸 알았어요. 경제적인 논리로 접근하다 보니 관객과 아티스트는 안중에도 없는 거죠.”

소외된 아티스트들에게 애정도 생겼다. 20대는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열정으로 버티겠지만 나이가 들면 생활이 아티스트의 발목을 잡는다. 그런 현실을 보며 그는 또 하나의 목표를 추가했다. 실력 있는 아티스트들이 설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 그들이 공연을 통해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을 담은 릴 컬쳐 & 소사이어티의 첫 공연이 오는 12월 13일, 학동사거리 설악홀에서 열린다. ‘JBeeS 재즈 빅 밴드’와 함께 하는 이번 공연은 귀에 익은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노래가 만들어진 시대의 무성영화도 공연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아울러 그가 직접 무대에 나서 곡 해설과 함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계획이다.

“공연은 CD나 라디오와 달리 공연장 자체의 울림이 있어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나아가 심장이 뛰기를 바라요. 그걸 통해 한 달이 지나도 마음에 남을 수 있는 공연으로 만들 거예요.”

그는 가급적 많은 중산층이 공연을 즐겼으면 한다. 한국의 공연 문화는 대부분 상류층을 위한 경우가 많다. 중산층이 즐길 수 있는 공연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그의 공연은 그 중산층이 즐길 수 있도록 기획됐다.

“그들에게 ‘행복’에 대해 말하고 싶어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 행복(good looking life)이 아니라 ‘진짜 행복(real happy life)’요. 특히 우리 아이들이 그걸 알았으면 해요. 언젠가는 아이들을 위한 공연도 열 생각이에요. 열 살, 열한 살이 되면 사춘기가 온다는데, 그때도 유년의 순수한 마음을 지킬 수 있는 힘을 키워주고 싶어요. 그걸 통해 ‘나 혼자가 아니라 모두가 행복한 게 정말 중요하다’는 걸 알아주기를 바라요.”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 사진 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