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hourglass): 유리병 속에 담긴 시간
농경사회가 시작된 후 인류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인식하고 그 규칙성을 측정하기 시작했다. 시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해시계며 이후 물시계가 발명돼 해가 없을 때도 시간을 잴 수 있었다. 사람들의 이동 범위가 넓어지자 이 시계들은 휴대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드러났다. 보다 가벼우면서도 정확하게 시간을 잴 수 있는 시계가 필요했는데, 모래시계는 그 요구에 맞춰 실용적으로 개발됐다. 모래시계가 언제 발명됐는지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다. 다만 8세기경 프랑스의 샤르트르 대성당 성직자 루이프랑(Luitprand)이 유럽에 소개했다고 전해진다. 중세 후기부터 항해술이 급격히 발달함에 따라 배에서 균등한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모래시계를 사용하곤 했다.‘절제’와 시간의 공통점은?
미술에서 모래시계는 실질적 용도보다 정신적 상징으로 더 많이 묘사됐다. 미술작품에 모래시계가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338~1340년 암브로지오 로렌제티(Ambrogio Lorenzetti)가 시에나 정부청사 내부에 그린 벽화에서였다. 그 벽화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급성장한 도시국가 시에나의 ‘선한 정치’를 미덕들과 함께 상징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거기서 모래시계는 4대 미덕 중 하나인 ‘절제’를 의인화한 인물의 손에 들려 있다. 이전까지 ‘절제’는 대개 물병을 들고 있거나 물을 술잔에 따르는 모습으로 표현돼 과도함을 희석시킨다는 의미를 나타냈다. 그런데 로렌제티의 벽화에서 ‘절제’가 갑자기 모래시계를 갖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일각에서는 ‘절제’의 라틴어 temperantia가 ‘시간’을 뜻하는 tempus에서 일부분 유래했기 때문에 절제와 시간, 모래시계가 연관된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절제와 시간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시간 자체의 특징보다는 절제의 속성이 시간을 재는 시계의 성격과 더 가깝다는 데서 얻을 수 있다. 시계가 정밀하고 규칙적으로 움직이듯이 인간의 몸과 마음도 각 부분을 규제하는 절제가 있어야 바르게 작동한다는 원리다. 따라서 절제는 측량을 기본으로 하며 정확, 분별, 신중, 금욕, 겸손과 같은 행동 규범을 가리킨다. 절제와 모래시계를 결합한 것은 이러한 절제의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그것이 국가와 시민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덕목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또한 당시 모래시계가 시간의 과학적 측량 도구로서 널리 실용화돼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모래시계의 구조는 일정한 양의 모래가 투명 유리병 속에 담겨 조금씩 밑으로 흘러내리게 돼 있다. 그것은 제한된 시간의 양과 그 시간이 쉬지 않고 흐른다는 것, 한번 빠져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다 소진하면 멈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치 정해진 수명을 살아가는 인간의 유한한 삶을 비유하는 듯하다. 모래시계는 지나간 시간과 남은 시간, 붙잡을 수 없는 현재의 시간 등 시간의 경과를 눈으로 직접 확인시킨다. 그래서 기계시계가 발명된 후에도 오랫동안 모래시계는 인생에 대한 메타포로 시각이미지 속에 자주 등장했다.
현실의 인물 중에서는 특히 성 히에로니무스(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가 모래시계를 항상 곁에 두고 있는 사람으로 그려졌다. 그는 기독교 초대 교부로서 저술가이자 수도원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무엇보다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해 큰 업적을 쌓았다. 교부들 중 가장 학식이 높았던 그는 서재에서 연구를 하거나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그림 속에 자주 표현됐다. 15세기 안토니오 다 파브리아노(Antonio da Fabriano)의 작품으로 알려진 ‘서재의 히에로니무스’에서는 추기경으로 묘사된 히에로니무스가 소박한 책상에 앉아 생각에 잠겨 집필을 하고 있다. 그의 주변, 그림 오른쪽 책꽂이 아래 칸에 모래시계가 놓여 있다. 그 모래시계는 지식인 수도자로서 히에로니무스가 지닌 절제의 미덕을 암시하며, 쌓여 있는 책과 마찬가지로 그의 지적 성취를 반영한다. 그러나 한편 책꽂이 위 칸에 놓인 타버린 촛불처럼 모든 것이 시간에 따라 소멸한다는 것, 즉 인간의 삶도 그처럼 일시적이고 덧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훌륭한 상징, 모래시계
유한한 삶에 대한 은유로서 모래시계는 삶의 종말인 죽음을 명상하게 하는 매체로 폭넓게 사용되곤 했다. 일례로, 1610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발행된 헨드리크 혼디우스(Hendrick Hondius)의 그림책에 실린 삽화를 들 수 있다. 그 책은 ‘독일 저지대의 유명 화가들 초상’이라는 동판화집인데, 68페이지에 걸쳐 흉상 초상화들을 싣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죽음을 의인화한 동판화를 넣었다. ‘장례 후, 삶(Post Funera, Vita)’이라는 문구가 적힌 그 그림에는 뼈만 남은 해골로 표현된 ‘죽음’이 날카로운 창으로 날개 달린 시계와 모래시계를 연결한 끈을 끊으려 하고 있다. 모래시계가 유한한 시간에 속한 세속의 삶을 의미한다면 날개 달린 시계는 지상의 시간을 벗어난 무한한 시간, 즉 영원한 삶을 의미한다. 그 둘이 끈으로 연결돼 있는 것은 현세의 삶이 내세에도 이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죽음이 그 연결을 끊어버리면 더 이상 현실이 사후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죽기 전에 현실의 삶을 잘 살아야 장례 후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래시계는 삶과 죽음에 대한 훌륭한 상징이다. 그런데 죽음은 정해진 시간의 종말일 뿐 아니라 또 다른 시간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래시계의 상징을 조금 변형시켜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행하는 시간을 표현했다. 변형된 상징은 모래시계에 날개를 달아 만들었는데, 서양의 많은 묘지들에서 비석이나 기념물에 새겨진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날개 달린 모래시계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 현세의 삶을 나타내는 동시에 더 이상 한정된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영원한 세계로 떠나감을 보여준다. 오늘날에는 발달한 기계시계나 전자시계들이 미세한 시간의 단위까지 정밀하게 측정해낸다. 일반적인 시계들은 무한 반복을 전제로 움직이므로 일정한 기간이 아니라 영구한 시간의 한순간을 가리킨다. 첨단 시계들에 밀려 모래시계는 과거에 비해 실용적 가치가 현저히 위축됐다. 그러나 그 상징적 가치는 엠블럼, 기업 로고, 장식 패턴, TV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유효하게 남아 있다. 현대 도시인들은 대부분 기계시계에 의존해 바쁘게 살아간다. 그 반복적인 일상에서 가끔은 우리의 시간을 일회적인 모래시계에 담아 보면 어떨까? 날개 달린 모래시계처럼 유한에서 무한으로 도약을 꿈꿀 수 있다면.
박은영 미술사가·서울하우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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