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8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뜻있는 행사가 열렸다. 한국연금학회 주최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머튼(Robert Merton) 박사가 ‘국제적 과제인 은퇴 기금 확보를 위한 대응’이라는 주제로 2시간에 걸쳐 열강을 펼친 것. 이날 노 경제학자가 주목한 것은 바로 확정기여형(DC형) 퇴직연금이었다. 머튼 박사는 왜 퇴직연금, 그것도 DC형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을까.
[PENSION PLAN]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가 바라본 DC형 퇴직연금
올해 만 70세가 되는 로버트 머튼 박사는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한 후 MIT와 하버드대를 거쳐 지금은 MIT 재무관리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머튼 박사는 주식 옵션 평가의 주요 수단으로 채택된 블랙-숄스 공식을 변형해 파생금융상품 시장의 급속한 신장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53세이던 1997년에 숄스와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재정경제학의 권위자인 그는 숄스와 함께 헤지펀드인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를 설립했으나 아시아 금융위기 직후인 1999년에 대규모 투자 손실을 입어 뉴욕 금융당국으로부터 4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은 아픔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날 강연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아마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에 의의를 뒀을 것이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막상 강연에 돌입하자 머튼 박사의 열정적인 모습과 강의 내용에 빨려 들어갔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속설은 적어도 이날 강연회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강의의 핵심 내용은 은퇴 이후의 안정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DC형 퇴직연금의 효과적 활용이었다. 머튼 박사는 왜 퇴직연금, 그것도 DC형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을까.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라고 해서 퇴직연금에 관심을 보이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필자가 아는 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중 퇴직연금에 깊이 천착한 이는 그가 유일하다.

머튼 박사가 DC형 퇴직연금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부터라고 한다. 미국 경제가 저성장과 저금리 국면으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1990년에서 1999년까지 10년간 미국 경제성장률의 산술평균은 3.23%였으나, 2000년부터 2009년까지의 10년간 산술평균은 1.83%로 줄어들었다. 대표 금리인 10년 국채 금리의 1990년대 10년간 산술평균은 6.67%였으나, 2000년대 10년간 산술평균은 4.46%였다. 2000년을 전후해 미국 경제는 고성장·고금리에서 저성장·저금리로 상황이 크게 바뀐 것이다.


2000년 미국 퇴직연금 시장, DB→DC형 전환
이런 상황은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에 대한 책임을 기업이 부담하는 확정급여형(DB형) 퇴직연금을 운영하는 기업에 큰 리스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DB형은 퇴직할 때까지만 책임을 지는 우리나라의 DB형과 달리 수급권을 획득한 종업원에게는 그 종업원이 사망할 때까지 연금을 지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퇴직한 종업원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오래 살게 되자 사망할 때까지 연금을 지급해야 하는 기업의 부담은 늘어났는데, 저성장으로 퇴직연금에 부담금을 납입할 여력은 줄어들고 저금리로 적립금의 운용 환경은 악화됐다. DB형 퇴직연금을 운영하는 기업은 퇴직연금의 적립 단계와 지급 단계 양쪽에서 충격을 받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기업들이 선택한 것은 DB형을 DC형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퇴직연금 시장에서 적립금 기준으로 DC형이 DB형을 추월한 것은 1992년이었다. 1991년에 미국의 DB형 적립금은 1조800억 달러로 1조530억 달러인 DC형을 근소하게나마 앞서고 있었다. 그러나 1992년에 1조1540억 달러를 기록한 DC형이 1조1040억 달러의 DB형을 앞지른 것이다. 그 이후 DC형과 DB형의 격차는 더욱 벌어져 20년 뒤인 2012년이 되면 약 5조 달러를 기록한 DC형에 비해 DB형은 약 2조7000억 달러에 머물러 있다. 머튼 박사가 퇴직연금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2000년 경 미국의 퇴직연금 시장은 DB형의 DC형으로의 전환이 가속화되고 있던 시점인 것이다.


DC형 성공 운용이 노후 좌우…“목표는 자산이 아닌 소득”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머튼 박사가 이러한 상황에 주목한 이유는 뭘까. 여기서 우리는 DB형과 DC형의 운영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DB형은 적립금 운용과 관련한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주체가 기업이다. 반면에 DC형의 운영 및 책임 주체는 가입자 개인이다. 애초에 고소득 근로자를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 도입된 DC형이 퇴직연금의 지배적 제도로 자리 잡은 것은 퇴직연금의 운용에 대한 책임이 중산층으로 이관됐음을 뜻한다. 머튼 박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한 것이다. 고령화로 노후 소득 보장의 중추가 공적연금에서 사적연금으로 이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적연금의 핵심인 퇴직연금의 운용 주체가 기업에서 개인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노후 소득 보장에서 개인의 책임이 증가함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노후 소득 보장의 핵심 주체가 국가에서 기업으로, 다시 기업에서 개인으로 바뀌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DC형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것이 개인에겐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DC형 적립금을 효과적으로 굴리는 것도 쉽지 않은데, 전체 은퇴 설계에서 DC형이 차지하는 몫을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할 수 있도록 적립금을 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은 IQ가 높은 물리학자에게도 어려운 작업일 것이라고 머튼 박사는 말한다. DC형이 대세인 시대에 DC형의 성공적 운용은 중산층의 노후 생활을 좌우하는 핵심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에겐 분명 구미가 당기는 과제로 다가왔을 것이다. 특히 LTCM의 실패로 수많은 투자자에게 아픔을 준 적이 있는 머튼 박사에게 DC형의 효율적 운용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하나의 사명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머튼 박사는 DC형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첫걸음이 은퇴 설계의 목표를 명확히 설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은퇴 이후에도 은퇴 직전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것에 은퇴 설계의 목표를 맞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은퇴 시점은 인생의 정점기로 삶의 패턴과 수준이 정형화된 시기다. 이것이 은퇴 이후에 뒤틀린다면 커다란 스트레스에 직면할 것이다. 머튼 박사가 좋은 은퇴란 커리어 후반기에 원하는 생활수준을 은퇴 이후에도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생활수준의 유지와 관련해 그는 자산이 얼마 필요한가가 아니라 연소득이 어느 정도 필요한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DB형에서는 소득대체율 개념을 활용해 은퇴 이후에 받을 수 있는 소득 수준을 말하고 있지만, DC형에서는 은퇴 시점까지 쌓을 수 있는 자산(wealth)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DC형에서도 목표는 자산이 아니라 소득이 돼야 한다는 말이다. DC형에서 원하는 소득 수준을 정하고, 그에 맞게 DC형의 적립금 운용 방침을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나이를 기준으로 동일한 솔루션을 제시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같은 나이라도 소득 수준이 다르고, 받을 공적연금 급여액도 다르며, 성향도 다르기 때문이다. 나이로 묶어 평균적인 잣대를 제시하는 것은 머리는 오븐에 넣고, 다리는 냉장고에 넣어 평균온도를 0도로 맞추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목표는 나이를 기준으로 집단화할 것이 아니라 개별화해야 하며, 지금은 기술적으로 이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의 주장 중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대목은 디폴트 옵션(default option)이다. 디폴트 옵션은 가입자가 운용 방법을 지정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선택되는 옵션을 말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퇴직연금이 발달한 미국의 DC형 가입자들도 한번 운용 방법을 정하면 잘 바꾸지 않는 게 항상 문제로 지적돼 왔다. 사람은 어떤 일이 중요하더라도 그것이 미래의 일이라면 뒤로 미루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행동경제학에서 발견한 이런 교훈을 DC형의 제도 설계에 반영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것도 은퇴하는 날 연락받는 사람에게도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제도가 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머튼 박사가 자신에게 부여한 과제이면서 동시에 필자가 그에게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손성동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