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티크 로펌이 뜨는 이유

대한변호사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에서 개업한 변호사가 처음으로 1만 명이 넘어섰다. 법률 시장에서 변호사들의 생존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변호사의 전문성 제고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된 상황에서 ‘부티크 로펌’이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서울시 개업 변호사 1만 명 시대. 중·소형 로펌의 전문화는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서울시 개업 변호사 1만 명 시대. 중·소형 로펌의 전문화는 피할 수 없는 과제다.
부티크 로펌은 해상, 의료, 정보기술(IT), 엔터테인먼트 등 특정 법률 분야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작은 규모의 법률사무소를 뜻한다. 송무(訟務)를 기본으로 기업 법률 등 전반적인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형 로펌이 종합병원이라면 부티크 로펌은 여성병원이나 척추병원과 같은 일종의 전문병원이다. 1990년대 유럽과 미국 등에서는 기업 자문 위주의 업무에 염증을 느낀 많은 변호사들이 대형 로펌을 떠나 전문성을 띤 중소형 로펌으로 이동했는데, 이 과정에서 ‘작은 점포’, ‘소매점’을 의미하는 ‘부티크’라는 용어가 로펌에 사용됐다. 국내 부티크 로펌은 1990년대 후반 벤처 열풍을 타고 성황을 이뤘다. 법무법인 지평, IBC법률사무소, I비즈니스컨설팅 그룹 등이 벤처기업의 본산 서울 테헤란 밸리 근처에 사무실을 열고 벤처기업들의 법률적 약점을 보완해주는 전문 부티크 로펌으로 활약했다. 한빛, 서정, 우현 등 금융 전문 부티크 로펌들도 외환위기 직후 대형 로펌들과 경쟁하며 금융기관의 부실 채권 매각을 도우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지금은 대형화된 법무법인 율촌 역시 1997년 김앤장의 조세 전문 변호사들이 뭉친 일종의 부티크 로펌이었다. 부동산 전문 로펌 대지의 이건욱 대표 변호사는 “2000년 초반만 해도 법률 수요가 많았고 공급은 적었기 때문에 전문 로펌 형태를 오래 유지할 필요가 없어 많은 부티크 로펌들이 전문성이라는 강점은 유지하되 종합 법률사무소 형태로 속속 탈바꿈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2014년 부티크 로펌은 훨씬 구체화, 세분화된 것이 특징이다. 살아남은 부티크 로펌은 대형 로펌과의 경쟁에서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고,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다양한 영역의 부티크 로펌도 생겨났다. 사회가 복잡다단해지면서 까다로워진 법률 소비자들의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비스 분야는 더욱 세분화됐다. 즉, 고도화된 사회를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한 분야에 정통한 법률 전문가에 대한 욕구가 신(新)부티크 로펌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대규모 해외 바이오매스 프로젝트나 삼림 개발 자문 등을 담당하는 환경 전문 로펌이 있는가 하면, 영화진흥법 제정이나 저작권, 연예인 전속 계약 소송을 주 업무로 하는 엔터테인먼트 전문 부티크 로펌 역시 최근 한류 붐을 타고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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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티크 로펌의 성공 요건은 무엇일까. 먼저, 그 분야에 대해 충분한 법률적 지식과 경험을 가진 전문 변호사가 있어야 한다. 부티크 로펌은 변호사가 3~4명에서 많게는 20명 정도로 구성돼 있는데,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면 대형 로펌과의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최근 대형 로펌을 나와 부티크 로펌을 설립한 한 변호사는 “대형 로펌도 팀플레이기 때문에 한 분야에 정통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며 “시니어, 주니어를 통틀어 제대로 사안을 알고 있는 핵심 변호사는 결국 5명 안팎이므로 전문성을 갖춘 부티크 로펌이라면 대형 로펌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이유로 부티크 로펌은 대형 로펌에서 특정 분야를 오랫동안 담당하던 변호사가 개업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 타이틀을 달기 위해서는 최소 10년 이상의 경력이 필요한데, 대형 로펌들이 인기를 얻고 규모의 성장을 이룩한 것이 불과 20년 안팎의 일이다. 다시 말해, 대형 로펌이 한창 덩치를 키울 시점에 10~20년씩 경력을 쌓은 전문 변호사들이 이제야 본격적으로 배출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IT 전문 부티크 로펌 ‘테크앤로’ 역시 김앤장 출신 구태언 변호사가 설립한 회사다. 그는 검찰의 디지털 포렌식(컴퓨터 법의학) 수사를 국내 최초로 도입한 검사 출신으로 20년 경력의 1세대 IT 전문 변호사로 이름을 떨치다 정보 보호를 중심으로 하는 부티크 로펌을 설립했다. 그는 “대형 로펌에서 자신의 분야를 확고히 다진 변호사들이 충분한 경험을 바탕으로 부티크 로펌의 전성시대를 열고 있다”며 “아직은 걸음마 단계로 로펌들이 각자 제 색깔을 내려면 조금 더 시간이 흘러야 한다”고 말했다.


지식과 경험, 업계 평판이 성패 갈라
한 분야에서 자리를 잡은 부티크 로펌은 이제 대형 로펌과의 경쟁에서도 지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다. 지적재산권 전문 ‘다래’나 해상 전문 ‘세경’ 등은 각종 로펌 평가에서도 높은 순위에 오르고 있다. 조용식 법무법인 다래 대표 변호사는 “1999년 창업 당시만 해도 한 분야만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로펌의 성공 가능성이 불투명했지만 점차 우리나라에서도 전문성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며 “한 분야에 강하다고 입소문이 나면서 대기업 사건도 많이 수임하고 수수료도 대형 로펌 수준으로 받게 됐다”고 전했다.

결국 ‘간판’만 내건다고 해서 모두 부티크 로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장에 제대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실력과 경험을 겸비하고 이에 대한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부티크 로펌을 표방하는 곳은 많지만 ‘제대로 된’ 부티크 로펌이 많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용식 변호사는 “의료계 전문의처럼 자격증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에는 얼마나 큰 사건을 수임해 좋은 성과를 이끌어내느냐가 관건”이라며 “어느 분야의 명의 하면 누가 떠오르는 것처럼 그 분야의 법률 권위자는 어떤 변호사다 이렇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부티크 로펌을 두고 상반된 시각도 존재한다. 시장에 잘만 정착하면 분명 경쟁력이 있지만 부티크 로펌은 그 자체로 큰 리스크도 내재하고 있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지나치게 전문성을 강화하다 보면 이것이 오히려 부메랑이 돼 돌아오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실제 이 과정에서 문을 닫은 로펌도 많다. 가령, 민간 투자 전문을 표방했던 한 로펌은 투자 거품이 꺼져 업종을 바꿔야 했고, 재개발·재건축 부티크 로펌은 시장이 잠식되면서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한 부티크 로펌 대표 변호사는 “한 분야 전문이라고 하면 다른 분야에선 비전문가 취급을 하는데, 가령 부동산 전문을 내세우면 일반 형사 수임은 전혀 들어오지 않는 데다 고급스럽고 비싸다고 여겨 외면을 받을 수도 있다”며 “전문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때문에 많은 부티크 로펌은 회사 자체의 전문성보다는 변호사 개개인의 영역 세분화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법무법인 차원에서는 다양한 사건을 수임하고, 개별적으로는 전문성이 발현될 수 있도록 이원화 전략을 취하는 것이다. 이 변호사는 “요즘에는 아예 처음부터 특정 분야를 정해 그쪽으로만 실무 능력을 쌓아 스타 변호사가 되겠다는 후배 변호사들도 많다”며 “로펌이 분명 전문화로 가는 것은 맞지만 모든 측면에서 두루 실력을 쌓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고 경계했다.

다가올 변호사 2만 명 시대에는 대형 로펌과 경쟁력을 갖춘 전문 부티크 로펌만이 생존할 것으로 내다보는 시각도 많다. 미국의 소송 전문 부티크 로펌 발트릿 벡허먼 팔렌차 앤 스콧은 GM, 모건스탠리와 같은 거대 클라이언트를 보유하고 있으며,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엘 고어 전 미 대통령 후보 사이의 소송을 대리했을 정도로 입지가 탄탄하다. 우리나라의 부티크 로펌 역시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윤경 ramji@hankyung.com | 사진 한국경제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