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향으로 그는 사실적 재현을 중시하는 유럽의 고전적 미술 전통보다 상징주의 경향을 띠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바다의 시’ 중 ‘밤’, 캔버스에 유채, 라스팔마스 네스토르 미술관](https://img.hankyung.com/photo/202101/AD.25095285.1.jpg)
태생적 공포를 간직한 바닷가 출신의 화가
스페인 화가 네스토르 마르틴 페르난데스 데 라 토레(일명 네스토르·1887~1938)의 ‘대서양의 시’ 중 ‘밤’은 묵시록적인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파도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것은 마치 고래처럼 생긴 흉포한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소년은 투우를 하듯 그 괴물의 등 위에 올라타 있고 여인은 괴물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일보직전이다.
과연 이 괴물은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 눈에 그것은 초현실세계의 형상이지만 바닷가 사람들에게는 언제든지 눈앞에 나타나 자신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현실적 위협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뭍사람들에게 바다는 낭만의 장소이지만 섬사람들에게 그곳은 때때로 생과 사를 가르는 공포의 대상인 것이다.
![‘바다의 시’ 중 ‘잔잔한 바다’, 캔버스에 유채, 라스팔마스 네스토르 미술관](https://img.hankyung.com/photo/202101/AD.25095286.1.jpg)
이 점은 그가 남긴 대부분의 작품들이 상징주의 경향을 띠고 있다는 점만 봐도 분명하다. 그 대표적인 작품은 그가 필생의 작업으로 삼은 ‘우주 구성요소의 시(Poems of the Elements)’다. 네스토르 자신이 상상력을 바탕으로 구축한 이 시각적 대서사시는 원래 바다, 대지, 불, 공기 등 크게 4개의 카테고리로 나눠 연작을 내놓을 계획이었지만 그가 완성한 것이라고는 ‘바다의 시’ 연작뿐이었다. 그의 때 이른 죽음으로 ‘대지의 시’는 미완성으로 남았고 ‘불의 시’와 ‘공기의 시’ 연작은 아예 착수조차 하지 못했다.
![‘대지의 시’ 중 ‘밤’, 캔버스에 유채, 라스팔마스 네스토르 미술관](https://img.hankyung.com/photo/202101/AD.25095287.1.jpg)
‘대지의 시’ 연작 중 ‘밤’은 사랑을 나누는 아담과 이브를 묘사한 작품이다. 여기서 두 사람을 둘러싼 것은 선악과가 아니라 뱀의 형상을 연상시키는 이름 모를 열대식물이다. 네스토르는 선악과를 직설적으로 그리는 대신 그것을 따먹도록 유혹하는 뱀의 형상을 암시한 것이다. 한편으로 나무는 카나리아제도에 서식하는 열대식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것은 두 연인을 끝없이 사랑에 빠지게 하는 최음제일지도 모른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에 영향 끼쳐
네스토르는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바르셀로나와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특히 파리에서는 그의 장식적인 양식의 작품들이 파리지앵들로부터 큰 인기를 모았다. 그는 공공건물에 장식미술품을 설치하는 한편 극장의 무대장치 디자인에도 재능을 보였다.
![‘바다의 시’ 중 ‘만조’, 캔버스에 유채, 라스팔마스 네스토르 미술관](https://img.hankyung.com/photo/202101/AD.25095288.1.jpg)
1938년 네스토르는 ‘바다의 시’의 ‘밤’에 등장하는 소년처럼 파도의 등을 타고 홀연히 피안의 세계로 떠났다. 그의 이름은 그 후 서서히 잊혀졌다. 그는 주류 서양미술사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현대미술사의 대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초현실주의 최고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섬뜩한 상상력은 네스토르에게서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정석범 한국경제 문화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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