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만든 고전들_두 번째 ‘단군신화’

어떤 자가 인간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신화, 세계 어디에 내놔도, 어떤 명작과 겨루어도 그 세계관과 가치관 측면에서 손색없이 빛나는 이야기. 지난 반만 년 우리 민족의 유전자로 자리 잡아온 ‘단군신화’ 얘기다.
일러스트 추덕영
일러스트 추덕영
‘단군신화’는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다. 이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늘 들어오던 이야기다. 할머니 무릎을 베고 듣던 옛날이야기 정도까지는 아니나 홍익인간의 사상을 주억거리며 학창시절 빼놓지 않고 공부했던 이야기다. ‘단군신화’의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환웅이 인간 세계를 다스리기 위해 내려왔는데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되기를 소원하자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시험에 통과해야 한다고 말해준다. 일종의 관문이기도 하고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이 시험이 생각만큼 녹록지는 않았던 것 같다.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가지고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으로 살 수 있다고 했으나, 이 시험에 통과한 동물은 곰뿐이었다. 곰은 이후 웅녀로 살아남아 환웅과 결혼했고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가 단군왕검이다. 조선민족의 시조인 단군왕검에 얽힌 이야기다.

중국, 일본의 건국 신화와 비교해 보면 약소해보일지도 모르겠다. 중국의 ‘반고신화’의 경우 수만 년 동안 알 속에 갇혀 있던 혼돈과 암흑이 움직여서 하늘과 땅이 되고, 왼쪽 눈은 태양이 오른쪽 눈은 달이 됐으며 피는 강물이 되고 살은 논과 밭이 됐다. 그리고 ‘여와’라는 여신이 너무 심심하고 외로운 나머지 흙을 반죽해서 자기와 닮은 형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일본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남신과 여신을 만들었는데 남신과 여신이 소금물 몇 방울을 떨어뜨려 일본 열도를 만들었다. 이후 남신 이자나기와 여신 이자나미는 산과 들, 강과 바다를 낳는데 마지막 불의 신을 낳던 중 여신이 그 불에 타서 죽게 되자, 남신이 황천국에 여신을 찾으러 가나 신의 명령을 듣지 않아 이자나미의 몸이 구더기로 변했고 남신 이자나기는 죽음의 부정을 털어내기 위해 목욕재계를 하면서 좌우 눈과 코를 씻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황실의 조상신이 태어난다.


‘단군신화’만이 가진 ‘인간되기’ 노력
어떠한가? 중국과 일본의 신화가 거창한 모험과 신이한 위력으로 좀 더 그럴 듯하게 보이는가? 물론 그럴 수도 있다. 중국 신화가 우주를 갈라 땅과 하늘을 만들고, 일본 신화가 소금물 몇 방울을 떨어뜨려 일본 열도를 만들어내면서 거창한 모험과 신이한 위력을 뽐내는 것이 굉장하기도 하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단군신화’만이 가지는 ‘인간되기’의 노력이 다른 신화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어느 건국 신화가 이렇게 인간이 인간이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내고 있을까. 어느 신화가 거대한 모험 대신 인간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택할 수 있을까. 인간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고자 하는 노력과 그러한 시련 속에서만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 이는 ‘단군신화’에서만 찾을 수 있다. 심심하고 외로운 여신이 흙으로 빚어서 만든 것도 아니고 부정한 것을 씻어내는 과정에서 저절로 탄생한 것도 아니다. 우리 신화 속 인간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과정 에서 탄생한다. ‘인간다운 인간’이고자 하는 것에 대한 탐구가 우리 신화 속에 있다.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는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상징일 것이고, 호랑이는 호랑이를 떠받드는 부족의 이름일 것이나 이미 인간이 된 각각의 부족이 ‘인간’을 목적으로 수련하고 인내하고 극기하는 과정은 지극히 실존적이고 철학적이다. ‘인간’이 단지 저절로 주어지는 생물학적 ‘종’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서일까. ‘단군신화’는 태곳적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 삶 안으로 들어와 ‘단군신화’의 물음을 확인하며 지금 여기의 삶의 의미를 되묻는다. 얼마 전 한국 연극계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오태석 연출가가 ‘단군신화’를 패러디했는데 바로 같은 문제 제기다. 2000년대 우리 신화에서 ‘단군신화’가 어떤 의미일지 묻는 것이다. 제목은 ‘마늘 먹고 쑥 먹고’다. 마늘 먹고 쑥 먹으며 인내한 결과로 인간이 됐지만 반만 년을 살아오는 동안 다시 짐승이 돼간다고 느낀 인간이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 되밟아가는 과정을 서사화한 뮤지컬이다. 바로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 지금 우리는 어떠한 노력이, 지향이 필요한 것인가라고 묻는 것. 만약 지금 우리의 모습이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면, 동굴로 돌아가 다시 인간다운 인간이 되겠다는 메시지에 다름 아니다. 혹여 지금 우리가 바로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면 우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참다운 모습은 무엇일지 묻는 뮤지컬이기도 하다. ‘마늘과 쑥’이 묻고자 하는 것은, 그러므로 인간다운 인간에 대한 호소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인간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고자 하는 노력과 그러한 시련 속에서만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 이는 ‘단군신화’에서만 찾을 수 있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빛나는 이야기
이 질문에 곧바로 답하기 전에 잠시 여유가 된다면, 노래 하나를 들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가사는 이렇다. ‘어느 문 닫은 상점 길게 늘어진 카펫/ 갑자기 말을 거네/ 난 중동의 소녀/ 방 안에 갇힌 열네 살/ 하루 1달러를 버는/ 난 푸른빛 커피/ 향을 자세히 맡으니/ 익숙한 땀, 흙의 냄새/ 난 아프리카의 신/ 열매의 주인/ 땅의 주인 (중략) 난 사람이었네’ 앞부분의 가사를 보여주면서 초등학생인 아들에게 제목을 한번 맞춰보라고 했더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가만히 다시 읽어보라고 하니, ‘사람’을 발견했다는 뜻일 것 같다고 말한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묻자 그냥 ‘사람’을 강조하는 말을 보니 그런 것 같다고 한다. 아이의 말이 얼추 맞기도 하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 들어가자 눈에 띄는 카펫, 그 아름다운 무늬 위로 중동 소녀의 땀방울이 보인다. 그뿐인가. 커피의 향기 속에서 아프리카 소년의 흙냄새를 맡기도 한다. 지금 눈앞에 놓인 카펫과 커피에 사람의 땀 냄새가 빼곡히 배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카펫과 커피가 바로 ‘사람이었네’라고 말하는 노래다. 가만가만한 시선 속에서 ‘사람’의 가치를 발견하는 노래다. 아마도 분명하지는 않으나 이 노래를 부른 루시드 폴이라는 가수가 발견한 ‘사람’은 단지 아프리카의 한 소년만은 아닐 듯하다. 카펫 속에서 소녀의 노동을 발견해낸 ‘인간다운 인간’의 삶의 문제를 얘기하는 것일 게다.

젊은 가수가 부른 가요가 선뜻 내키지 않는다면, 세계 4대 뮤지컬 중 하나로 꼽히는 ‘레미제라블’의 장발장 아리아를 들어봐도 좋을 듯하다. ‘나는 누구인가(Who am I)’라는 노래다. 장발장이 어느 날 내가 누구인지 묻는다. 실은 장발장이 마들렌으로 개명해서 넉넉하고 안온한 삶을 살고 있을 때다. 그런데 어느 날 장발장을 닮은 한 사내가 장발장으로 몰려 처벌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바로 그때 묻는 질문이다. 낮은 저음으로 시작해 포효하는 절규로 끝맺는 아리아, 그 속에서 던져지는 질문이 바로 ‘Who am I’다. 장발장은 말한다. 적어도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을 통해 얻어질 수 없다는 것, 그러면서 묻는 질문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 이때 ‘나’는 ‘인간다운 인간’이 무엇인지 묻는 물음에 다름 아니다.

‘단군신화’가 가진 현대성, 그 지극한 인간적 가치가 느껴지는가? 그 어떤 신화가 이런 물음을 품어낼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자가 인간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신화. 세계 어디에 내놔도 어떤 명작과 겨루어도 그 세계관과 가치관의 면에서 손색없이 빛나는 이야기다. 세계 구석구석을 여행하면서 “당신네 건국 신화를 어떻게 되오”라고 물어봐라. 그 어떤 신화와 비교해도 좋다. 단, 멋지고 웅장한 모험담의 규모를 보기 전에 그 철학적 가치관에 대해 견주어보라. 인간이 누구인지 묻고, 인간다운 인간이 누구인지 묻는 질문이 담긴 신화가 있는지 찾아보아라. ‘단군신화’는 지난 반만 년 우리 민족의 유전자로 자리 잡아 왔다.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오늘의 마늘과 쑥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 단언컨대 이 질문이 계속되는 한 대한민국의 신화도 계속될 것이다.


박숙자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