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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발칸반도에 숨은 작은 나라 슬로베니아. 작고 사랑스러운 도시, 그림 같은 호수, 신비로운 알프스 산맥, 그리고 중세시대의 거리가 어우러져 매력적인 풍경을 빚어낸다. 크로아티아나 체코, 오스트리아 등에 비해선 덜 알려졌지만 그만큼 때 묻지 않은 나라다. 우리가 지금까지 봐오던 유럽과는 또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발칸반도가 숨겨둔 보석,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와 블레드 호수
슬로베니아라는 나라가 있다. 크로아티아 옆에 자리한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와해되면서 생겨난 독립 국가다. 원래 슬로베니아 여행은 계획에 없었다. 크로아티아 이스트라반도를 여행 중이었는데,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독일 여행자가 슬로베니아를 강력히 추천했다. 여행자들이 다른 여행자들을 꼬드길 때 흔히 쓰는 말을 했다.

“여기 온 김에 슬로베니아에도 가봐야지. 안 가면 후회할 걸. 여기에 다시 온다는 보장도 없잖아. 여행이란 할 수 있을 때 해야 하고 갈 수 있을 때 가야 하는 법이지.”

나도 어쩔 수 없는 귀 얇은 여행자였다. 그날 밤 게스트하우스 거실에 설치된 컴퓨터로 슬로베니아를 검색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며칠 뒤 슬로베니아로 가는 유레일패스를 손에 쥐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자료를 검색하다 블레드 성의 사진을 본 후 슬로베니아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사랑스럽고 다정한 도시, 류블랴나
먼저 슬로베니아에 대해 잠깐 알아보자. 슬로베니아는 우리에게 그다지 잘 알려진 나라가 아니다. 발칸반도에 숨은 듯 자리하고 있다. 세계지도에서도 슬로베니아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 이탈리아에 둘러싸여 있는 데다 면적도 무척 작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11분의 1. 대략 1000만 ㎢. 딱 전라도 넓이다. 인구는 겨우 200만 명이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나라이지만 슬로베니아를 다녀온 여행자들은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동유럽의 스위스’, ‘알프스의 양지바른 곳’, ‘전원의 나라’ 등 슬로베니아의 별명만 들어봐도 어떤 나라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작고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나라가 슬로베니아다.?

슬로베니아 여행의 시작은 수도 류블랴나(Ljubljana)다. 발음하기가 약간 까다로운 이 도시는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작다.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인구의 14%가 산다고는 하지만, 인구라고 해봐야 28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슬로베니아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생산하지만 산업화된 행정도시라기보다는 작은 소도시에 가깝다. 걸어 다녀도 하루, 아니 한나절이면 이 도시의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 있다.
그림 같은 풍경의 블레드 호수.
그림 같은 풍경의 블레드 호수.
걸어서 하루, 구석구석 골목 산책
류블랴나는 에모나(Emona)라는 로마도시로 출발했다. 그런 까닭인지 시 곳곳에 로마시대의 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이후 15세기에 합스부르크 왕조가 통치했는데, 이때 흰색의 교회와 저택이 많이 들어섰다. ‘화이트 류블랴나’라는 별명도 그때 얻은 것이다. 1809년부터 1814년까지는 동부 아드리아 해로 진출하려는 나폴레옹이 일시적으로 만든 일리안 주의 수도이기도 했다.

유럽 대부분의 도시가 그러하듯 류블랴나 여행의 시작 역시 한가운데에 자리한 프레셰르노프 광장(Presernov Square)이다. 슬로베니아의 국민 시인 프레세롄을 기념한 동상이 있는 곳이다. 낭만주의의 선두주자였으며, 강렬한 문장으로 유명했던 시인이다. 시인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에는 그가 사랑했던 여인 율리아가 있다. 평생 사랑했지만 신분 차이로 함께 할 수 없었던 그들이었다. 지금은 동상으로나마 서로를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광장을 나오면 곧장 류블랴나 시가지다. 바로크 양식과 아르누보 스타일의 건축물이 즐비하다. 산책하듯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니기 좋다.

류블랴나는 작은 도시라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다녀도, 길을 잃어도 조금만 걸으면 지나갔던 그곳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그러니 길 잃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골목을 산책하는 다정해 보이는 부부와 수레 가득 꽃을 담아 팔고 있는 반백의 할아버지. 모퉁이 빵가게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풍겨 나온다. 거리에는 유독 젊은이들이 많은데, 대부분 류블랴나 대학생이라고 한다. 2만 명이나 된다. 류블랴나의 거리를 걷다 보면 이 도시의 이름이 왜 류블랴나인지 이해가 간다. 슬로베니아어로 류블랴나는 ‘사랑스럽다’는 뜻이다.?
블레드 섬에 자리한 성당
블레드 섬에 자리한 성당
광장 옆에는 트리플교(Triple Bridge)가 있다. 류블랴나 엽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소다. 애초에 북서 유럽과 남동 유럽 국가들의 왕래를 위해 중세시대에 다리를 놓은 이후 1929~1932년에 두 개의 다리가 더 놓이면서 트리플교가 만들어졌다.

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티볼리 공원에 닿는다. 류블랴나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공원이다. 수많은 조각상과 함께 곳곳에 분수대가 있다. 공원에는 각종 스포츠 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데, 슬로베니아의 국가 대표 선수들도 이곳에서 연습한다고 한다.?

류블랴나 여행의 하이라이트이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명소는 류블랴나 성이다. 9세기에 처음 세워졌다가 1511년 지진으로 파괴된 후 17세기 초에 재건됐다. 류블랴나 성은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가장 전망이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동안 요새, 감옥, 병원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각종 전시회와 이벤트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류블랴나 사람들이 결혼식장으로 가장 애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시장 구경도 빼놓을 수 없다. 세상 곳곳에는 아름다운 시장이 많지만 류블랴나의 시장은 지금까지 봐온 가장 아름다운 시장 중 하나다. 트리플교 옆에 자리하고 있다. 다양한 기념품을 주로 팔지만 먹을거리도 종종 눈에 띈다. 노점이 일렬로 늘어선 곳도 있고 꽃 가게와 청과물 시장도 들어서 있다.
류블랴나 시내를 흐르는 류블랴니차 강.
류블랴나 시내를 흐르는 류블랴니차 강.
달력에서 오려낸 동화 같은 풍경, 블레드 호수
알프스 산은 유럽의 많은 나라가 공유하는 산이다. 알프스 하면 스위스를 떠올리지만 사실 절반 이상을 오스트리아가 가지고 있다.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도 지분을 갖고 있고 슬로베니아도 발을 걸치고 있다. 줄리안 알프스라고 부르는,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댄 북서부 산악지대다. 트리글라브 등 2000m 이상 고봉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 6월까지도 잔설이 남아 있을 정도다.

블레드 호수는 ‘줄리안 알프스의 진주’라고 불리는 곳이다. 둘레 6km의 작은 호수이지만 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알프스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들어 만들어졌다.

호수가 보여주는 풍경은 정말이지 그림 같다. 푸른 물비늘을 일으키며 햇살을 반사하는 호수와 그 호수 위에 떠 있는 작은 섬, 그리고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알프스 산맥은 방금 달력에서 오려낸 듯한 풍경을 보여준다.
한가로운 풍경의 티볼리 공원.
한가로운 풍경의 티볼리 공원.
블레드 호수가 유명한 건 호수에 떠 있는 블레드 섬 때문이다. 이 자그마한 섬은 슬로베니아에서 유일한 섬으로 전통 나룻배 ‘플레타나’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 블레드 호수엔 플레타나가 23척뿐이다.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시대 때부터 그랬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블레드 호수가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딱 23척의 배만 노를 저을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 숫자가 200년 넘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뱃사공 일은 가업으로만 전해지고 남자만이 할 수 있다고 한다.

배를 타고 10분 정도 가다 보면 블레드 섬에 닿는다. 99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예쁜 바로크식 교회 ‘성모마리아 승천 성당’이 있다. 1000년도 더 된 교회다. 성당은 결혼식 장소로 애용되는데, 결혼식은 못 올려도 성당 내부에 있는 ‘행복의 종’을 울리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종을 울리면 소원을 이뤄준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블레드 섬에는 항상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류블랴나 여행의 시작 프레셰르노프 광장.
류블랴나 여행의 시작 프레셰르노프 광장.
호숫가 절벽 위에는 블레드의 상징인 블레드 성이 자리한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자리한 모습이 동화 속에나 나옴직하다. 마법에 걸려 잠에 빠진 공주가 왕자의 키스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이 성은 약 800년 이상 남부 티롤의 주교가 앉던 의자가 있는 성당이다. 이후에는 유고슬라비아 왕족의 여름 별장으로 쓰였다고 한다.

성 한쪽에는 블레드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하는 작은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는데 주로 검과 갑옷 등이 진열돼 있다. 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와인을 시음해볼 수도 있다. 옛날 중세 복장을 한 와인 소믈리에가 반갑게 맞아준다. 슬로베니아 동쪽의 와인지대는 고대부터 중요한 와인 공급 지역이었다고 한다.

호숫가에는 옛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인 요시프 티토가 사용했던 호숫가 별장 ‘호텔 빌라 블레드’가 있다. 세계 최고 레스토랑과 호텔들을 국가별로 선별한 가이드북 ‘를레 에 & 샤토’ 멤버에도 가입돼 있는 이곳은 고(故) 김일성 북한 주석이 14일 동안이나 머물고 갔을 만큼 멋진 풍광과 아늑함을 자랑한다.
슬로베니아 전통 공예품을 만들고 있는 장인.
슬로베니아 전통 공예품을 만들고 있는 장인.
아! 참, 슬로베니아를 일컫는 또 다른 별명이 있다. ‘유럽의 미니어처’다. 이 작은 나라 안에 유럽의 모든 것이 다 모여 있기 때문이다. 알프스의 드높은 설산이 있고 지중해의 눈부신 햇살도 쏟아진다. 뜨거운 광천수를 분출하는 온천 지대도 있고 탐스러운 포도가 익어가는 와이너리도 드넓다. 말 탄 기사를 마주칠 것 같은 중세 도시도 거닐 수 있다.



Plus Info.


발칸반도가 숨겨둔 보석,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와 블레드 호수
슬로베니아로 가는 직항 항공편은 없다. 한국과 직항으로 이어지는 가장 가까운 공항은 독일의 뮌헨 공항. 류블랴나까지는 아드리아에어(www.adria.si)를 이용하는 편이 가장 저렴하다. 유레일패스를 이용하면 기차로 류블랴나에서 블레드까지 갈 수 있다. 약 40분 소요. 블레드는 오스트리아 국경과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크로아티아 등 인근 국가에서 도착하고 출발하는 국제선 전용 기차역이 따로 있다.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www.EurailTravel.com/kr)를 참조하면 된다. 중부 유럽과 발칸반도를 잇는 주요 열차편도 류블랴나를 거쳐 간다. 시차는 한국보다 7시간 늦고 기온은 한국보다 선선한 편이다. 비자는 필요 없다. 통용되는 화폐는 유로화. 물가는 한국과 비슷하다. 블레드의 그랜드 호텔 토플리체(www.hotel-toplice.com)는 유서 깊은 호텔이다. 호수를 바라보는 전망이 빼어나다. 류블랴나의 센트럴 호텔(www.centralhotel.si)은 기차역에서 가깝다. 시내 관광의 중심인 프레셰르노프 광장도 지척이다.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