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찰리 채플린’ 꿈꾸는 코미디언 구봉서

시대를 풍미했던 어릿광대는 대중의 뇌리에서 잊히고 있었다. 2009년 뇌출혈로 뇌수술을 받아 한때 ‘별세설’까지 나돌았던 노장 희극인 구봉서(88)가 최근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온 국민을 웃기던 청년은 백발성성한 노인이 됐건만, 그의 마음속 찰리 채플린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CELEBRITY] “삶이란 눈물 서린 코미디 같은 것… ‘웃으면 복 온다’는 진리 잊지 말기를”
코미디언 구봉서를 만난 건 2013년 11월 28일 서울 잠원동 그의 자택에서였다. 거동이 불편해 밖에서 만나기는 힘들다고 했다. 신장투석을 하러 병원에 다녀온 직후, 소파에 몸을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웬걸, 잡지(머니)를 건네는 기자에게 “책 말고 진짜(돈)를 줘”라고 농담을 던진다. 혼자 서있는 게 힘겨워보였지만 구봉서는 카메라 앞에서 연방 개구쟁이 표정을 지었다. “오늘 힘들고 내일 멀쩡하다. 이렇게 죽을 때까지 살 것 같다”고 눙쳤다. 얼어붙었던 분위기는 그 한 마디에 온기를 되찾았다. 누가 그를 ‘한물간’ 코미디언이라 했던가. 미수(米壽)의 나이에도 매일 책을 읽고 뉴스를 본다는 그는 여전히 순발력 있고 재치 넘쳤으며 따뜻했다.

거실 한편엔 얼마 전에 받았다는 은관문화훈장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많은 후배 코미디언들의 축하 속에서 훈장을 받아들고 아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기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희극인 인생 70년, 세 번째 문화훈장을 받다

소감이 어떠셨습니까. 이 훈장은 70년 희극인 인생의 집약체이기도 하지요.
“세 번째 받는 훈장이라 크게 와 닿는 건 없었어요. 나이가 있으니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어요. 죽기 전에 기록을 남기려고 하는 거다 싶으면서도 쓸모없는 사람 챙겨주니 고맙더라고요.”


시상식 때 후배 개그맨들이 ‘구봉서 패러디’를 했지요. 행사가 끝나고 뒤풀이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시상식 자리엘 나갔어요. 오후 5시에 가서 밤 11시에 끝났으니 제법 오래 있었죠. 끝나고 김학래, 엄용수 같은 후배들 30명이랑 밥을 먹었지. 2013년 10월에는 이 친구들이 ‘구봉서 60주년 기념 회고전’도 열어줬어요. 내가 출연했던 영화 포스터를 모아놓고 헌정 공연도 해주고…. 걔들이 참 잘해요. 아, 그날 기막힌 일이 또 있었어요. 손주만한 애들이 날 보고 ‘예전에 그렇게 많이 웃기셨다면서요’라고 하더군. 참 내.(웃음)”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그래. 그랬지요 뭐. 우리 손자 손녀들도 내 존재를 잘 모르니 요즘 사람들은 오죽하겠어. 상 받으면서 신문이랑 TV에 가끔 나오니까 그제야 할아버지가 왕년에 좀 웃겼구나 하는 걸. 하긴 내가 집에선 옛날 얘기를 많이 안 하니까 그럴 만도 하지요.”


전성기 땐 출연한 작품을 가족들은 못 보게 했다고 들었습니다.
“나도 보기 싫었으니까. 웃기려고 별짓 다하는 꼴을…. 그냥 고집이었지. 허허.”



찰리 채플린 꿈꾼 희극배우, ‘웃으면 복이 와요’ 폐지 땐 회의감
구봉서는 한때 이름 석 자로 대한민국을 배꼽 잡게 만든 희극인이었다. 1945년 악극단인 ‘태평양 가극단’의 희극배우로 시작해 70여 년 세월 동안 400여 편의 영화와 980여 편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1969년부터 장장 15년 8개월을 배삼룡, 서영춘, 곽규석 등 1세대 코미디언들과 호흡을 맞춰 ‘웃으면 복이 와요’ 등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활약했고, 이후엔 영화배우로 분해 코미디 영화의 전성기를 열어젖혔다. 그의 말처럼 ‘웃기려고 별짓을 다한’ 코미디언들 덕에,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 사람들은 팍팍한 삶을 견디곤 했다.

1969년 출연했던 영화 ‘수학여행’은 국내 최초로 테헤란 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한 라면 브랜드의 전속 모델로 15년간 활약하는 진기록도 세웠다. 그의 전성기는 이 기록들만으로도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찰리 채플린의 희극처럼 웃음의 이면에 슬픔이 묻어 있는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인생이라는 게 본래 웃음 한 장을 들추면 거기에 눈물이 있는 법이거든.



한 프로그램에 15년이나 출연한다는 건 지금으로썬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한창 때 인기가 어느 정도였습니까.
“영화 ‘오부자’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 희극영화 붐이 불면서 서너 개 영화에 겹쳐서 출연했던 기간이 꽤 길었어요. ‘웃으면 복이와요’ 공연도 했고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날 좋아했지요. 어떤 공연엔 사람들이 너무 몰리는 바람에 유리창도 깨지고 한 부인은 (사람들에 치여) 옷에 브로치가 떨어졌다고 물어내라고 하기도 했어요. 전라도 광주로 ‘웃으면 복이 와요’ 공연을 갔는데 선생님이 반 학생들을 인솔해 나온 적도 있어요. 알고 보니 수업 시간 빼먹고 현장실습을 나왔다고 하더라고. 나한테 ‘배우도 (보통 사람들처럼) 밥 먹고 화장실 가느냐’고 물었던 기억이 나요.”
[CELEBRITY] “삶이란 눈물 서린 코미디 같은 것… ‘웃으면 복 온다’는 진리 잊지 말기를”
힘들었던 적은 없었나요.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그 못지않게 희극인들을 ‘딴따라’라고 폄훼하는 시선도 있었어요. 상류사회에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내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 ‘수학여행’이 당시 테헤란국제영화제에 초청됐는데, 주무관청인 당시 문화공보부에서 B등급을 내린 거예요. 주연이 희극배우라서 급이 떨어진다는 거죠. 결국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았지만 자존심이 무척 상했어요. 우리 문화를 지키고 오히려 치켜세워줘야 할 주무부처에서 깔아뭉갰으니. 또 ‘웃으면 복이 와요’가 사회의 미풍양속을 헤친다는 이유로 1985년에 결국 폐지됐을 때 그렇게 씁쓸할 수가 없대요.”


그 시절이 그립진 않으세요.
“인기라는 게 모두 거품이고 부질없다는 걸 알아요. 그 시간들은 내게 모두 소중한 추억이지. 바보들은 ‘옛날에 내가 어땠는데’ 이런 소리 하면서 흑백사진에 머물러 있어요. 과거에 금송아지 타고 다니면 뭘 해. 지금 아무것도 없는데…. 우리같이 인기를 먹고 사는 사람들은 더 현실을 생각해야 돼요. ‘아직 구봉서라는 사람이 살아 있구나. 옛날엔 저 사람 보고 참 많이 웃었어’ 해주는 이들이 있는 걸로 행복해요.”


해학적인 코미디를 많이 하셨잖아요. ‘구봉서의 벼락부자’ 같은 풍자극도 있었고요.
“코미디는 그냥 웃고 마는 게 아니란 말이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고. 말초적인 개그로는 사람들을 웃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생각할 순 없게 하지.”


그래서 그토록 찰리 채플린을 동경하신 거군요.
“찰리 채플린의 희극처럼 웃음의 이면에 슬픔이 묻어 있는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인생이라는 게 본래 웃음 한 장을 들추면 거기에 눈물이 있는 법이거든. 채플린은 바닥에 깔린 슬픔을 반전시키며 웃음을 자아내는 천재예요. 코미디언은 눈물 스민 웃음을 끌어내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또 깨우쳐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오.”


대중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스스로에게 무척 엄격하기로 유명하셨다고요.
“죽는 역할도 진짜 죽을 듯 열심히 했으니까. 코미디 얘기하면 과연 누가 날 쫓아올까 이런 자부심은 가져요. 그때 나는 ‘눈물 나게 웃었다’는 말 듣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



코미디언 안 됐으면 책방 주인 됐을 것…“사람들아, 좀 웃어봐요!”
구봉서는 지독한 책벌레다.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좋아했던 그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그 위에 자신만의 세계관을 쌓아올렸다. 초등학교 시절 ‘레미제라블’, ‘몬테크리스토’, ‘셜록홈즈’ 같은 소설을 보면서 상상력을 키우고 타인에게 즐거움을 주는 인생을 삶의 모토로 정했다. 1945년 악극단 악사로 데뷔해 사흘만 하기로 한 대역배우 생활은 어느덧 70년으로 이어졌다. 그는 “그때 악단에 끌려가지 않았으면 다른 인생이 펼쳐졌겠지”라면서도 “이러니 인생은 알 수 없고도 재미있는 것”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여든 노인은 지금도 자기 전 머리맡에 책을 두고 길을 찾는다.


책이 왜 그렇게 좋으세요.
“소설 주인공을 보면 그렇게 멋질 수가 없어. 책 읽으면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지요. 꿈도 꾸게 되고. 지식도 쌓을 수 있고 또 우리 같은 코미디언은 사람을 웃기려면 치밀한 계획이 필요한데 책에서 아이디어도 많이 얻었지.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이것도 일본 책을 보면서 힌트를 얻었고요. 책이 없었으면 지금 구봉서도 없었을 테지요.”


코미디언이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요.
“책방 했을 겁니다. 책이 많은 공간에 둘러싸여 있으면 부자가 된 것처럼 든든해요. 열아홉 살 때 태평양 가극단에 얼떨결에 끌려갔던(?) 게 내 인생을 바꿔놓을지 상상도 못했지요. 그때 내가 극단에 들어가는 걸 반대했던 아버지가 딱 사흘만 하라고 했는데 운명이었는지 지금까지 오게 됐어요. 그래도 난 평생 사람들 웃겼으니 이 정도면 괜찮은 인생이라 생각해요.”


웃음의 가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웃으면 행복해집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 행복한 거예요. 웃음을 천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감추려고도 하지 마시오.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진다는 말도 있지요. 요즘 사람들 팍팍하게 살다 보니 ‘흥! 웃으면 뭐 다 좋아지나?’ 할 테지. 남들을 웃겼지만 원망하고 분해서 이를 갈면서 살았던 내 인생을 때론 후회스러워하기도 해요. 지금 생각하면 괜히 그렇게 살았구나 싶어.”



인터뷰 말미에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손자가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지갑에서 용돈을 꺼내 손자의 손에 쥐어주고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국민 코미디언’은 이제 가족에게 몸을 기대어 살아가는 평범한 할아버지로 돌아갔다. 그는 “인생 황혼 길에 접어드니 비로소 가족의 소중함을 알겠다”면서 “동반자가 있음에 감사하고 행복하다. 새해에는 머니 독자들 모두 가족을 더 아끼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고 덕담을 전했다.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