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명사 ‘이용백’에게 말 걸기

누구의 것이든 이름은 모두 고유명사다.
그러나 이용백이란 이름 앞에 붙인 ‘고유명사’ 타이틀은 사전적 의미 그 이상이다. 사실 이용백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지만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친숙한 존재다.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많고, 그 말하는 방식이 독특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외부 시선으로는 ‘미디어 아트의 선구자’로 불리며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라는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이지만, 안으로는 보편적 시각에서 벗어나 할 일을 하고 갈 길을 가는 이.
그가 이용백이다.
아파트촌을 지나 도시색이 완전히 사라진 지점에서 내비게이션은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익숙한 어느 농촌의 풍경이 시선 앞에 펼쳐져 있으니 참으로 당황스러운 찰나, 회색빛의 마치 갤러리 같은 건물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바로 여깁니다.” 야트막한 오르막길 끝에 산을 뒤로 하고 서 있는, 제법 규모가 큰 콘크리트 건물이 바로 이용백 작가의 작업실 겸 집. 마당에 들어서자 눈길을 사로잡는 거대한 조형물도 집 주인의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니 동네에서 ‘미술관’으로 통하는 것도 영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작가의 출신 지역이기도 한 경기도 김포에 자리 잡은 지 5년여. 일과 일상이 분리되지 않은 그곳의 삶에 그는 충분히 만족한 듯 보였다. 잠깐 스쳐가는 객인 기자에게도 통창을 통해 들어오는 풍경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부모님과 함께 심었다는 700여 그루의 나무, 그중에서도 80여 그루의 매화나무가 풍기는 향기는 창을 뚫고 들어올 기세였다. “이 집을 지을 때 미학 박사인 아는 형에게 집을 어떻게 지을까 물었더니 객이 쉬어갈 수 있는 곳으로 지으라고 하더군요.” 그의 말대로 집은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는 소통의 공간이 됐다. 다작을 하는 이 작가에겐 혹 방해되는 요소는 아닐까 싶었지만, 단언컨대 그에게 사람은 곧 ‘인풋(input)’이니 외려 에너지다. 이곳에선 작품에 대한 몰입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도 더 깊어진다고 하니, 먼 길을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미디어 아트, 그리고 백남준
집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그의 어머니로 넘어갔다. 올 5월 이 작가의 어머니, 이충희 여사가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한 것이었다. 사안의 경중을 막론하고 평소 이렇다 할 감정 표현이 거의 없는 그가 상을 받은 어머니 옆에서 수줍게 웃고 있던 한 컷의 사진이 오래 오래 인상에 남아 물었다. “많이 좋으셨나 봐요.”

“좋았죠. 만날 속만 썩이다 효도한 것 같아서. 미술 하는 모든 작가들이 그럴 겁니다. 전에는 미술을 업으로 한다고 하면 기본적으로 부모님들이 다 반대했잖아요.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그것도 오십이 다 된 즈음에 좋은 일이 생기니 기분이 좋더군요. 예술가의 길이라는 게 작가로서 버티는 것조차 힘들어요. 우리나라는 미대가 너무 많고 제대로 된 비판 문화가 없어서 걸러지지도 않은 채 ‘이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작업하는 작가들이 많아요. 그리고 또….”

가볍게 던진 물음은 우리나라 미술계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까지 진행됐다.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나라는 작가 레지던스도 많고 문예진흥기금 등이 다른 나라에 비해 잘돼 있어 40대 미만 젊은 작가들에겐 좋은 환경이라고, 같은 맥락에서 중진 작가부터 원로들은 힘든 부분이 있다고. 시장이 작아서 그렇지 우리나라 작가들의 수준이 높아 요즘 유럽에선 아시아를 모르면 미술관장 못 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라고.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닌, 세상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정치·사회·문화적 쟁점들을 끊임없이 화두로 던져온 그의 세계는 이렇듯 첫 질문에 간파됐다.


과거에 약간 변두리 작가였을 때가 마음이 편했던 거죠. 포커스를 좀 받다 보니, 그리고 전시 규모가 점점 커지다 보니 부담감이 있어요.


국내에서는 활동을 많이 안 하시죠.
“침체돼서인지 한국 미술계에는 재밌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우리나라 중견 작가들이 왜 자꾸 외국으로만 다닐 수밖에 없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죠. 사실 예술가들이 가는 길은 대중적인 길과 반대인 경우가 많아요. 물론 예술과 대중 두 가지 면에서 모두 성공한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예술적으로 인정받을수록 대중과 멀어지는 경향이 있죠. 그건 우리나라가 가진 ‘대중성’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재밌는 일을 좋아하시죠. 이 작가님만큼 재밌는 일을 많이 하는 예술가도 없지 않나요.
“그런 편이죠. 이것저것 참 많이 했는데, 갈수록 어렵고 신중해지는 건 사실이에요. 과거에 약간 변두리 작가였을 때가 마음이 편했던 거죠. 포커스를 좀 받다 보니, 그리고 전시 규모가 점점 커지다 보니 부담감이 있어요. 물론 그래도 하긴 하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도 하는 게 인생 아니겠어요. 작품이 어떤 누군가에게 크든 작든 감동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대미술이 너무 개념적으로 가다 보니 가장 기본적인 것을 놓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작품이란 보고 느끼는 시각예술인데 마치 언어적 설명으로 정의되는 부분도 있고.”


‘재미’의 기준이 뭔가요.
“‘재미란 게 뭐지?’ 한번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이런 거예요. 어느 부분은 이해하고 어느 부분은 이해하지 못할 때 재미가 생겨나죠. 아예 이해하지 못하면 쳐다보지도 않게 되니까요. 일면은 보편성을 띠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범주가 있는 것, 그 정도의 개념이 ‘재미’라고 할 수 있겠죠.”
꽃무늬 군복을 입은 ‘엔젤 솔저’ 대형 설치 작품.
꽃무늬 군복을 입은 ‘엔젤 솔저’ 대형 설치 작품.
다양한 매체 활용도 재미를 위한 것 중 하나인가요.
“저는 매체 중심은 아니에요. 매체를 선택하고 내용을 채우는 게 아니라 내용을 하다 보니 좀 더 빠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특정 매체가 필요했던 겁니다. 미디어들이 갖고 있는 시너지효과들이 다 다르잖아요. 영화를 예로 들면 1시간짜리 본편도 있고, 4~5분짜리 예고편도 있고, 스틸 컷도 있죠. 이 모든 게 다 비슷한 꼭짓점을 향해 가지만 어떤 형태냐에 따라 포커스는 달라지거든요. 같은 내용이라도 미디어에 따라 다르게 전달되기도 하고요. 이 때문에 개인전이냐 그룹전이냐 비엔날레냐 등에 따라 미디어를 조금씩 다르게 선택하는 건 있어요. 마음에 들진 않지만 비교 평가 될 때가 있으니까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이 작가는 1990년대 초 독일로 유학을 떠나면서 영상을 다루기 시작했다.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이라는 극단적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던 대학 시절, 그런 이분법적 사고가 답답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가 자기 틀을 깨는 순간이었다.


여러 장르를 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미디어 아트의 선구자’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닙니다.
“밖에서 부르는 타이틀에는 관심 없어요. 다만 그런 건 있어요. 페인팅을 하건 조각을 하건 내용 면에서 볼 때 미디어의 속성을 가지고 필터링 해서 보는 습관이 있죠. 그러니 제 작품이 전통적인 페인팅이라 해도 어느 정도는 미디어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게 맞아요. 일례로 페인팅을 할 때 프린트를 해서 그리지 않고 모니터를 보고 그리는 식이죠.”


미디어 아트에 있어 백남준 선생님의 영향이 분명 있으시죠.
“물론입니다. 한국에서 제가 알고 있던 백남준보다 독일에 가서 제대로 알게 된 것 같아요. 지명도가 아니라 내용 면에서 말입니다. 한국에선 약간 그분을 터부시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막상 가서 뵈니 득도의 경지에 이른 고수더군요. 세 번 정도 뵈었는데 제 작품을 보고 해주신 말씀들을 잊지 않고 있어요. 사실 저는 뭔가 원칙을 정해놓고 작업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주의지만, 선생님 말씀은 늘 걸려요. ‘잘하는 걸 하려고 하지 마라. 실수를 줄여라.’ 글로벌에 대한 개념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좀 이해됩니다. 과거엔 인터내셔널 작가가 돼보고 싶었는데 어느 날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요. 시장 논리로 봐도 글로벌은 보편적 인간이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부분에 속해 있는 개념이니 글로벌로 가는 게 맞죠. 그걸 베니스 비엔날레 이후 깨달았어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브로큰 미러’ 시리즈.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브로큰 미러’ 시리즈.
아름답지만 아프고, 유머러스하지만 날카로운

개인전을 기준으로 하면 벌써 23년, 이용백이란 이름은 어느덧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름이 됐지만, 2011년 이후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확연히 달라졌다. 제54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관 작가로 참여한 그는 시쳇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사랑은 갔지만 상처는 곧 아물겠지요(The love is gone but the scar will heal)’라는 제목의 이용백 개인전이 열린 한국관은 베스트 국가관의 하나로 꼽히며 1995년 한국관 이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미디어, 사진, 회화, 퍼포먼스 등 매체를 넘나들며 하고 싶은 말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해온 이 작가의 출품작 14점이 세계적인 미술관과 컬렉터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모두 ‘솔드아웃’ 되는 이변까지 낳았다.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 이후 많은 게 달라졌나요.
“제 이름은 몰라도 작품은 다 알더군요. 좀 더 쉬워진 거죠. 뭐랄까, 축구로 비유하면 1부 리그로 가기 위한 2부 리그의 상위권 정도라고나 할까. 내후년쯤, 그때까지 계획한 게 잘 된다면 1부 리그로 갈 수 있을 겁니다.”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있는 ‘피에타’ 시리즈 2008년 작.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있는 ‘피에타’ 시리즈 2008년 작.
그 해는 정말 대단했었죠.
“일반 오픈 전에 언론과 컬렉터들에게 먼저 오픈을 하는데 초대한 사람들이 다 못 온다는 거예요. 이거 민망하게 우리끼리 하는 거 아닌가 싶었죠. 그런데 오픈 후 둘째 날부터 오겠다는 연락이 쇄도하더군요. 그 전에 친구들이 말하기를, 오픈 후 하루 이틀 컬렉터들끼리 모여 술자리를 갖는데 그 자리에서 이름이 거론되지 않으면 끝난 거라고 했거든요. 다행히 그 자리에서 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그 덕분에 일반 오픈 때도 공식 집계 기준 관객이 23만 명을 넘었어요. 그동안 한국관이 15만 명을 넘기지 못했으니 굉장히 고무적이었죠. 르몽드를 비롯해 뉴욕타임스, 뉴스위크 등 외국 미디어에서 소개를 해준 것도 이례적이었어요.”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그가 각광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는’ 작가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회나 주변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비롯된다. 아티스트는 세상과 단절돼 자기 세계만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그가 생각하는 예술의 범주다. 그것이 감동이든 깨달음이든 촌철살인의 각성이든. 그의 작품들은 그래서 쉽고도 어렵다. 아름답지만 아프고,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롭다. 버려진 거푸집으로 만든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있는 ‘피에타’도, 컬러렌즈를 그린 ‘플라스틱 아이’도, 물고기를 잡는 작은 물고기처럼 생긴 미끼를 그린 ‘플라스틱 피쉬’도, 꽃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이 등장하는 ‘엔젤 솔저’ 시리즈도 화려함 속에 때론 분명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작가의 페인팅 작품인 ‘플라스틱 피쉬’.
작가의 페인팅 작품인 ‘플라스틱 피쉬’.
이 작가님 작품은 안과 밖이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추함을 화려함으로 가리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죠. 사람도 자기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자꾸만 외형에 신경을 쓰고요. 또 하나 한국 사회에서는 어쩐지 직접적으로 자기감정을 표현했을 때 느끼는 진부함이 있는 것도 같아요. 제 작품은 접근하기는 편한데 나올 때는 다른 감정을 갖게 되는 게 많아요. ‘피에타’도 그렇고, ‘엔젤 솔저’도 그래요. 특히 ‘엔젤 솔저’는 시각적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내면에는 응큼함이 있어요. 사회적, 정치적 내용도 살짝 숨어 있고요. 그 다양한 감상의 폭이 제 작품의 장점이 아닌가 생각해요.”


관찰력이 뛰어난 건가요, 아이디어가 좋은 건가요.
“바쁘면 좋은 작품 못해요. 심심해야 해요. 미술사에서 보면 정말 좋은 작품은 작가가 심심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초기에 많이 나오는데, 심심할 때 작업해서 그런 거예요. 이 생각 저 생각 다 하면서 아이디얼한 모든 생각들을 다 짜낸 뒤 그다음에 나온 아이디어가 예술로 표현되는 거니까요. 보편적 생각 밖의 것, 그걸 개인의 삶으로 말하면 잠재력일 텐데 그 잠재력을 위해 많은 인풋이 필요하죠. 책을 보든 관찰을 하든 세상을 읽든.”
지난해 선보인 꽃 탱크 퍼포먼스.
지난해 선보인 꽃 탱크 퍼포먼스.
지금이 이 작가님에겐 어떤 지점인가요.
“사회에서 말하는 시선엔 전혀 관심 없고, 저는 그저 제가 가고자 하는 길만 갑니다. 스물 다섯에 데뷔해 이십 몇 년이 지났지만 이제 시작이죠. 전시도 여태까지 해봐야 많지도 않았고요. 올해 유럽에서는 10군데 정도 큰 전시를 했는데 유럽에선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같으니, 이제 한번 질러 볼 때가 되긴 했죠. 그 언젠가부터 내 안의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아무리 유명한 누굴 만나도 그 어떤 큰 프로젝트를 맡아도 사회적 제약이나 보편적 시각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해도 심리적으로 자유로워졌죠.”


어떤 일을 ‘지를’ 계획인가요.
“영국 런던의 골든 주빌리 브리지 전체에 설치작업을 하는 프로젝트가 있어요. 템스 강 페스티벌 측에서 오케이 된 건데 ‘엔젤 솔저’ 군복 1000벌을 빨래로 너는 작업이죠. 원래 계획은 지난해 꽃 탱크 퍼포먼스를 한 뒤 할 계획이었는데 오히려 준비 면에서는 늦춰진 게 다행인 것 같아요.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인데 경제적 부담 때문에 규모를 줄이고 싶지는 않거든요. 또 하나는 독일 라이프치히의 예술가 단지인 슈피너라이에서 전시를 할 계획이에요. 약 1320m²(400평)나 되는 어마어마한 공간인데, 몇 해 전 데미안 허스트도 그곳에서 전시를 했었죠.”
이용백 작가는… 1966년생. 홍익대 서양화과 학사.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조형예술대 회화과 학사, 조각과 석사. 1990년 이후 국내와 독일 등 유럽에서 개인전 및 단체전을 가졌으며 오랫동안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2011년 제54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선정,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글로벌 작가가 됐다.
이용백 작가는… 1966년생. 홍익대 서양화과 학사.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조형예술대 회화과 학사, 조각과 석사. 1990년 이후 국내와 독일 등 유럽에서 개인전 및 단체전을 가졌으며 오랫동안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2011년 제54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선정,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글로벌 작가가 됐다.
그는 말했다. 생각하면 안 되는 일이 없더라고. 기자는 생각했다. 그는 참 용감한 아티스트라고. 가치관 확실하고 갈 길 분명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작품을 통해 거침없이 말하는 그이니 용감하지 않은가. 그걸 보면 이용백만큼 ‘이름값’ 제대로 하면서 살기도 힘들지 싶다. ‘떳떳할 용’자에 ‘흰 백’, 게다가 백말 띠에 4월생이라 팔자가 세다고 했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려면 되고 말라면 말라’며 작명을 밀어붙인 교사 출신 아버지의 용감한(?) 결정은 결과적으로 “참 잘하셨어요”가 됐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