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드러커가 연금사회주의론(Pension Fund Socialism)을 주창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연금사회주의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을 사회주의라 지칭할 정도로 퇴직연금이 미국 경제에서 매우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퇴직연금 적립금이 원리금보장형 상품으로 운용되고 있는 우리나라 퇴직연금 시장에서는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들릴지도 모르지만, 원리금보장형 중심의 운용 전략이 한계에 부닥친 요즘, 연금사회주의론을 들여다보면 한계 극복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RETIREMENT PENSION] 미국은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다? 피터 드러커의 연금사회주의론
현대 경영학의 대부로 추앙받는 피터 드러커가 연금사회주의론을 주창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드러커는 1976년에 출간한 ‘보이지 않는 혁명(The Unseen Revolution)’에서 “사회주의를 근로자에 의한 생산수단의 소유로 정의한다면 미국은 최초의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라며 연금사회주의론을 펼쳤다. 그가 이처럼 과감한 주장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에서는 이미 1950년대에 퇴직연금이 기관 투자가로서 미국 대기업의 지배적 소유자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러커는 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그는 명백한 사실을 근거로 주장을 펼쳤으나 당시의 시대정신은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미련 때문인지, 오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20년 뒤인 1996년에 앞의 책을 개정해 ‘연기금 혁명(The Pension Fund Revolution)’이란 이름으로 발표했다.

이 책에서 그는 자본주의 우등국 미국과 사회주의 모범국인 유고슬라비아를 비교하면서 역설적으로 미국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임을 선포한다. 유고슬라비아의 근로자는 기업체를 지배하고 생산수단을 관리하지만 자본의 형성이나 공급, 배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언권도 없다. 이에 반해 미국의 근로자는 퇴직연금을 통해 기업의 소유자로서 이익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자본의 소유자 및 공급자로서 자본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주의국가라는 것이다.


미국 퇴직연금 시장을 뒤흔든 GM의 혁신적 퇴직연금
드러커의 연금사회주의론에 영감을 준 인물은 1950년대에 제너럴모터스(GM)의 사장으로 있던 찰스 윌슨(Charles Wilson)이었다. 윌슨은 1950년 4월 전미자동차노동조합(UAW)에 GM의 근로자를 위한 퇴직연금기금 설립을 제안했다. 윌슨이 이런 제안을 내놓기 수개월 전에 연방최고재판소는 인랜드스틸(Inland Steel)사와 관련한 소송에서 고용주는 퇴직연금기금 설립을 위해 노동조합과의 단체교섭에 응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퇴직연금이 단체교섭 항목 중 하나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이보다 훨씬 이전에 연방국세청(IRS)은 고용주의 기여금에 대해 면세 혜택을 부여했다. 퇴직연금이 사용자와 근로자 모두에게 중요한 이슈로 등장한 것이다.

윌슨의 제안은 이러한 움직임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제안은 무시당했다. 당시 UAW는 민간에서 운영하는 제도보다는 정부에 의한 사회보장 확대에 역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윌슨의 제안은 퇴직연금 운영에 노동조합의 관여를 인정하지 않고, 고용주 책임하에 외부의 전문 자산관리자에게 위탁하겠다는 것에도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UAW는 윌슨의 제안이 기업의 이익과 번영이 노동자의 이익으로 연결됨으로써 노동조합의 투쟁력을 약화시키는 동기가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UAW는 윌슨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증가하고 있던 고령의 근로자에게 윌슨의 제안은 아주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52년 10월 GM에 새로운 퇴직연금 제도가 탄생했다.


한계에 부딪힌 국내 퇴직연금의 출구는?
GM의 퇴직연금은 GM이라는 기업의 상징성과 내용의 혁신성 때문에 미국 퇴직연금 시장에 전례 없는 영향을 미치게 된다.

GM에서 새로운 퇴직연금을 도입한 이후 미국에서는 1년 만에 8000여 개의 퇴직연금 플랜이 탄생했다. 이는 미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퇴직연금이 처음 도입된 시점부터 그때까지 도입된 퇴직연금의 수보다 4배나 많은 것이었다. 가히 퇴직연금 도입 신드롬이라 할 만하다. 미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퇴직연금을 처음 도입한 곳은 1875년 철도운송 회사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였다. 이후 철도 회사, 금융 회사, 공기업 등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1929년 대공황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약 400개의 기업에서 퇴직연금을 운영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실시된 전시 임금통제 정책으로 부가 급여로서의 퇴직연금에 대한 인기가 올라가고, 단체협상 항목에 퇴직연금이 포함되면서 퇴직연금은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퇴직연금은 급속히 확산되는데, 이때를 퇴직연금 팽창기(Pension Drive)라고 부른다.

특징적인 것은 이후에 설립된 퇴직연금의 대부분이 GM의 퇴직연금에서 혁신적이라 할 부분을 채용했다는 점이다. 그 전에 설립돼 있던 퇴직연금조차 규약을 개정하면서까지 GM의 퇴직연금 모델을 모방했는데, 여기서도 GM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GM의 퇴직연금을 혁신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퇴직연금 적립금을 주식에 적극 투자하는 모델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의 퇴직연금에서는 적립금을 연방 채권이나 이율보장형(fixed income) 상품으로 운용해왔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퇴직연금을 운영 중이던 AT&T의 경우도 수십 년 동안 금리가 가장 낮은 연방 채권에만 투자해왔다.

그러나 윌슨은 당시의 관행을 과감하게 거부하기로 했다. 그는 많은 가입자를 보유하고 있는 퇴직연금이 그 재정적 기반을 채권에만 의존하는 것은 건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윌슨이 당시 인기가 있던 자사주 투자에 찬성한 것도 아니다. GM 경영진의 대부분이 지지했음에도 자사주 투자는 불건전할 뿐 아니라 근로자의 이익에도 반한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러면서 윌슨은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 원칙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적립금의 운용은 외부의 전문기관에 맡길 것. 둘째, 근로자가 근무하는 회사에 대한 투자, 즉 자사주 투자는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하는 경우에도 최소한으로 할 것. 셋째, 한 기업에 대한 투자는 해당 기업의 자본금 대비 5%를 초과하지 말 것. 넷째, 한 기업에 적립금의 10% 이상 투자하지 말 것. 그의 네 가지 원칙은 1974년에 제정된 미국 퇴직연금의 기본 법령인 근로자퇴직소득보장법(ERISA·Employee Retirement Income Security Act)에 반영됐다.

20세기가 저물 무렵 월스트리트 역사가인 존 스틸 고든이 “연기금 펀드와 수십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노조가 월스트리트의 메이저 플레이어로 등장한 1960년 피터 드러커의 예언은 실현됐다”고 말한 것에서 논란은 종지부를 찍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을 사회주의라고 지칭할 정도로 퇴직연금이 미국 경제에서 매우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퇴직연금 적립금이 원리금보장형 상품으로 운용되고 있는 우리나라 퇴직연금 시장에서는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퇴직연금 상품에도 저금리가 적용되는 요즘, 원리금보장형 중심의 운용 전략은 한계에 부닥친 게 사실이다. 연금사회주의론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 한계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손성동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