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그 이상의 이름 박유아

고백컨대 박유아 작가의 개인전 소식을 듣고는 먼저 그를 둘러싼 주변부터 떠올렸던 게 사실이다. 포스코(옛 포항제철) 창업자이자 32대 국무총리를 지냈던 고(故) 박태준 회장의 차녀라는 태생적 ‘관계’와 유명인의 아내였던 개인사가 그것. 물론 박 작가는 ‘쿨’하게 그 관계를 꺼내놓고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부부란, 가족이란, 그리고 그를 넘어선 관계란 무엇인가.
[ARTIST] ‘관계’의 속살을 들여다본다는 것
박유아 작가는…
1961년생. 이화여대 동양화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를 받았으며 이후 도미해 하버드대와 컬럼비아대에서 수학했다. 전공인 수묵을 넘어 세라믹, 메탈, 섬유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조각이나 멀티미디어 설치,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작업 영역을 확장했다. 1990년 첫 개인전을 뉴욕에서 연 이후 서울, 도쿄, 뉴욕, 시카고, 모스크바, 베니스 등 국제적으로 다양한 개인전을 열며 격찬을 받았다. 하버드대에서 드로잉을 가르쳤으며, 미국 대학 드로잉 교과서에 드로잉 작품이 실리기도 했다.


서울 삼청동 골목 안에 위치한 갤러리 ‘옵시스 아트’. 체감기온이 여름 끝자락이던 어느 가을날, 2층 주택을 개조해 참으로 흥미로운 공간으로 변신한 그곳을 ‘꼭두새벽’부터 찾았다. 아침 9시, 뉴욕 맨해튼에서 활동 중인 박유아 작가에겐 분명 꼭두새벽이었다. 개인전을 위해 귀국한 지 열흘 남짓, 이틀 후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정이니 꼭두새벽이 아니라 한밤중이라도 달려갈 판이었다. 박 작가는 어머니가 계신 친정집에 머물고 있지만 빨리 뉴욕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어떤 이유로든 ‘제 집’이 가장 편한 건 당연한 일이겠으나, 작가에겐 다른 이유도 있는 듯했다. 작품 활동을 하는 한 사람의 아티스트로서, 평범한 삶을 사는 한 개인으로서의 생활이 ‘보장’되는 뉴욕과 달리 한국에선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많고 또 다양하니 말이다.

‘박유아’라는 이름이 가진, 한때는 그를 꼭꼭 숨어버리고 싶게 만들었던 수많은 관계(그는 고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의 차녀이자 고승덕 변호사의 전처다)와 히스토리를 그는 이번 전시에서도 모조리 밖으로 꺼내놓았다. 작가로서 작품으로서 내놓은 것들에도 ‘개인사’를 덧씌워 볼 테고, 작품 본연에 대한 질문보다 그 주변의 것들에 많은 관심이 쏟아질 것은 짐작했던 바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에겐 그저 미련 없이 아쉬움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작품 속에 쏟아 붓는 것만이 중요했다.


#1. 오르골 혹은 부부가 있는 풍경
이번 전시는 1990년 생애 첫 개인전을 뉴욕에서 개최한 이래 21번째 개인전. 주제는 ‘오르골이 있는 풍경’이다. “그림에 오르골이 등장하진 않지만, 붕어빵에도 붕어가 없지 않나”라는 위트 있는 박 작가의 말을 뒤로 하고 들여다본 전시의 속내는 ‘부부가 있는 풍경’이다. 그의 지난 시간들을 관통해온 ‘관계’라는 관심사가 이번엔 ‘부부’로 표출된 셈이다. ‘오르골’은 부부의 관계를 의미하는 상징물이라고나 할까.

“23점 작품 모두 부부가 등장하는 장면이에요. 제가 사람들 사진을 많이 찍는 편인데 부부가 함께 만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대부분 부부 사진이 많아요. 사진에 찍힌 부부들을 보면서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세상에 그렇게 들여다볼 게 많은 인간관계가 또 있을까요. 사회는 모든 ‘관계’로 이뤄져 있잖아요. 그중에서도 신기한 게 부부예요.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다 큰 뒤에 만나서 결혼을 하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한다’고 맹세를 하죠. ‘파뿌리’라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 있어요.(웃음)”

누군가에겐 ‘절대적’일 수 있는 영원의 맹세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표현처럼 ‘이혼’이 실패라면, 10여 년 전 이혼을 하며 결혼생활에 실패한 박 작가 입장에선 결과론적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돼버린 게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작업은 ‘반면교사’ 같다고도 했다.
[ARTIST] ‘관계’의 속살을 들여다본다는 것
“‘나는 실패했는데 사진 속 다른 부부들은 잘 살고 있을까’라는 게 처음엔 궁금했고 그러면서 ‘내가 잘못한 건 뭘까’라고 나를 비춰보는 계기도 됐어요.”

‘쿨’하게 말하지만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는 동안 왜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이제는 과거 혹은 추억이 돼버린 스스로의 일상을 하나하나 재현하고 객관화하는 일이 때론 괴롭고 때론 불편했지만, 어쩌면 그조차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관계의 속살’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단란한 듯 보이는 사진 속 부부의 얼굴과 표정이 지워지고 뭉개짐으로써 도리어 숨길 것 없는 맨 얼굴을 드러내는 ‘역설’인 셈이다. 여기에 23점 작품 모두 노트북 크기로 마치 실제 사진을 보는 것처럼 리얼리티를 더하고 있으니 들여다보는 이의 심정은 묘해진다. 누군가의 상황이지만 언젠가는 나의 것이기도 했고 또 앞으로 그럴 수도 있으니, 과연 ‘나는 어떠했나, 어떠할까’라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얼굴을 몇십 번의 덧칠로 하얗게 지우는, 물리적으로는 번거로웠던 그 과정은 박 작가에게 오히려 즐겁고 유쾌한 기억으로 남았다.

“우선 제가 그 사진을 찍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하필 그 사진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을 테고, 또 에디팅을 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스크리닝이 들어가죠. 그리는 방식에서도 밑 작업을 하고 그 위에 20~30번 덧칠을 하며 색을 점점 올리는 ‘장지 기법’을 하다 보니 선택할 게 많았어요. 이만하면 되겠다 하면 그만 칠하면 되고 더 필요하다 싶으면 좀 더 색을 올려야 하죠. 그동안 프로세스가 긴 작업을 별로 안 해 봤는데, 할 게 많은 반면 잔재미가 있어 작업 내내 즐거웠어요. 딸아이가 미술평론을 하는데 한 번씩 의견을 물어보면 자기 나름으로 신선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더군요. 그게 작품에 반영된 걸 보면 또 좋아했고요. 둘 다 이번 작업을 하는 동안 많이 웃었어요.”


#2. 가족 혹은 나의 자화상
이쯤에서 지난해 전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공간에서 ‘르쌍띠망-효’라는 주제로 퍼포먼스가 수반된 개인전을 열었던 그는 당시 ‘파격’이라는 수식어가 부족한 (적어도 일반인에게는) 충격적인 퍼포먼스로 화제가 됐다. 부모 형제의 초상화를 그린 그림을 걸어놓고 생고기와 내장을 칼로 썰고 던지며 피를 묻히고 거울을 깨는 행위예술은 이웃의 신고로 경찰까지 출동하는 에피소드를 남길 만큼 강렬했다.

“어린 시절부터 내 현실의 아버지는 다분히 상징적이고 상상적인 아버지였다. 나의 아버지이기보다는 한국 산업의 아버지였고 국가 경제의 아버지였으며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였다. 물려받은 DNA는 내 아버지로부터였지만, 내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국가와 산업으로 향했고, 그 아버지의 현실적 자식으로서 나와 내 형제 자매들은 그 아버지가 베풀어 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에 누가 되지 않도록 숨을 죽이며 살아왔다. 조국과 경제에 헌신한 아버지가 정치와 사회에서 곤란과 흠집이 생겨날 때마다 나도 고통을 겪고 상처를 입었다”는 고백에서도 짐작되는 것처럼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부담감, ‘누군가의 딸’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정면대응’ 하는 ‘돌직구적’ 표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어쩌면 지난해의 연장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도 많이 숨어 지냈어요. 그런데 숨는다고 ‘누군가의 딸’이라는 제 근본이 바뀌는 건 아니죠. 다행히 저는 작품을 통해 ‘고상하게’ 정면대응을 할 수 있었죠. 왜 인터뷰 끝에 늘 묻는 질문들이 있잖아요. ‘어떤 작품을 하고 싶으냐.’ 상을 받고 유명한 곳에 제 그림이 걸리는 건 분명 ‘격려’가 되겠지만 제 최종 목표는 결코 아니에요. 나중에 봤을 때 ‘아, 정말 시원하게 작업했어. 잘했어’라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죠. 뭔가 아쉬운 건 마음 속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거든요. 분을 흉하지 않게 꺼내놓는 방법을 저마다 개발해야 하는데 그게 저에겐 작품이었던 겁니다. 그런 면에서 지난해 퍼포먼스는 정말 속 시원했어요. 장면 자체가 흉악하고 이상한 기행을 해서 시원한 게 아니라, 남들 의식하지 않고 했기 때문에 속이 시원했던 겁니다.”

‘부부’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도 박 작가의 가족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너무나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이었던 부모님의 ‘관계’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어머니에 의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걸 보면서 그는 부부의 관계 혹은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됐노라 했다. 2011년 말 아버지가 작고한 후 하루도 빠짐없이 믹스커피를 들고 현충원 아버지 묘소를 찾아 생전에 그러했듯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어머니의 모습은 비현실적이게도 지독한 현실이다. 그 모습이 세간엔 또 어떻게 비칠까 걱정스런 마음에 짜증도 내고 말려도 봤지만 3년만이라도 그리 하겠다는 어머니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완벽하게 존경하며 살았어요. 저는 그게 정말 이상했죠. 어떻게 평생 좋아할 수가 있을까. 저렇게까지 좋을까. 혹 ‘보여주기 식’은 아닐까. 그런데 어머니를 보면 정말 아버지를 너무 좋아해요. 물론 제가 보기에도 아버지는 정말 멋있는 남자고 완벽한 남자예요. 당연히 아버지 같은 남자가 이상형이었죠. 세상에 그런 남자는 없어요. 비현실적이죠. 그걸 깨닫는 데 너무 오래 걸렸어요.”

‘4녀 1남’ 중 외모로도 성격으로도 가장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그의 고백은 애틋했다. 궁금했다. 어떤 면이 그리 닮았을까.

“훌륭한 점이 닮은 건 아니고요. 까다로운 것, 아무거나 안 먹는 것 이런 건 닮았어요.(웃음) 그런데 제 아버지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이해 안 된다고 하는 면들은 나쁘다기보다 성격일 뿐이에요. 예를 들면 엉뚱한 데서 화를 낸다고 사람들이 느끼는 것도 당신 입장에선 굉장히 설득력 있는 이유가 있었던 거죠. 아버지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아버지가 어떤 대목에서 화를 낼지 100% 예상할 수 있었을 정도예요. 저는 아버지의 그런 기질을 닮은 거죠.”
[ARTIST] ‘관계’의 속살을 들여다본다는 것
#3. 껍질 혹은 갑옷을 벗기까지
어쩌면 박 작가가 20년 넘게 작품 활동을 하면서 줄곧 ‘사람’이라는 화두를 놓지 않는 근원적 이유 또한 아버지와 가족의 존재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살을 많이 부비면서 자랐어요. 형제들 중에서도 특히 제가 유독 아버지와 있는 시간이 많았죠. 포항에 계실 때조차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아침에 출근해 밤중에 퇴근하는 일반 샐러리맨 아버지보다는 훨씬 더 많이 함께 했을 거예요. 제가 태어난 타이밍 자체가 운이 좋았죠. 5·16 이후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처음 외출하신 게 제가 태어났을 때라고 하더라고요. 또 하나, 아버지 때문에 집 안엔 늘 사람들이 북적거렸어요. 좀 과장해서 말하면 볼 게 사람밖에 없었을 정도죠.(웃음) 어른들에게 사랑도 많이 받았어요. 지금도 보다시피 말을 안 가리고 하는 편인데 어릴 때라고 뭐 달랐겠어요.(웃음) 저희 어머니가 이조시대 정경부인 같은 분이라 규율이 백만 가지였는데도 저는 그런 환경에서 할 말 다하고 흉내도 잘 내고 하니 귀여워들 하셨죠.”
[ARTIST] ‘관계’의 속살을 들여다본다는 것
‘지금도 보다시피 말을 안 가리고 하는 편’이라는 데 방점이 찍혔다. 같은 이유로 박 작가의 가족이나 지인들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여느 평범한 집안도 아니고 대한민국이 다 아는 집안, 소문 하나 시선 하나에도 온갖 신경이 집중되는 집안에서는 행여 어떤 말이라도 새어나갈까 ‘단속’하기 바쁜 게 일반적인 풍경이니까.

“미국에 가서 살고 있는 게, 미국이란 나라가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든 관심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대한민국에선 그럴 수가 없죠. 나에 대한 평가는 곧 ‘누구의 딸’로서 평가를 받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말이죠. 저는 구조 자체가 그렇게 의식하고 사는 게 잘 안 되는 사람이에요. 그러다 보니 자꾸 일이 생기고, 집안에선 불안해해요. 그러니 부담은 더욱 커지는 겁니다. 부담과 공포가 커질수록 더 잘하게 되는 게 아니라 자꾸만 ‘삑사리(음이탈)’가 나요.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죠. 벗겨내서 내 근본적인 게 뭔지 알아내는 것 말이에요.”

의도치 않게 다시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박유아’와 그 스스로가 생각하는 ‘박유아’가 같고도 다른 데는 그런 근본적 차이가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것이 사람들의 여전한 편견이든 시선이든 여전히 그는 벗어야 할 갑옷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박 작가는 이미 ‘박유아’라는 이름을 넘어선 듯 보였다.

다시, 그의 그림들을 들여다본다. 그와 전 남편이 등장하는 한 컷의 사진이자 그림. 읽히지 않는 표정은 웃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순간, 인터뷰 당시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1시간 반, 짧은 시간 동안 기자가 본 것은 박 작가의 어디까지의 모습이었을까. 관계란 이토록 오묘한 것. 그가 ‘관계’를, ‘사람’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