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기 석교상사 회장

골프용품 브랜드 투어스테이지와 파이즈 공식 수입 업체인 석교상사 이민기 회장은 할리데이비슨 마니아다. 40대에 할리데이비슨의 매력에 빠져 2004년부터는 매년 미국 원정 투어를 하고 있다. 올해로 10번째 미국 원정 투어를 다녀온 그에게 할리데이비슨의 매력을 물었다.
[LIFE BALANCE] “움츠러들었던 중년 남자가 할리를 만나면서 자신감을 되찾았죠”
도전은 인간에게 가치를 부여한다. 하지만 일상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도전을 잊고 살기 쉽다. 도전에서 멀어지는 만큼 삶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기도 어려워진다. 나이가 들어서 하는 도전이 그래서 더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이민기 석교상사 회장은 잠깐이라도 일탈을 해보라고 권한다. 작은 일탈만으로도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렇게라도 숨을 쉴 수 있다면 삶은 훨씬 풍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제가 그랬거든요. 40대 중반까지 누구보다 모범생으로, 열심히 비즈니스를 하면 살았어요. 아마 바이크를 타지 않았다면 지금도 돈 벌려고 일만 했을지도 모르죠.”

예정된, 정해진 길만 걸으면 삶이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면 외로움이 커지는데,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파격적인 변신이 필요하다. 일탈이 파격적인 만큼 재미는 배가 된다. 그는 할리데이비슨을 타면서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LIFE BALANCE] “움츠러들었던 중년 남자가 할리를 만나면서 자신감을 되찾았죠”
40대 후반, 양복을 벗고 할리에 앉다
할리데이비슨을 접한 건 이 회장이 30대 초반이던, 1980년대 중반이다. 미국의 한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는데, 할리데이비슨 30~40대가 주유소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기름을 넣고 무리를 지어 주유소를 빠져나가는 광경을 그는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충격이면서도 너무나 멋져 보였다. 언젠가는 할리데이비슨을 타보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단순한 동경이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에 매몰됐다. 대부분의 사업가처럼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양복을 입고 비즈니스를 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참 열심히도 했다. 그러다 40대 후반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 그때 오랜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할리데이비슨에 대한 꿈이 되살아났다.

할리데이비슨을 타며 양복 대신 청바지를 입고, 면도도 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가면 지켜보던 사람들이 엄지손가락 치켜세우며 멋있다고 박수를 쳤다. 그들의 응원에 잊혔던 자신감도 생겼다.
[LIFE BALANCE] “움츠러들었던 중년 남자가 할리를 만나면서 자신감을 되찾았죠”
“40대 후반이 되면 남자들은 자신감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인터넷이니, 스마트폰이니 뉴 테크놀로지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밀리죠. 거울 보면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돼요. 세상과 타협하면서 산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거든요. 저 또한 그랬습니다. 움츠러들던 40대 후반의 남자가 할리를 만나면서 자신감을 되찾았다고 할까요. 라이더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많아요. 할리를 만나고 제 인생이 훨씬 풍부해졌습니다. 초기엔 아내를 태우고 모임에 나가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다들 부러워하더군요.”

물론 껄끄러운 면도 있었다. 그에게는 동호인들 사이에 만연한 군대 문화가 불편했다. 할리데이비슨 문화는 1960~1970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갱스터 문화였다. 그러다 화이트칼라들이 할리를 타면서 새로운 할리 문화가 정착됐다. 그가 할리를 타던 시절, 한국의 할리 문화는 완전히 군대 문화였다. 경찰이나 수도방위사령부에서 할리를 타던 사람들 중심으로 클럽이 생겼으니 그럴 법도 했다. 심지어 링을 차고 철벅철벅 걷던 이들도 있었다. 다행히 2000년대 들어 미국의 할리 문화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군대 문화가 많이 사라졌다.

요즘 할리 동호회를 가보면 대학교수에서 의사, 사업가 등 다양한 화이트칼라들을 쉽게 만난다. 아쉬운 점이라면 할리데이비슨이 너무 대중화됐다는 점이다. 다양한 계층이 할리를 즐기면서 간혹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도로에서 차량 운전자들을 방해하거나 자랑하듯 폼을 재며 타는 동호인들을 보면 아쉽다. 그럴 때면 자부심을 갖고 점잖게 타던 예전 생각이 많이 난다.
[LIFE BALANCE] “움츠러들었던 중년 남자가 할리를 만나면서 자신감을 되찾았죠”
미국 원정 바이크 투어 10년의 기록
할리를 타면서 또 하나 아쉬운 점은 고속도로를 질주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고속도로에서 바이크가 금지돼 있다. 1970년대까지는 고속도로에서도 바이크의 주행이 가능했지만, 사망 사고 이후 고속도로 주행이 전면 금지됐다. 반면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바이크의 고속도로 주행이 허용된다.

그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그는 미국 원정 바이크 투어를 시작했다.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재미교포 동호회원들과의 원정 투어가 올해로 10년째다. 그동안 7번은 미국에서, 3번은 한국에서 투어를 가졌다. 국도를 타다 미국의 광활한 고속도로를 달리는 느낌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LIFE BALANCE] “움츠러들었던 중년 남자가 할리를 만나면서 자신감을 되찾았죠”
10번의 투어 중 2007년 ‘루트66’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루트66은 미국에 처음 생긴 프리웨이로, 고속도로가 노후해 상권이 이미 죽은 상태다. 상권이 죽은 대신 라이더들의 천국으로 거듭났다. 최근에는 유럽, 특히 독일 라이더들이 많이 찾는다.

2007년 투어에서 이 회장 일행은 루트66을 라이딩했다. 루트66에서도 라이더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시카고에서 샌타모니카까지 총 3939.6km 루트66을 알리는 기념관 등이 모여 있는 구간이다. 기념관에는 루트66 여행을 기념해 각국의 라이더들이 꽂아둔 국기가 진열돼 있었는데, 태극기만 눈에 띄지 않았다. 고이 간직해 간 태극기를 꽂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LIFE BALANCE] “움츠러들었던 중년 남자가 할리를 만나면서 자신감을 되찾았죠”
이듬해인 2008년 스터지스 시티에서 라이딩을 했다. 사우스 다코타에 있는 스터지스 시티는 해마다 바이크 랠리가 열리는 라이더들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한국에서 떠난 그들은 로스앤젤레스(LA) 팀을 만나 스터지스 시티에 도착했다.

스터지스는 생각보다 작은 마을이었다. 그 작은 마을이 6, 7월 랠리 시즌이 되면 주민들은 모두 여행을 떠나고, 바이커들의 천국이 된다. 세계 전역에서 약 80만 대의 할리데이비슨이 모이고, 그들을 위한 다양한 이벤트가 벌어진다.
[LIFE BALANCE] “움츠러들었던 중년 남자가 할리를 만나면서 자신감을 되찾았죠”
“스터지스 랠리 참가는 라이더들의 꿈이에요. 저는 10일간 미국에 체류했는데 7일은 바이크를 타고, 3일은 현지인의 집을 렌트해 그곳에서 머물렀어요. 30명이 한 집에서 지냈는데, 스터지스 시장을 초대해 한국 음식으로 파티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시장은 스터지스 시티에 ‘코리안 데이’를 만들어줬어요. 한번에 동양 라이더 30명이 온 건 처음이라면서요. 저희로선 의미가 있었습니다.”

2009년에는 미국 팀을 초청해 한국에서 라이딩을 즐겼다. 투어 제목은 ‘맛 따라 길 따라’. 투어 제목대로 일주일 동안 전국의 맛집을 순례하는 투어였다. 서울에서 출발해 서해안을 거쳐 남해와 동해안을 두루 거치는 경로였다. 오랜만에 한국은 찾은 재미교포 친구들이 특히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2013년 투어는 지난 9월, 캘리포니아에서 가졌다. 제목도 ‘캘리포니아 런 2013’으로 캘리포니아를 일주하는 코스였다. LA를 출발해 요세미티, 레이크타워, 맨도시노를 거쳐 퍼시픽 하이웨이를 타고 LA로 돌아오는 약 3000km 랠리였다. 시차에 적응하느라 하루는 한국 팀만 라스베이거스를 돌았다. 5박 6일간 라이딩을 하는 동안 하루에 1000km를 타기도 했다. 멤버 중에 이 회장보다 연배가 많은 라이더들도 있어 이번 라이딩 기간을 상대적으로 짧게 잡았다.

올해 투어에서는 작은 해변마을, 맨도시노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바다 앞의 집을 렌트해 하루를 묵었는데, 동행한 라이더 중 전복을 잡을 수 있는 면허를 가진 동료가 있었다. 일행을 위해 그가 전복을 따왔는데 상상도 못할 전복의 크기에 모두가 놀랐다. 전복 1개가 5명은 족히 먹을 크기였다. 맛있는 전복에 경치까지 좋아서 넉넉한 저녁을 보낼 수 있었다.

요세미티와 빅서에서는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다. 야행은 야영대로 또 다른 운치가 있다. 남자들끼리 저녁을 준비하고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눌 때 특히 그렇다. 미국에서 40, 50년을 산 이들의 살아온 이야기는 그 자체로 소설이다. 나이가 50, 60세가 넘은 남자들끼리 그렇게 서로 배려하면서 깔깔대고 웃는 건 아무도 누릴 수 없는 특권이다.

이번 원정은 개인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10년 동안 맡아온 원정 대장을 그만두겠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대장 노릇이라는 게 사실 굉장한 스트레스다. 사고가 나면 큰 부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많은 사람이 모이면 사고뭉치가 꼭 하나는 있기 마련입니다. 그걸 정리하는 게 쉽지 않아요. 남자들은 10명만 모여도 본능적으로 자기 구역을 만들려는 본능이 나와요. 잘 하다 옆길로 새는 거죠.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으면 싸우고 깨져 버려요. 중간에서 그걸 잘 조절해야죠. 그런 일을 겪고 나면 헤어질 때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그러죠. 대장으로 있는 10년 동안 별다른 사고 없었으니 저로선 잘 따라준 동료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할리를 타며 얻은 수많은 즐거움
할리데이비슨을 탄 지 15년째, 그 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함께 할리를 타던 동호회 회원 2명이 세상을 떠났고, 멤버들도 많이 바뀌었다. 초창기 멤버 중 지금까지 남은 사람은 몇 안 된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동료애다. 할리를 타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온몸에 문신을 한 친구부터 대학교수, 의사까지. 연령층도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하다. 지역적으로 보면 부산, 강릉 등에서 미국까지 다양한 지역의 라이더들과 교류를 했다. 올해 환갑이 된 그이지만 동호회에서 20대도 그를 형이라 부른다. 그들과 형제보다 진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다. 할리가 없었다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할리 문화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브러더후드(brotherhood) 문화다. 젊을 때는 속도를 즐기는 레플리카(일명 뽕카)를 좋아하지만, 레플리카는 속도 중심이기 때문에 함께 라이딩은 못한다. 나이가 들수록 점잖게 함께 타는 아메리칸 스타일 바이크를 선호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게 할리데이비슨이다. 할리는 모여서 함께 목표를 향해 가기 때문에 브러더후드가 생긴다. 가장 편안한 속도인 시속 80~100km를 함께 달리다 보면 서로를 배려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우정이 싹튼다.

그는 할리를 타면서 달리는 즐거움, 끈끈한 동료애와 함께 봉사 활동의 의미도 알았다. 그 경험을 통해 이 회장은 사람들이 모이면 나쁜 일보다는 좋은 일을 도모하는 경우가 많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할리를 타면서도 그런 사실을 확인했다. 지난 10년간 고아들의 집인 서울 불광동 선덕원에 컴퓨터, 냉장고, 세탁기 등을 들여놓고 합창단을 지원해왔다. 강원도에 수해가 났을 때는 쌀 100부대를 내놓기도 했고, 직접 현장으로 가 소매를 걷고 삽을 들기도 했다.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마음을 보탠다는 생각으로 갑니다. 사람은 좋은 일을 하면 순화가 됩니다. 대부분을 나쁜 놈처럼 사는데, 좋은 일을 하는 그때만큼은 좋은 놈 같으니까요. 좋은 일을 하고 박수를 받는 것만큼 바람직한 일도 없다고 봐요. 좋은 친구들과 좋은 일을 하니까 보람도 즐거움도 더 클 수밖에 없죠.”

이 회장은 바이크를 통해 세상을 훨씬 풍부하게 살게 됐다고 말했다. 마음이 끌리는 이들에게 바이크를 추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도 그렇게 돕고 즐기면서 바이크를 탈 생각이다.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