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하고 실용적인 독일의 산업 디자인을 알고 싶다면 바우하우스를 보라
우리가 일상생활에 쓰고 있는 가전·생활용품에서부터 의자, 컴퓨터와 서책의 서체, 신문·잡지의 광고 디자인까지 오늘날도 그 영향력은 여전히 유효하고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상당히 지속될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오늘날 산업 디자인의 양식을 창조했고 그 기준을 마련했으며 현대 건축의 발명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아파트 문화로 대변되는 획일화된 도시 설계도 거슬러 올라가면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공동 주택이 효시다. 철과 콘크리트, 유리로 된 이 건물은 바우하우스 교사(校舍)와 더불어 건축의 혁신으로 급속히 팽창하는 20세기 도시 산업의 주택 정책과 맞물려 빠르게 발전했다.
바우하우스의 목표
바우하우스의 목표는 모든 순수미술과 공예가 건축에 귀결하는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 1969)라는 걸출한 건축가가 없었다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로피우스는 1883년 5월 18일 베를린에서 건축 및 교육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유명한 화가였고, 삼촌은 베를린 미술공예박물관의 관장이었고, 아버지는 건축가였다. 그로피우스는 뮌헨과 베를린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교육철학 가운데 중요한 것은 순수미술과 공예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 같다는 생각이었다. 화가들은 학생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으며, 형태와 구성 사이에서의 색채 사용으로 미감의 근본에 대한 통찰력을 길러줄 수 있다고 믿었다. 화가 요하네스 이텐과 라이오넬 파이닝어,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오스카 슐레머, 요셉 알버스 등 당시 쟁쟁한 이름들은 모두 그로피우스가 발탁한 바우하우스의 교사들이다.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교사는 1925년 여름에 착공해 이듬해 10월에 완공했다. 그로피우스는 학생과 교사진의 생활공간뿐 아니라 새로운 숙박시설의 디자인도 맡았다. 바우하우스는 강의 구역, 행정 구역, 그리고 학생 주거 지역을 철근 콘크리트의 직사각형 블록으로 연결했다. 이것은 근대화 운동의 양식으로 된 대규모 공공건물의 최초 사례다. 그로피우스는 전체를 평지붕으로 했고, 작업실에 많은 양의 빛을 공급하기 위해 4층 규모의 실습실 건물에 거대한 유리 커튼 벽을 사용했다. 동시에 10개의 창문을 열 수 있는 도르래 시스템의 기술적인 기교는 놀라웠다. 강의실과 공방, 극장과 식당, 그리고 28개의 학생용 스튜디오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는 옥상 정원을 두었다. 주 건물의 외관은 모두 유리로 만들어졌으며, 골격은 철근과 콘크리트로 강화됐고, 들보 위에 놓인 바닥에는 속이 빈 타일을 사용했다. 모든 재료와 공법이 새로웠다. 이는 훗날 그로피우스와 한스 마이어를 이어 3대 바우하우스 교장이 된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가 1958년 뉴욕 메디슨가에 세운 최첨단 고층 오피스 빌딩인 시그램 빌딩의 모델이 됐다. 직선과 유리, 단순함과 강철 구조, 수직과 콘크리트 등 모든 것이 바우하우스 건축의 결정체였다.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에 위치한 삼일빌딩은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해 1979년에 완공한 한국 최초의 지상 31층 고층 빌딩으로 바우하우스 건축의 영향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다. 바우하우스에서는 모든 설비와 가구를 기능적으로 단순하게 디자인했다. 바우하우스 워크숍 공간은 전적으로 디자인을 위한 것이었다. 각진 모양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극장 조명은 나즐로 모홀리 나기가 디자인했고 파이프식 금속 좌석은 당시에는 학생이었으나 이후 바우하우스의 강사가 된 마르셀 브로이어가 디자인했다.
1926년, 도보로 바우하우스 교사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베르퀴나우어 알레의 소나무 숲속에 교수진의 숙소 세 채를 완공했다. 그로피우스는 교장인 자신의 독립된 관사와 다른 교수들을 위해 칸막이벽으로 이어지게 디자인했다. 숙소는 주거 기능을 고려해서 엄격하게 디자인됐고 완전히 기능적인 구조였다. 언뜻 보아도 주거에 불편해 보일 만한 가구가 많지 않으며, 매우 적은 수의 색채로 장식돼 있다. 이러한 경제적 접근은 욕실과 부엌에 가장 적합했다. 그로피우스의 집 부엌은 능률적인 것의 표본이며 세탁기나 눈높이에 맞춘 오븐 같은 최신 가재도구를 모두 갖추고 있다. 수납장이 설치돼 정리가 수월해졌고, 접시와 조리기구들이 벽걸이에 안정적으로 정돈돼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으로 쓰고 있는 붙박이 부엌의 원조 디자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기존 주택과는 다른 생소한 주방이었다. 이 주택 가운데 한 채에 살았던 칸딘스키의 부인의 회상이 인상적이다.
모던은 불편함이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새로운 미감에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바우하우스에서 시작한 모던라이프의 불편이 21세기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편해졌다. 이제 아무도 커다란 유리창에 하얀 실내 벽을 불편하다고 탓하지 않는다. 바우하우스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인 ‘미술과 공예가 건축에 귀결한다’가 완전하게 이해됐기 때문이다.
슐레머가 디자인한 최초의 바우하우스 로고는 직선과 면으로 이루어졌지만 마치 사람의 옆모습을 연상시킨다. 오늘날 LG의 로고가 선과 원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얼굴 이미지와 흡사한 것도 거슬러 올라가면 바우하우스 디자인의 여운은 아닐까. 1931년 모흘리 나기가 디자인한 포스터 ‘더 뉴 라인(the new line)’에서 유리와 철제 가구를 당시 최신의 생활 감각으로 보여준다. 유리와 철제 가구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익숙하게 사용되고 있다. 바우하우스가 비로소 완전하게 바우하우스가 된 것이다.
최선호 111w111@hanmail.net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 스마트뮤지움,
버밍햄 뮤지움 등 작품 소장. 현재 전업 화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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