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징주의 작가 엘리후 베더

엘리후 베더(Elihu Vedder·1836~1923)는 진리와 신앙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던 상징주의 작가다.
한 세대를 앞선, 신비로우면서도 시적인 그의 작품은 현 세대 작가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임에 틀림없다.
스핑크스에게 묻는 자, 1875년, 캔버스에 유채, 워스터 미술관
스핑크스에게 묻는 자, 1875년, 캔버스에 유채, 워스터 미술관
깊은 밤 달빛을 머금은 거대한 스핑크스의 머리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사자 형상의 몸체는 오랜 모래폭풍과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땅 속에 파묻혀 버렸다. 주변에는 흩어져 있는 열주들이 오래전 이곳에 신전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제단처럼 생긴 각진 돌 앞에 보이는 두개골은 아마도 스핑크스에게 바쳐졌던 제물처럼 보인다. 금방이라도 스핑크스가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땅 위로 솟아오를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돈다. 뜻밖에도 이 음산한 장소에 한 사내가 찾아왔다. 그의 몰골은 걸인을 방불케 한다. 그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자신의 귀를 스핑크스의 입에 갖다 댄다. 그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 여행 후 200여 편의 작품 남겨
미국의 상징주의 작가 엘리후 베더가 발표한 ‘스핑크스에게 묻는 자’는 베더가 이집트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1863년 자료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동원해 그린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발표하자마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켜 당시까지 무명이었던 그의 이름을 전 미국 화단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당시 남북전쟁(1861~1865)으로 상처받은 미국인들은 그의 그림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 그림이 발산하는 신비로운 분위기에 매료된 한 부유한 컬렉터는 즉석에서 이 그림을 구입(현재 이 작품은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했다고 한다. 작품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던지 그가 여러 개의 유사한 작품을 제작했을 정도다.

베더는 1836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치과의사였는데 경쟁이 치열한 뉴욕보다는 미지의 세계에 가서 한 몫 하겠다는 일념에 가족을 데리고 쿠바로 이주한다. 베더는 나중에 뉴욕의 기숙학교에 보내지는데 거기에서 미술에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들이 예술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아버지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스핑크스에게 묻는 자, 1863년, 캔버스에 유채, 보스턴 미술관
스핑크스에게 묻는 자, 1863년, 캔버스에 유채, 보스턴 미술관
뉴욕에서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한 베더는 파리와 이탈리아에서 유학해 화가로서의 기량을 닦는다. 1860년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상업적인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는 한편 파프즈 커피숍에 출입하며 보헤미안 미술가, 문학가와 교유한다. 테니슨의 ‘이노크 아든’ 삽화를 그린 것은 이때였다. 그러나 남북전쟁을 겪는 가운데 미국의 현실에 환멸을 느낀 베더는 1865년 다시 유럽으로 발길을 돌렸고 결국 이탈리아에 영주하기로 결심한다. 이후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하긴 했지만 사업 목적이었을 뿐 마음의 고향은 이탈리아였다.

1889년 겨울 그런 그에게 조지 콜리스라는 한 미국인 부호가 이집트 여행에 동행할 것을 제안한다. 모든 여행 경비를 부담하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는 베더의 열렬한 팬이었다. 베더로서도 더할 나위없는 기회였다.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렸던 이집트의 신비로운 유적지를 직접 목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카이로에 도착해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기자의 거대한 스핑크스를 보고 너무나 감격해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는 말로 첫 소감을 피력했다.
기억, 1870년, 마호가니 패널 위에 유채, LA카운티 미술관
기억, 1870년, 마호가니 패널 위에 유채, LA카운티 미술관
그는 불과 다섯 달의 이집트 여행을 통해 모두 200여 점의 작품과 스케치를 남겼다. 그의 눈에 이집트의 문명은 하나같이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는 이집트 풍경을 “아름답고, 소박하고, 위대하다”라고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그것은 현실의 풍경이었지만 동시에 시간의 뒤안길로 사라진 현실 저편의 모습이었다. 이집트 문명에서 느낀 이런 추상적 인상은 이후 고스란히 베더 자신의 미술적 지향점이 됐다.


한 세대를 앞선 선구적 화풍
현실 저편의 본질 세계를 추구하는 베더의 성향은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보편 구제설의 신봉자였다. 어떤 절대자의 심판도, 죄를 받고 떨어지는 지옥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 점은 베더로 하여금 평생 동안 끊임없이 진리와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리고 이는 자신만의 영적인 세계를 구축한 윌리엄 블레이크나 라파엘 전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게 된다. 만년에 자서전에서 고백했듯이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비전을 떠올리는 경향”이 그의 그림 전반을 지배하게 된 것도 다 그런 이유다.

1870년에 그린 ‘기억’은 그의 그런 성향이 잘 드러난 작품 중 하나로 신비로운 분위기가 두드러진 작품이다. 저녁 무렵의 해변과 파도치는 바다 위로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 속에는 아이의 얼굴 형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리던 당시 베더의 아내는 임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새롭게 탄생할 아이의 영혼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해바라기의 영혼-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한 경의, 1870년, ‘오마르 카이얌의 러바이야트’의 삽화
해바라기의 영혼-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한 경의, 1870년, ‘오마르 카이얌의 러바이야트’의 삽화
같은 해에 그린 ‘해바라기의 영혼’ 역시 그의 본질 세계에 대한 관심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한 경의’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오마르 카이얌(고대 페르시아의 시인)의 러바이야트’의 삽화 중 하나다. 해바라기는 늘 우주의 근원으로 여겨진 태양을 향해서 계속 고개를 돌린다는 점에 착안해 해바라기에 내재한 영적인 에너지를 표현했다.

베더는 프랑스보다 한 세대 앞서 상징주의 작품을 쏟아낸 선구적인 작가다. 불행하게도 그가 한창 활동하던 시대는 온 유럽이 인상주의 열풍과 뒤이은 현대미술 운동으로 요동치던 때였다. 미국인들조차 유럽의 미술운동을 흥미로운 눈초리로 주시할 뿐 자신들 주변에 천재적인 작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의 선구적 작업들이 다시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엽기적이고 폭력적인 상상력이 판치는 지금 그의 신비로우면서도 시적인 상상력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새로운 덕목임에 틀림없다.


정석범 한국경제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