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그레코는 그리스 출신의 작가로 베네치아와 로마 등에서 회화 수업을 거쳤다. 주로 스페인에서 작품 활동을 한 그는 기독교 신앙의 위기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스페인 기독교의 선전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1586~1588년, 캔버스에 유채, 톨레도 산토토메 성당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1586~1588년, 캔버스에 유채, 톨레도 산토토메 성당
스페인의 고도 톨레도에 자리한 산토토메 성당은 1년 내내 전 세계에서 온 순례자와 여행객들로 몸살을 앓는다. 엘 그레코(El Greco·1541~1614)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라는 그림을 보기 위해서다. 이 작품은 1312년 톨레도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산토토메 성당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던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 때 일어난 기적을 묘사한 것이다.

이날 장례식이 시작되자마자 화려한 금색 의상을 걸친 성 스테판과 성 오거스틴이 홀연히 나타났는데 이 두 성자는 놀랍게도 백작의 시신을 직접 매장했다고 한다. 이 기적적인 사건은 교회 측에서 유포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한 자는 반드시 보답을 받게 된다는 반종교개혁의 이념이 반영돼 있다.

그림은 크게 장례가 거행되는 현실세계를 그린 하단과 백작의 영혼이 천상으로 올라가 심판을 받고 있는 영적인 세계를 묘사한 하단으로 나눠져 있다. 그런데 이 두 세계는 분리돼 있지 않고 긴밀히 연결돼 있다. 인간 세상에 내려온 두 성자도 그렇고, 아기로 변용된 백작을 받아든 천사, 그리고 천상의 영적인 세계에서 절대자 앞에서 심판을 받고 있는 백작의 모습도 그렇다.
‘성 마틴과 걸인’, 1597~1599년, 캔버스에 유채, 톨레도 산호세 성당
‘성 마틴과 걸인’, 1597~1599년, 캔버스에 유채, 톨레도 산호세 성당
그림을 그린 그레코는 본명이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로 그리스 태생이었는데 엘 그레코는 그리스 사람이란 뜻으로 그가 그리스에서 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원래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무역상의 아들로 태어나 그곳의 미술학교에서 비잔틴 회화의 전통을 익혔다. 같은 시기 이탈리아가 르네상스의 대두와 함께 사실주의 미술을 꽃피우고 있었지만 크레타 섬은 여전히 중세의 추상적 회화 전통을 답습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20대 초반에 대가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고 그 후 베네치아로 유학을 떠났다.


티치아노와 미켈란젤로의 영향 받아
그는 베네치아에서 당대 유럽 최고의 화가로 통하던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화실에 들어가 도제로 일하면서 색채와 빛을 바탕으로 분위기 연출에 치중하는 그곳의 회화 전통을 배운다. 한편으론 대상을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보고 빛과 어둠을 명확히 대비시킨 틴토레토, 신체의 형태를 왜곡하는 파르미지아니노 등 매너리즘 화가들에게도 관심을 갖는다. 매너리즘은 기존의 회화 전통을 부정하고 형태와 색채를 주관적으로 해석한 유파로 피렌체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그레코는 또 1570년께 로마로 건너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접하는데 신체를 조각처럼 묘사하는 그의 특징은 작품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는 로마에서도 솜씨를 인정받았지만 워낙 경쟁자들이 많아 미래를 점치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스페인의 유력자로부터 스페인 궁정에서 유능한 화가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1577년 스페인으로 향한다. 그레코의 솜씨는 금방 톨레도와 마드리드에 알려져 그는 궁정화가를 꿈꾸게 되지만 당시 왕 필리페 2세의 마음을 얻지는 못한다. 결국 그는 톨레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종교개혁의 몸살을 앓고 있던 스페인 기독교의 선전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묵시록의 다섯 번째 봉인’, 1610년께, 캔버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묵시록의 다섯 번째 봉인’, 1610년께, 캔버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의 면죄부 판매에 반기를 들고 95개 조의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움직임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 유럽으로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루터는 기독교의 유일한 진리는 오직 성서에 있지 교회에 있지 않으며 구원도 개인의 믿음에 의한 것이지 교회의 성사와는 관계가 없고 사제제도에도 반대해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사제라고 주장했다.

신도들의 동요는 불가피했다. 기독교 지도부는 이런 움직임을 그대로 방치할 수만은 없었다. 교회를 이탈한 신도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뭔가 새로운 방식이 필요했다. 스페인 교회는 오랫동안 교회에서 터부시해온 신비주의를 끌어들였다. 신비주의는 ‘인간은 신과 동일하다’는 신인동일설(神人同一說)에 근거를 둔 것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인간은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사상이다. 특히 기독교의 신비주의는 신과 하나가 되는 신비로운 체험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라는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초월적인 체험은 일반인들로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일들로 기적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기독교 신앙 위기의 시대에 탄생한 초현실적 회화
그레코가 처음 스페인에 발을 디뎠을 때는 신비주의자였던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1515~1582)와 십자가의 요한(1542~1591)이 한창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레코 작품의 주제는 이런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상당수가 신비로운 영적 체험, 예수 혹은 성자가 행한 기적 같은 신비로운 사건들이 주를 이룬다.
‘톨레도 풍경’, 1597~1599년, 캔버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톨레도 풍경’, 1597~1599년, 캔버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산호세 교회의 주문을 받아 그린 ‘성 마틴과 걸인(1597~1599)’도 그런 신앙과 기적에 얽힌 얘기를 담고 있다. 성 마틴(316~397)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의 거점 중 하나인 프랑스 투르의 대주교를 지낸 성인인데, 원래 이교도로 로마군 소속의 군인이었다. 하루는 그가 말을 타고 갈리아를 거쳐 아미앵으로 향하는데 한 걸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걸인의 헐벗은 모습을 불쌍히 여긴 마틴은 자신의 옷을 반으로 잘라 걸인에게 줬다. 그날 밤 마틴은 꿈을 꿨는데 예수가 자기가 걸인에게 잘라 준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는 예수가 옆에 있는 천사에게 “여기 세례를 받지 않은 마틴이 있다. 그가 내게 옷을 입혀줬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전설에 따르면 마틴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잘린 옷이 원래의 온전한 상태로 되돌아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성 마틴은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그레코의 그림은 성 마틴이 자신의 옷을 잘라서 걸인에게 주는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박애를 실천하는 이에게 내린 기적을 담은 에피소드다. 이 그림 역시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에 귀의한 자에 대한 예수의 가호가 있으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걸인의 모습이 기괴할 정도 기다랗고 신체는 강한 명암 대비로 인해 마치 조각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대상을 왜곡하는 매너리즘과 조각 같은 회화를 지향했던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추상성에 바탕을 둔 비잔틴 회화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레코는 특히 가톨릭 신앙의 울타리를 벗어난 자들에 대해 준엄한 경고를 내리는 작품도 많이 남겼는데 이는 가톨릭의 위기가 극에 달했음을 말해준다. ‘톨레도 풍경’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림에서 톨레도는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고 하늘에는 먹구름이 자욱하다. 기괴한 형상의 구름은 잔인한 심판자처럼 금방이라도 도시를 집어삼킬 태세다. 이 작품을 보며 당시 톨레도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으리라. 독특한 형상과 색채로 충만한 그레코의 초현실적 회화는 기독교 신앙의 위기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탄생한 예술의 정화가 아닐 수 없다.



정석범 한국경제신문 문화전문기자.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홍익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고 저서로 ‘어느 미술사가의 낭만적인 유럽문화기행’, ‘아버지의 정원’, ‘유럽예술기행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