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은퇴한 남성을 빗댄 여러 우스갯소리가 유행이다. 밥 세 끼를 집에서 다 챙겨 먹는 남편을 가리켜 ‘삼식이’라고 하고, 은퇴 후 아내 곁에 딱 달라붙어 있는 남편은 ‘젖은 낙엽족’이라고 부른단다. 은퇴한 남성의 처지가 우스워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지만 고령화 시대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은퇴하면서 위축감을 느끼거나 우울감, 의욕 저하와 같은 심리적 현상이 나타나는 ‘은퇴증후군’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특히, 회사 중심으로 살아온 남성들은 퇴직과 함께 사회적 지위와 네트워크를 상실하게 되면서 적지 않은 충격에 빠진다.

남편의 스트레스만큼이나 은퇴한 남편을 상대하는 아내의 고충도 만만치 않다. ‘남편살이’는 이러한 세태를 잘 반영한 신조어다. 아이들 뒷바라지도 끝났고 이젠 내 인생을 즐길 차례다 싶었는데, 퇴직하고 집에 들어앉은 남편이 사사건건 잔소리를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때 아닌 남편의 간섭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시집살이 못지않다고 해서 붙여진 말이다.

100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은퇴는 새로운 생의 시작임에 틀림없다. 60세에 은퇴한다고 해도 은퇴 후 30~40년을 더 살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자연히 부부관계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청년기에 반려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서로에게 적응해 나갔듯이, 은퇴 후에는 달라진 상황에 맞는 부부간의 새로운 역할 정립이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 잘 대처하지 못하고 갈등을 겪는 부부들이 의외로 많다. 통계청 보고에 따르면 최근 젊은 층의 이혼율은 점차 감소하는 반면, 중년 이후의 이혼율은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실제로 작년에 50대 후반 남성의 이혼율이 전년 대비 증가폭 8%로 가장 크게 늘어났다. 2002년과 비교하면 50세 이후 이혼 건수가 무려 3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이처럼 중년과 노년기 부부의 이혼율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남편의 은퇴로 발생하는 부부간의 갈등을 통제하고 해소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아내의 노고를 인정해줘야 한다

은퇴기의 부부관계를 순탄하게 풀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로의 노고를 인정하고 격려해야 한다. 퇴직을 하고 나면 그동안 직장에서 고생한 것을 아내에게 위로 혹은 보상 받으려는 남편들이 있다. 상대방의 노고를 알아주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받는 사람이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위로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돼 상대에게 서운해질 수밖에 없다.

남편이 직장생활을 하느라 고군분투했다면 아내 역시 그러한 남편을 뒷바라지하느라 또는 바쁜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동분서주했을 것이다. 출산과 함께 어쩔 수 없이 직장을 포기했을 수도 있고, 양육하는 동안에도 종종 밤잠을 설치며 아이를 돌봐 왔을 것이다. 전업주부가 워킹맘에 비해 대사증후군에 걸릴 위험이 높다는 연구 결과는 주부로 사는 삶이 결코 쉽지 않음을 증명하는 단적인 사례다.

실제로 남편의 은퇴는 당사자만큼이나 상대 배우자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다. 전업주부인 아내는 일반적으로 남편의 사회적 지위와 동일시되는 삶을 살아오기 때문에 남편의 퇴직과 함께 똑같은 상실감을 경험하게 된다.

거기다 매일 출근하던 남편이 어느 날부터 계속 집에 있게 되는 상황은 아내에게 있어 엄청난 환경 변화일 수 있다. 남편도 그렇지만 아내 역시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일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즉, 은퇴 후 부부관계의 갈등 요인을 잘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은퇴란 퇴직한 당사자인 남편뿐 아니라 아내도 함께 적응해 나가야 할 상황임을 이해하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노년기에 맞는 부부 역할을 재정립하자

은퇴 후에도 전업주부인 아내의 역할이 계속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건 금물이다. 생계 부양자로서 남편과 전업주부로서 아내의 역할은 가정 경제와 노동 시장의 여건, 자녀 교육 문제 등을 위해 일정 기간 선택된 분업일 뿐이기 때문이다.

은퇴 이후에는 부부가 어떠한 방식으로 경제적 필요를 충당하고 집안일을 나눌 것인지 다시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가 모두 파트타임 형태로 소일거리를 가질 수도 있고, 남편이나 아내 어느 한쪽만 일을 나가거나 두 사람 다 일하지 않고 연금 등으로 노후를 보낼 수도 있다.

이러한 경제적, 물리적 역할 분담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남편들의 보살핌 능력이 은퇴 전보다 향상돼야 한다는 것이다. 노화로 인한 질병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노년기를 보내야 한다. 이 시기에 보살핌을 제공하는 1차 간병인은 배우자일 가능성이 높다. 노년의 부부는 서로에게 간병인 같은 존재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남편들은 부양자 역할을 하느라 집안일이나 다른 사람을 보살피는 일에서 상당 부분 면제돼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은퇴 이후의 노년기에는 남편도 살림과 보살핌의 기술을 배워서 부부가 서로 간에 의지할 수 있는 관계가 돼야 한다.
[WELTH CARE] ]주부도 은퇴가 필요하다
부부간의 이해가 건강과 재산을 지킨다

부부 사이에 대화 시간을 늘리는 것 또한 은퇴기의 부부 갈등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대화가 많은 부부들은 그렇지 못한 부부보다 더 건강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대화를 늘려가기 위해서는 먼저, 배우자에 대한 이해를 넓혀야 한다. 다음으로 서로의 부족함을 감싸 안을 수 있는 포용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마음자세를 가지고 충분한 대화를 통해 새로운 역할을 만들어 나가면 부부관계의 갈등에 현명하게 대응할 수 있다. 이는 부부가 함께 쌓아온 재산을 잘 사용하고 건강하게 노년을 보내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결국 노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여유와 상대방을 이해하는 넉넉한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은퇴기의 행복한 부부관계를 위해서는 남편의 은퇴에 맞춰 주부인 아내의 은퇴식을 여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도 ‘주부 은퇴식’을 시도한 사례들이 있다. 주부 은퇴식은 부부관계에 새로운 역할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서로가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 배우자의 노고에 감사를 표현하는 한편, 부부 두 사람이 앞으로의 삶을 서로 격려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유정미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