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와인 소비 트렌드

2000년 이후 시장을 넓혀온 와인은 고급 문화의 상징이다.
한국의 VVIP들은 보르도 그랑크뤼 와인에서 출발해 부르고뉴와 론, 이탈리아 와인 등으로 선택의 폭을 넓혀왔다.
최근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칠레, 미국 등 다양한 와인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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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국의 와인 마니아들은 대부분 유학 생활이나 주재원 시절, 외국에서 와인을 접한 이들이다. 그러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둔 1987년 11월 민간업자들에게 주류 수입 면허가 허용되면서 본격적으로 와인이 수입됐다. 하지만 국내에 와인 문화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IMF 이후부터다. 정확히 말하면 IMF의 그늘에서 벗어난 2000년 이후다. 이때 형성된 프리미엄 와인 시장은 2003년 웰빙 바람과 함께 마니아층을 형성하게 됐다.

2000년대 초반 프리미엄 와인 시장의 맹주는 단연 보르도 와인이다. 부자들은 샤토 무통 로트칠드(Ch. Mouton Rothschild)를 비롯해 보르도 5대 특1등급 와인 앞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특이한 점은 당시 인기를 모았던 보르도 와인들이 대부분 1995~1998년 사이의 비교적 어린(young) 빈티지들이었다는 점이다. 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던 때라 2000년 빈티지들을 마시는 이들도 있었다.

특1등급 이외 샤토 린쉬바쥬(Ch. Lynch Bages), 샤토 퐁테카네(Ch. Pontet Canet) 등 보르도 그랑크뤼 와인들과 페트뤼스, 로마네콩티 등도 유명세를 탔다. 스파클링 와인 중에서는 최고급 품질을 자랑하는 돔페리뇽(Dom Perignon), 크리스탈(Cristal Champagne) 등이 귀한 대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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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한국인의 사랑을 받아온 샤토 탈보

당시 프리미엄 와인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샤토 탈보(Ch. Talbot)다. 지금까지도 와인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샤토 탈보는 한국인과 특히 인연이 깊다. 샤토 탈보가 한국에 알려진 것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수출 역군들이 비즈니스에 가장 많이 쓴 와인이 샤토 탈보였다. 고(故) 정주영 전 현대 회장도 샤토 탈보를 즐겼는데, 대북 사업을 위해 북한을 오갈 때 항상 샤토 탈보 몇 박스를 싣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샤토 탈보는 2000년대 초반 히딩크 감독에 의해 다시 유명세를 탔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이던 그는 16강 진출을 확정 지은 후 “오늘은 와인 한 잔 마시고 푹 자고 싶다”고 했는데, 그 와인이 바로 샤토 탈보였다. 샤토 탈보는 이후 와인을 소재로 한 만화 ‘신의 물방울’에 등장하면서 다시 한 번 인구에 회자됐다. 샤토 탈보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메도크 그랑크뤼 와인 중 가장 많이 팔린 와인 중 하나다.

보르도 그랑크뤼급 와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프리미엄 와인 시장은 200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변화를 맞게 된다.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의 영향도 있었지만, 와인 문화가 성숙하면서 다양한 지역의 와인을 찾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프랑스 부르고뉴와 론 지방의 와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부르고뉴는 ‘신의 물방울’을 통해 인지도를 얻은 대표적인 와인 생산 지역이다. 비싼 보르도 와인에 익숙한 부자들에게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고 다양한 향과 맛을 내는 부르고뉴 와인은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론 와인도 부르고뉴 와인과 짧은 시차를 두고 주목 받았다. 신성호 나라셀라 마케팅본부장은 “이전까지만 해도 유명한 와인에 편중된 와인 소비가 이 시기를 지나면서 다양하고 폭넓어졌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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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엄 와인 시장에서 이건희 회장의 막강한 영향력

프랑스와 함께 구대륙 와인을 대표하는 이탈리아 와인들도 이즈음 주목 받게 된다. 특히 이건희 와인으로 알려진 사시카이야(Sassicaia), 티냐넬로(Tignanello), 솔라이아(Solaia) 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국내 프리미엄 와인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다. 와인 애호가로 알려진 이 회장이 생일이나 선물용으로 어떤 와인을 선택했는지는 와인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항상 관심의 대상이다. ‘이건희 와인’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고가임에도 삽시간이 팔려나가기 때문이다.

지난해 이 회장의 생일 만찬에 등장한 20만 원대 프랑스 와인 ‘이기갈 콩드리외 라 도리안(E.Guigal Condrieu La Doriane)’이 품절된 데 이어 올해도 그의 생일 만찬에 등장한 ‘돔 페리뇽 바이 데이비드 린치(Dom Perignon by David Lynch) 2003’, ‘케이머스 카베르네 쇼비뇽 스페셜 셀렉션(Caymus Cabernet Sauvignon Special Selection) 2009’, ‘팔메이어 샤도네이(Pahlmeyer Chardonnay) 2009’ 등은 모두 동이 났다. 신 본부장은 “케이머스는 50만~60만 원대에 판매되는 고가의 와인임에도 추가로 수입한 물량까지 모두 팔렸다”고 했다. 프리미엄 와인 시장에서 이 회장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리먼 사태 이전까지 와인 시장은 매년 20% 이상 성장했다. 양적 팽창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성숙해서 다양한 와인들이 관심을 모았다. 2004년 와인의 양적·질적 성장에 큰 힘을 보태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과 칠레의 자유무역협정(FTA)이 그것이다.

초기 칠레 와인은 ‘값싼 와인’으로 국내에 알려졌다. 하지만 VVIP들은 신대륙 와인의 힘을 간직한 고급 와인을 맛보기 시작했다. 칠레 와인은 중저가 시장뿐 아니라 고급 와인 시장을 조금씩 점령했다. 그 선봉에 알마비바(Almaviva), 몬테스 알파 엠(Montes Alpa M), 그리고 에라주리즈(Errazuriz)의 와인들이 있었다. 몬테스 알파 엠은 칠레 대통령의 국빈 방문 때 만찬장에 오르며 명성을 떨쳤다. 칠레 최고가 와인인 에라주리즈의 와인들은 지금도 미국에서 병당 약 400달러에 팔린다.

칠레 와인과 함께 미국 와인들도 프리미엄 와인 시장을 넘보기 시작했다. ‘보르도 와인보다 더 보르도 와인’다운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와인들은 고급 와인에 익숙한 부유층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오퍼스 원(Opus One), 조셉 펠프스(Joseph Phelps),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 등이 대표주자들이다.

미국 컬트와인 마니아들도 생겨났다. 컬트와인은 한 해 생산량이 2만 병을 넘지 않고, 병당 가격이 최소 300달러를 넘는 와인이다. ‘누구나 맛볼 수 없는 한정된 수량’이라는 컬트와인의 특성은 부유층의 소비 성향과 잘 부합했다. 품질도 보르도 특1등급 와인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할란, 브라이언트 패밀리 등의 컬트와인은 들여오기가 무섭게 팔려나간다.

지속적으로 성숙하던 프리미엄 와인 시장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한동안 주춤했다. 경제 위기가 프리미엄 와인 시장에도 영향을 준 것이다. 금융 위기를 계기로 와인 시장에는 ‘가격 대비 퀄리티’를 중시하는 풍조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철형 와인나라 대표는 금융 위기 이후 지금까지 프리미엄 와인 시장의 특징을 “나라와 품종의 다양화, 올드 빈티지 선호”로 요약한다. 이 대표는 “프랑스 고급 와인들은 지금도 인기가 여전하다”며 “달라진 점이라면 VVIP들이 지금은 최소 10년 이상의 빈티지 와인을 마신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