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MESSAGE

봄을 타는 걸까. 중년 남성들이 갑작스런 멜로 눈물 반응에 당황해하며 클리닉을 찾아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성공한 중년 남성들의 고독과 눈물은 자유 경쟁사회의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오는 고독과 외로움이 아닐까 싶다. 외롭고 고독하니 따뜻한 멜로드라마의 감성 터치에 한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리라.

이제부터 삶의 가치를 바꿔보면 어떨까. 그저 앞만 보고 질주하는 삶이 아닌, 가족과 친구와 공유하는 삶으로.
멜로드라마를 보며 흘리는 남자의 눈물은 치열한 경쟁에 지친 감성의 피로 반응이다.
멜로드라마를 보며 흘리는 남자의 눈물은 치열한 경쟁에 지친 감성의 피로 반응이다.
이야기는 삶의 은유다. 현실적인 영화조차 사실은 은유적 상징의 압축체다. 이 압축성이 TV 드라마나 영화를 관람하는 우리의 인지 기능과 감성 몰입도를 최고조로 올려놓는다. 한 시간 반에 일평생 삶을 스캔할 수 있다. 좋은 영화는 우리를 주인공과 동일시하게 만들고, 그 캐릭터가 보이는 삶의 갈등과 감정에 초 단위의 강렬한 반응을 보이게 한다.

영화관에서 제일 왼쪽에 앉아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라. 시간의 축에 따라 움직이는 주인공의 감성 네트워크와 완벽하게 결합한 관객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삶과 꿈의 경계선상에 존재하는 현실과 환상의 융합체다. 현실의 상실과 상처를 채워주는 힐링이 영화에 있다. 실체적 진실에 집착하는 우리들이지만 사실 행복이란 솜사탕처럼 몽실몽실한 환상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성공한 중년 남성들의 고독과 눈물

“제가 액션물만 보고 사극만 보던 사람인데 요즘 아내가 보는 멜로드라마를 옆에서 곁눈질하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 나와 당황했어요. 선생님, 이거 병인가요?”

필자의 클리닉에 수컷 냄새가 물씬 풍기는 중년 남성들이 갑작스런 멜로 눈물 반응에 당황해하며 찾아오는데 그 숫자가 적지 않다. “선생님, 나이 들면 남자가 여성화된다는데 제 몸에 여성 호르몬이 많아져서 그런 것인가요?”

이처럼 자신의 성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느낌에 대부분 불안해한다. 여기에 이전보다 성적 기능이 떨어지는 경험까지 함께 하게 되면 그 불안은 삶과 죽음의 생존 수준에 이르게 된다. ‘나는 살아 있는가, 혹 죽어 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 말이다.

“난 당신이 목숨을 거는 것이 이상하오”란 하정우(북한 요원 표종성 역)의 질문에 한석규(국정원 요원 정진수 역)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일이니깐”이라는 대답을 한다. 최근 개봉한 ‘베를린’이란 영화의 한 장면이다. 정치적 모함에 모든 것을 잃고 사랑하는 아내 전지현(북한 통역관 련정희 역)마저 정적들에게 납치된 상황에서 하정우에게는 복수와 아내 구출이란 목숨을 걸 만한 충분한 동기가 영화 안에 녹아 있다.

그에 비해 한석규는 출세를 위한 승부욕도 없고 그렇다고 엄청난 애국심의 소유자도 아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하정우의 전지현 구출 작전을 돕는다. “그냥 하던 일이니깐 목숨을 건다”란 대사가 우리가 속한 시스템의 고독처럼 느껴졌다.

성공한 중년 남성들의 고독과 눈물은 자유 경쟁사회의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오는 고독과 외로움이 아닌가 싶다. 자유를 얻기 위해 인류는 끝없는 투쟁을 해왔다. 그래서 얻은 것이 현재의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이다.

인간의 자유에 대한 갈망은 역사를 통해 입증된바 타협할 수 없는 가치다. 여기에 자유경제 자본주의 시스템은 누구든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 주고, 우리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목표를 향해 끝없이 달려가게 했다.

우리는 완벽을 기대하나 아직까지 완벽한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진화적으로 가장 완성도 높은 현재의 사회 운영 시스템도 심리적 합병증을 일으키고 있으니,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와 그것으로 인한 외로움과 고독 증상이 그것이다. 외롭고 고독하니 따뜻한 멜로드라마의 감성 터치에 한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다.



삶의 스피드를 낮추고 주변을 바라보세요

자유의 친구는 고독함이다. 자유란 나의 가치, 나의 정체성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 책임을 함께 주기 때문이다. 정신의학에서 치료도 어렵고 자신과 주변에 끝없이 괴로움을 주는 질환이 있으니 ‘경계성 인격 장애’라는 어려운 이름의 성격 문제다.

이 질환의 핵심 정신 병리가 ‘자아 정체성의 흔들림’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고통’은 내 존재감의 상실이라는 불안과 통증을 가져온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혼자서 얻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얻어진다. 그 환자들이 보이는 병적인 자해 행동과 타인에 대한 분노 표출은 자신을 느끼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고 절규다.

우리 현대인들은 자아 과민의 상태다. 나를 찾기 위한 노력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고 있다. 나에게 집중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를 갖지 못하게 됐다. 우리가 경쟁 우위에 오르려고 하는 것, 달라지고 싶은 욕구는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관심을 얻고자 함에서이다.

그 관심의 상호작용 아래에 자신의 정체성이 따뜻하게 차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달라짐에 대한 욕구가 지나친 나머지 사람에게 지쳐가고 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들의 마음이다.

잠시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는 에너지의 흐름을 끊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에너지를 타인에게 보내고 다시 그 타인에게서 자신의 에너지를 보내는 선순환이 일어날 때 자아 정체성의 배터리는 충전되기 시작한다. 영국의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인간이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관심 어린 관찰”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사진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중에 보면 되지’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하는 사진기가 자세한 관찰을 방해한다는 생각에서다. 반면 데생을 학교 기본 교육에 넣을 것을 주장했는데, 몇 시간이고 지속적인 관찰을 필요로 하는 데생에 아름다움을 충전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의미심장한 주장이다.

삶의 가치 설정이 없는 질주는 관성일 뿐 본질적인 행복을 줄 수 없다. 우리를 외롭게 한다. 잠시 스피드를 낮추고 주변을 바라보자. 나의 가족, 나의 동료, 그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삶을 공유하자. 그 느린 여유에 내 정체성의 바늘은 삶의 만족을 향하게 된다.



photo by 윤대현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