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BUCKET LIST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중앙역에서 만난 어느 한국 여행자의 여행 스케줄 노트를 보니 분 단위로 짜여 있었다. 자그레브를 출발해 이스트라 반도의 여러 도시들을 거쳐 플리트비체 국립공원과 스플리트까지 이어지는 그의 스케줄은 숨 돌릴 틈 없는 이동과 이동의 연속이었다.

크로아티아를 처음 여행한다는 그의 얼굴은 이번 기회에 크로아티아의 모든 것을 다 보고야 말겠다는 결의로 가득 차 있었지만, 나는 그가 곧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계획이었는지 깨닫고 이스트라 반도 어디쯤에서 여정을 수정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여행자의 혼을 쏙 빼놓을 만큼 아름다운 도시들이 즐비했으니까.
아드리아 해의 달콤한 시간, 크로아티아 이스트라 반도 소도시 여행
하야오가 사랑한 마을, 모토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 ‘지중해의 낙원’. 이 수식어들은 아드리아 해를 일컫는 말이다. 길이가 800km에 이르는 아드리아 해는 슬로베니아 북부에서 이스트라 반도를 거쳐 알바니아까지 이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오르드 해안이다.

아드리아 해를 사이에 두고 이탈리아와 마주 보는 크로아티아는 빼어난 풍경과 온화한 기후 덕에 오래전부터 유럽인에게는 잘 알려진 여행지다. 쪽빛 바다와 대리석 건물, 붉은 기와지붕이 어우러진 크로아티아의 풍경은 여행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수도 자그레브나 아름다운 해안 도시 스플리트 등 크로아티아의 도시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은 어딘가 낯이 익다는 느낌 혹은 언젠가 와본 적이 있다는 기시감을 느끼곤 한다. 이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감독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작품들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중세시대 모습을 간직한 도시 포레치.
중세시대 모습을 간직한 도시 포레치.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보고 열광해왔던 ‘미래소년 코난’을 비롯해 ‘빨간 돼지’, ‘마녀 배달부 키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등 그가 만든 수많은 애니메이션이 크로아티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빨간 돼지’에서 돼지가 비행기를 타고 누비던 바다가 바로 아드리아 해이고,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 주인공이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던 곳이 두브로브니크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무대는 크로아티아의 국립공원인 플리트비체다.

이스트라 반도는 우리에게 그다지 알려진 지역이 아니다. 여행안내서에서 구할 수 있는 정보는 수도 자그레브와 두브로브니크, 그리고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정도다. 아직 한국인들에게는 미지의 지역으로 남아 있는데 그나마 조금 알려진 곳이 풀라(Pula)다.

이스트라 반도의 최대 도시이기도 한 풀라는 18세기 말까지 베니스, 합스부르크, 헝가리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시내 곳곳에는 원형에 가깝게 보존된 콜로세움을 비롯해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까마득한 절벽 위에 자리한 모토분.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델이 된 마을이다.
까마득한 절벽 위에 자리한 모토분.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델이 된 마을이다.
풀라와 가까운 모토분은 해발 277m의 절벽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다.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모토분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까마득한 절벽 꼭대기에 자리한 탓에 멀리서 보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모토분은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델이 된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은 아담하다. 천천히 걸어서 2시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다. 마을 인구는 약 1500명. 오래된 벽돌 건물 사이로 좁고 가파른 골목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이 좁은 골목을 옛날 자동차들이 부르릉거리며 돌아다닌다. 마을 아래로는 드넓은 포도밭과 올리브 밭이 펼쳐진다.

모토분은 푸아그라, 캐비아와 함께 세계 3대 진미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송로버섯으로 유명하다. 송로버섯은 인공 재배가 되지 않고 그 생산량도 아주 적어 ‘식탁 위의 다이아몬드’, ‘요정들의 사과’ 등의 애칭으로 불린다. 뛰어난 맛과 향으로 미식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5kg짜리가 2억 원에 경매된 적도 있다.
모토분에 자리한 송로버섯 가게.
모토분에 자리한 송로버섯 가게.
프랑스,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과 크로아티아 모토분에서만 나는데 땅 속에 파묻혀 있어서 사람 힘만으로는 채취하기가 어려워 냄새를 잘 맡는 사냥개를 앞세워 수확한다. 큰 것은 상황버섯처럼 생겼지만 콩알 크기에서부터 손가락 마디 크기, 어린애 주먹만한 크기 등 제각각이다.

물론 클수록 값이 더 나가며 흰색을 더 쳐준다. 값이 비싸니 작은 송로버섯이라도 말린 후 이를 갈아 파스타나 올리브유, 수프 등 각종 음식에 넣는다. 음식에 조금만 넣어도 ‘아, 송로버섯이 들어갔네’라고 알아챌 정도로 그 맛과 향이 상쾌하다.

운이 좋게도 모토분에서 송로버섯 요리와 테란이라는 품종의 와인을 맛볼 수 있었다. 송로버섯도 맛있었지만 와인도 독특했다. 평범한 와인이겠거니 했는데 풍부한 향과 맛에 깜짝 놀랐다.
독특한 풍미를 지닌 크로아티아 와인
독특한 풍미를 지닌 크로아티아 와인
독특한 향과 맛의 크로아티아 와인

이왕 와인 이야기가 나왔으니 크로아티아 와인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카페에서 커피만큼이나 즐겨 마시는 것이 와인이다. 크로아티아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유럽에선 꽤 유명한 와인 생산국이자 소비국이다.

크로아티아 1인당 와인 소비량은 약 35리터에 달하는데 이는 프랑스나 이탈리아보다 적지만 독일보다는 많은 양이다. 특히 1710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트라미나츠(Traminac) 와인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대관식에 오를 정도로 그 품질을 인정받는 명품이다.

크로아티아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와인이 생산된다. 내륙에서는 그라슈비나를 많이 재배하는데, 이 포도는 짙은 사과 향을 품은 것이 특징이다. 북서부 이스트라 지역은 이탈리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다.

여기는 고급 식재료로 사용되는 송로버섯이 많이 생산되기로 유명한데, 와인으로는 청포도 말바지아와 검은 포도인 테란으로 만든 것이 유명하다. 베니스 왕국 시절에는 이스트라 지역의 말바지아 와인이 최고로 인정받기도 했다.
크로아티아식 전채요리. 치즈와 햄이 가득 나온다.
크로아티아식 전채요리. 치즈와 햄이 가득 나온다.
딩가츠(Dingac)도 빼놓을 수 없다. 제네바협정에 의해 원산지가 보호되는 유럽의 유일한 포도밭이다. 여기에서는 검은 포도 플라바츠 말리를 재배하는데, 미국 와인의 얼굴 마담 진판델이 이곳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자그레브 서부에 위치한 플레시비차는 서늘한 기후대로 소비뇽 블랑, 샤르도네, 피노 누아르 등이 잘 자란다.

모토분에서 한 일은 2시간 동안 마을을 산책한 것과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 어느 야외 식당에서 와인과 송로버섯 요리를 천천히 즐긴 것이 전부다. 14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낯선 나라에 가서 한 일이 고작 그것뿐이냐고 비난한다면 할 말이 없다.

공중에 뜬 커다란 정원 같은 중세풍의 도시에서 이 세상 게 아닌 것 같은 골목을 산책하고 맛있는 요리와 와인을 맛보는 4시간. 때로 여행은 이 정도로도 충분히 행복하지 않을까 하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보는 수밖에는.
에우프라시우스 성당.
에우프라시우스 성당.
고대 로마의 흔적을 걷다

모토분에서 미니버스로 40분 정도 떨어진 포레치라는 곳도 흥미로운 도시다.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3세기에 기독교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오랜 세월 비잔틴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에선지 곳곳에 로마 건축물들과 중세 기독교 예배당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포레치 시가지를 걷다 보면 길에 깔린 반질반질한 돌에 눈길이 간다.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원형 그대로라고 한다. 데쿠마누스 거리와 유프라지이예바 거리가 당시의 거리인데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에우프라시우스 성당(Episcopal Complex of the Euphrasian Basilica)과 만난다.

성당은 고전적 요소와 비잔틴적 요소가 독특한 방식으로 잘 결합돼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바닥, 천장, 벽면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 그림들이 가득하다. 1997년 유네스코에 의해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이스트라 반도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두브로브니크에 비견될 만큼 아름다운 도시가 있다. 아드리아 해와 접한 로비니라는 도시인데 언덕 위 우뚝 솟은 유페미아 사원(Catheral of St Euphemia)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로비니를 상징하는 이 아름다운 건축물은 이스트라 반도에서는 가장 큰 바로크식 건물로 종탑의 높이가 57m에 달한다.
모토분에서는 아직도 몇십 년 된 자동차들이 돌아다닌다.
모토분에서는 아직도 몇십 년 된 자동차들이 돌아다닌다.
항구 도시답게 로비니 곳곳에는 여유로움이 넘쳐흐른다.
항구 도시답게 로비니 곳곳에는 여유로움이 넘쳐흐른다.
로비니 역시 모토분, 포레치 등 아드리아 해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느긋한 걸음의 산책이 어울리는 도시다. 아드리아 해의 찬란한 햇살은 붉은 테라코타 지붕 위로 폭포처럼 흘러넘치고 에메랄드빛 바다는 햇살을 튕겨내며 여행자의 시선을 어지럽힌다.

로비니를 여행하는 방법은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골목을 누비며 돌아다니는 것. 해산물로 유명한 곳이니 식당에서 바닷가를 바라보며 해산물 요리를 맛보는 것도 좋다. 상상해보시라. 당신은 지중해식 건물들이 늘어선 이국적인 골목을 걷고 있고 당신의 발등 위로는 사금파리 같은 햇살이 반짝인다.

그리고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코끝을 간질이는 짙은 에스프레소 향. 어떡해야 할까. 노천카페에 앉아 햇살과 정면으로 마주하든, 파스텔 톤의 건물 사이로 난 골목을 따라 정처 없는 산책을 즐기든, 바닷가 레스토랑에서 올리브유를 잔뜩 발라 구운 농어요리와 와인을 즐기든, 시간은 무조건 당신 편일 것이며 당신에게 한없이 너그러울 것이다.
로비니 기념품 가게
로비니 기념품 가게
plus info.

인천국제공항에서 크로아티아로 바로 가는 직항 편은 없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간 뒤 자그레브로 가야 한다. 루프트한자항공(www.lufthansa.com)을 이용하면 편하다. 크로아티아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크로아티아 관광청(http://croatia.hr)을 참조하자.

크로아티아의 화폐 단위는 쿠나(kuna). 1쿠나는 약 220원이다. 크로아티아는 지중해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가 번갈아 나타나 여름에는 덥고 건조하며 겨울에는 따뜻한 편. 5~9월이 여행하기 가장 좋다. 이스트라 반도는 크로아티아의 대표적인 와인 산지. 크로아티아 역시 유레일패스를 이용해 여행할 수 있다. 유레일그룹 홈페이지(www.EurailTravel.com/kr)를 참조하자.


최갑수 시인·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