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줄기차게 세우던 생활계획표. 은퇴 후에야말로 진짜 나를 위한, 나에 의한 생활계획표가 필요한 때다. 풍요롭기만 한 시간과 자유가 자칫하다가는 ‘늪’으로 변해버릴 수 있기 때문. 자, 그렇다면 은퇴생활계획표는 어떻게 짜야 할까. 그에 따르는 경제적 비용은 어떻게 책정해야 할까. A 씨의 생활을 따라가 보자.
[RETIREMENT PENSION] 하루 1만 원으로 즐기는 우아한 삶
몇 년 전에 은퇴한 A 씨. 그는 은퇴 초기에 게으름 피우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늦게 일어나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오늘은 누굴 만날까, 무엇을 할까 생각만 해도 그동안의 노고를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런 생활에 접어든 지 3개월을 전후한 시점부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간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A 씨는 TV와 친구가 됐다. 시간 죽이는 ‘소파맨’으로 전락한 것이다. 소파에 누워 리모컨만 만지작거리는 남편이 아내에겐 달가울 리 없다. 아내와의 깊은 불화가 있었던 어느 날 이런저런 회상에 젖어 있던 A 씨는 왕년의 잘나가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봤다. 그러자 아내는 물론 주변의 모든 것이 더욱 싫어졌다.

상념은 더 먼 과거로 미끄럼질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당시에는 그렇게 싫었던 학창시절의 생활계획표가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이거야!” A 씨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래, 지금부터 은퇴생활계획표를 만들어 실천하는 거야’라고 속으로 다짐하는 A 씨의 얼굴엔 비장감이 감돈다. 그것도 잠시. 다시 A 씨의 얼굴엔 난감함이 짙게 묻어나기 시작했다. 가족과 자식들 뒷바라지에 정작 자신의 노후 준비는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은퇴생활계획표 짜기에 돌입하다

다행히 A 씨에겐 현역시절 한 푼의 세금이라도 절약하기 위해 절세 상품으로 가입했던 개인연금과 회사에서 권해 마지못해 가입했던 퇴직연금이 있었다. 개인연금을 해지하지 않은 자신이 대견스럽고, 퇴직연금을 일시금이 아닌 연금으로 받기로 한 것은 참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국민연금에서는 매달 연금을 꼬박꼬박 챙겨준다. 이들 연금 삼총사야말로 은퇴자에겐 참 고마운 친구라는 느낌이 그때 처음 들었다. ‘그래, 이 돈에서 하루 1만 원만 나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자 A 씨의 얼굴엔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A 씨에겐 결코 적은 돈은 아니다.

A 씨는 구세주나 마찬가지인 생활계획표 수립에 착수했다. 하지만 곧바로 막막함이 밀려왔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때 은퇴하기 직전에 회사에서 주관한 은퇴 교육 프로그램에서 강사가 한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잘 모릅니다. 남에게 이런저런 코칭은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뭘 좋아하는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게 뭔지를 말이죠.”

A 씨는 강사의 말을 되씹어보았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그동안 A 씨는 “취미가 뭐냐”는 질문에 줄곧 ‘독서, 영화 감상’이라고 써 왔다. 입사지원서에도 그렇게 썼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동안 취미라고 하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독서와 영화 감상에 게을렀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의 취미는 면피용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래,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A 씨는 이렇게 다짐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유지할 자신감조차 희미해졌다. 그때 다시 강사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 어떤 일을 지속적으로 행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력이 약해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좀 지나면 누구나 지루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 지루함을 극복해야만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선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A 씨의 고민이 시작됐다. 은퇴 생활의 큰 방향을 정립해주는 근사한 캐치프레이즈 같은 것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여러 날에 걸친 치열한 고민 끝에 A 씨는 ‘하루 1만 원으로 즐기는 우아한 삶’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떠올랐다. 적어놓고 보니 정말 근사해 보였다. ‘하루 1만 원’은 넉넉지 못한 경제적 상황을 감안한 선택이었지만 ‘우아한 삶’이 그 아쉬움을 충분히 보완해줄 것으로 느껴졌다.
[RETIREMENT PENSION] 하루 1만 원으로 즐기는 우아한 삶
적은 돈으로 만족도 높은 삶을 사는 법

자신감이 충만한 A 씨는 어느 날 아내에게 ‘하루 1만 원으로 즐기는 우아한 삶’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아내의 반응은 싸늘했다. “1만 원으로 우아한 삶을 즐긴다고? 우아한 삶이 뭔지나 알고 말하는 거예요?” 듣고 보니 그랬다. 뉘앙스는 좋았지만 스스로도 우아한 삶이 뭔지 자신이 없었다. 인터넷에서 국어사전을 뒤지기 시작했다.

관련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종합해본 뒤, A 씨는 우아한 삶이란 적극적인 문화생활을 영위하는 삶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탄력을 받은 A 씨는 다시 문화생활이 뭔지 파고들기 시작했다. 문화는 영어의 ‘culture’나 독일어의 ‘Kultur’를 번역한 말로 ‘농사’ 또는 ‘육체와 정신의 돌봄’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라틴어 ‘cultura’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했다.

A 씨는 다음과 같은 답을 얻었다. ‘문화생활이란 럭셔리한 삶의 상징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육체와 정신을 돌보는 제반 행위가 아닌가! 육체를 돌보는 행위에는 운동만한 것이 없고, 정신을 돌보는 행위로는 독서와 예술 활동만한 게 없다. 여기에다 봉사활동과 친교활동 같은 사회적 활동을 덧붙이면 금상첨화이리라!’

이제 남은 것은 하루 1만 원으로 생활할 수 있는 주 단위의 생활계획표를 만드는 것이다. 대중교통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들을 찾아 나섰다. 멀지 않은 곳에 도서관, 수영장, 영화관 등이 있었다. 아침과 저녁은 집에서 먹고, 점심은 밖에서 해결하는 것으로 정했다. 육체와 정신을 돌보는 행위는 골고루 배치하기로 했다.

과거에 큰 고민 없이 취미활동이라 말했던 독서와 영화 감상을 주된 활동으로 삼기로 했다. 대학 다닐 때 즐겼던 기타 연주를 취미생활로 즐기기로 했다. 젊은이의 취향과 문화를 느끼기 위해 커피숍을 적극 이용하기로 했다. 아내와의 교감을 위해 TV 드라마 시청도 넣었다. 이렇게 일주일을 보내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6만2000원 정도였다.

지금 A 씨는 6개월 정도 이런 생활을 즐기고 있다. 자기만족은 최고다. 이제는 아내의 태도도 180도 바뀌었다. 가끔 함께 도서관에 가고 커피숍에서는 수다를 나누기도 한다.



일러스트 김영민
손성동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