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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과 마주하다, 일본 니가타의 ‘참 괜찮은’ 2월
일본 니가타(新潟)현을 찾은 날, 눈이 내렸다. 아니 퍼부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눈은 하염없이 쏟아졌다.

회색빛 하늘에서 내리는 새하얀 눈은 모든 사물을 지우려는 듯 맹렬했다.

공항에서 니가타현 유자와(湯澤)로 가는 길, 차는 곧 시미즈 터널로 들어섰다.

어두운 터널이 10여 분간 이어졌다. 터널의 길이는 무려 13km에 달했다.

그리고 끝이 없을 것 같은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
설국과 마주하다, 일본 니가타의 ‘참 괜찮은’ 2월
가와바타 야스나리, 그리고 ‘설국’

2월이다. 2월은 뭐랄까. 덤으로 얻은 것 같아서 좋고, 뭔가 심각하지 않아서 좋고,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않을 것 같아서 더 좋다. 그래서 2월엔 여행을 가는 거다. MP3에 좋아하는 음악을 가득 담고, 고전 소설 한 권 들고서 기차를 타는 거다.

우리가 덤으로 얻은 시간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도서관에 가는 것과 여행을 떠나는 것이니까. 그래서 니가타에 갔다. 비행기를 타고서 2시간을 훌쩍 날았을 뿐이지만 풍광은 너무나 달랐다.

먼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1899~1972)와 그의 소설 ‘설국’에 대해 이야기하자.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소설. 니가타는 그의 소설 ‘설국’의 무대다.
설국과 마주하다, 일본 니가타의 ‘참 괜찮은’ 2월
‘설국’은 눈에 파묻힌 적요한 산골 풍경과 남녀의 섬세한 심리를 아름답고 감각적인 문장으로 묘사한 일본 서정 소설의 고전. 소설은 무용 평론을 하는 주인공 시마무라가 휴양차 찾은 유자와 마을에서 만난 열정적 성격의 게이샤 고마코와 순진무구한 여성 요코 사이에서 벌어지는 삼각관계를 묘한 필치로 그려낸다. 가와바타는 이 소설로 1968년 일본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설국’은 가와바타 자신의 실제 경험담이기도 하다. 소설을 쓰기 위해 1934년 유자와 지역을 찾은 그는 온천장인 다카한 료칸에 머물면서 고마코의 모델이 된 열아홉 살의 게이샤 마쓰에를 만났다. 마쓰에는 당시 투숙객인 가와바타를 위해 아침마다 목욕물을 데우며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설국과 마주하다, 일본 니가타의 ‘참 괜찮은’ 2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가와바타는 이듬해 소설을 발표한 뒤 첫 교정지를 마쓰에에게 줬다. 당시 서른다섯이었던 가와바타가 소설처럼 마쓰에와 연애를 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녀에게서 소설적 영감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가와바타가 소설을 집필한 곳이자 소설의 주 무대이기도 한 다카한 료칸은 현대식 건물로 증·개축을 해 1930년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따로 기념관을 만들어 그가 묵었던 방을 그대로 재현해 두었다. 소설에서 묘사한 것처럼 ‘눈 내리는 계절을 재촉하는’ 화로와 ‘부드러운 솔바람 소리가 나는’ 교토산 쇠주전자가 고요한 눈의 나라에서 소설을 구상하던 가와바타를 떠올리게 한다.
장수마을로 유명한 무라스기 온천마을 풍경.
장수마을로 유명한 무라스기 온천마을 풍경.
따뜻한 온천에서 맛보는 일본 최고의 사케

중앙 해안선을 따라 길게 자리한 니가타는 그 모양이 마치 일본 열도를 그대로 축소한 것과 같다. 북서쪽으로 바다에 면하고, 남동쪽으로 연봉에 가로막힌 지리적 특성 때문에 겨울이면 산을 넘지 못한 수증기가 엄청난 양의 눈을 쏟아낸다. 겨울이면 2~4m의 눈이 쌓인다.

역설적이게도 니가타의 엄청난 눈이 니가타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눈이 녹아내린 물로 최고의 쌀을 길러 내고, 그 쌀로 청주를 빚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있는 일본의 쌀 품종 ‘고시히카리’가 생산되는 지역이 니가타다.
다나한 료칸에 재현된 가와바타가 묵었던 방.
다나한 료칸에 재현된 가와바타가 묵었던 방.
쌀이 좋은 만큼 사케도 최고다. 니가타의 별칭이 ‘일본의 부르고뉴’다. 양조장 숫자만도 96개에 달한다. 이는 일본에서 가장 많은 숫자다. 지난해 열린 일본 사케 경연대회 66개 입상작 가운데 31개가 니가타산 사케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구보타, 고시노 간바이, 하카이산 등도 니가타에서 생산된다.

좋은 사케는 10월 말쯤 출하되기 시작해 겨울을 보내고 초봄까지 이어진다. 매년 3월이면 창업 100년이 넘는 97곳의 양조장들이 에치고 평야에서 난 쌀로 빚은 술이 한자리에 모인다. 이렇게 새로 만들어진 신슈(新酒)를 소개하는 술의 제전을 ‘탄레이 사케(酒) 노 진’이라 부른다. 3월에 이곳을 찾으면 일본 술의 깊은 맛과 함께 다양한 풍류도 느껴볼 수 있다.
설국과 마주하다, 일본 니가타의 ‘참 괜찮은’ 2월
니가타는 눈이 녹아내린 물로 최고의 쌀을 길러내고 그 쌀로 청주를 빚는다.
니가타는 눈이 녹아내린 물로 최고의 쌀을 길러내고 그 쌀로 청주를 빚는다.
다양한 사케를 한자리에서 즐기고 싶다면 신칸센 에치고유자와역 2층에 자리한 혼슈칸이 제격이다. 니가타에서 생산된 100여 가지의 사케를 시음할 수 있다. 500엔을 내면 술잔과 5가지의 사케를 맛볼 수 있는 코인을 준다. 가장 인기 있는 술은 구보타, 2위는 고시노 간바이, 3위는 간추바이, 4위 하카이산, 5위 고시노 우메슈다. 시음 후 마음에 드는 사케를 구입할 수도 있다.

니가타는 일본 내 현 중에서 네 번째로 온천이 많은 곳이다. 니가타시 동편의 에치고 평야를 1시간쯤 내달리면 아가노시에 닿는다. 이곳에 1200년 역사의 무라스기 온천마을이 있는데 니가타에선 유일하게 라듐 온천을 갖추고 있다. 예로부터 무라스기는 장수마을로 유명한데 유명 의사가 배출되지 않은 이유가 건강 만점의 온천수 덕분이라는 이야기가 따라다닌다.
무라스기에서 맛본 산해진미.
무라스기에서 맛본 산해진미.
게이샤의 춤사위, 일본을 감각하다

니가타는 일본의 전통 문화를 그 어느 곳보다 잘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니가타시 근교 요코코시마치에 자리한 ‘북방문화박물관’은 에도시대 중기 일본 제일의 부농인 이토가(家)의 집을 박물관으로 꾸민 것이다.

2만9100㎡ 부지에 건평 3967㎡ 규모로 만들어졌는데, 나무로 지은 거대한 목조 가옥으로 성이나 사찰의 크기에 버금간다. 대저택에는 65개의 방과 5개의 다실로 둘러싸인 정원, 응접실, 고고자료실, 부엌, 선물가게 등이 들어서 있다. 이토 가문이 한창 번성했을 때는 지배인 78명에 소작인 2800명을 거느리고 쌀 창고 58개를 가진 데다 끼니마다 쌀 한 가마니로 밥을 지었다고 한다.
에도시대 중기 일본 제일의 부농인 이토가의 집을 박물관으로 꾸민 북방문화박물관.
에도시대 중기 일본 제일의 부농인 이토가의 집을 박물관으로 꾸민 북방문화박물관.
설국과 마주하다, 일본 니가타의 ‘참 괜찮은’ 2월
가옥 내부의 큰 마루에서는 게이샤 공연이 열리곤 한다. 니가타의 후루마치 지역은 에도시대부터 교토의 기온, 도쿄의 신바시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게이샤의 고장이었다. 근대 일본의 개항지이자 서해안의 물류 중심지인 니가타에는 일거리와 돈을 좇는 사내들이 몰려들었고, 이를 상대로 하는 게이샤 또한 번성했다. 목까지 희게 분칠한 어린 게이샤 둘이 춤을 추고 나이 지긋한 게이샤 둘은 사메센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른다. 지극히 형식적인 동작과 표정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시오자와주쿠의 보쿠시도리에도 가보자. 에도시대의 마을을 재현한 곳이다. 보쿠시도리란 건물 앞길에 지붕을 얹어 만든 일종의 아케이드로, 눈이 많이 오면 다닐 수 없는 큰길을 대신해 겨울철 마을의 이동 통로가 됐다. 길 중간에는 건물 벽과 눈 벽 사이로 뚫린 보쿠시도리의 옛 풍경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다.
큰 마루에서는 게이샤 공연이 열린다.
큰 마루에서는 게이샤 공연이 열린다.
가옥 내에는 고고자료실, 선물가게 등이 있다.
가옥 내에는 고고자료실, 선물가게 등이 있다.
니가타에서 맛보는 진정한 미식

니가타에 가서 ‘기와미’를 맛보지 않았다면 그 여행은 단연 ‘2% 부족’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기와미는 니가타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초밥 브랜드. 제철 생선으로만 만든다. 글자 그대로 ‘극한의 맛’을 낸다는 뜻이다.

보통 1인분에 6~8개가 나오는 다른 지역의 초밥과는 달리 기와미는 초밥 10개에 달걀말이까지 서비스로 나온다. 간장이 세 종류 나온다는 것도 이채롭다. 새우가 그려진 종지의 간장에는 새우초밥을, 오징어가 그려진 종지의 간장에는 오징어초밥을 찍어 먹는다. 나머지 초밥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종지에 담긴 간장에 찍어 먹으면 된다.
설국과 마주하다, 일본 니가타의 ‘참 괜찮은’ 2월
니가타 최고의 초밥 브랜드인 기와미.
니가타 최고의 초밥 브랜드인 기와미.
설국과 마주하다, 일본 니가타의 ‘참 괜찮은’ 2월
삼나무 그릇에 담겨 나오는 메밀국수인 헤기소바.
삼나무 그릇에 담겨 나오는 메밀국수인 헤기소바.
헤기소바도 유명하다. ‘헤기’는 일본어로 ‘삼나무’를 뜻한다. ‘소바’는 메밀국수. 그러니 헤기소바는 ‘삼나무 그릇에 담겨 나오는 메밀국수’다. 그런데 이 삼나무 그릇이 조금 독특하다. 우리가 흔히 보는 A4 절반만한 보통 소바 그릇이 아니라 A4 용지를 석 장쯤 겹쳐놓은 초대형 사이즈다.

그 위에 소바를 가득 얹어 나오는데, 얹는 방식 또한 특이하다. 1인분 분량을 한꺼번에 말아놓은 것이 아니라 한 젓가락으로 집을 수 있을 만큼씩만 나눠 담았다. 4인분의 소바가 큰 그릇 하나에 한 젓가락 분량씩 나뉘어 담기니 보기 좋을 뿐 아니라 먹기도 좋다.

2월, 덤으로 얻은 것 같은 2월. 창 밖으론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2월의 며칠은 아무렇게나 낭비해도 스스로에게 미안하지 않을 것 같아서 다다미방에서 화롯불을 뒤적이며 바쇼의 하이쿠를 읽는다. 사케를 마시고 초밥을 집어먹는다. 2월, 그래도 괜찮은 니가타의 2월이다.



plus info.
‘센베이 왕국’의 전통 기법.
‘센베이 왕국’의 전통 기법.
대한항공에서 인천~니가타 직항 편을 매일 운항한다. 2시간 소요. 서울과 같은 위도에 있지만 평균 영하 5도 안팎으로 춥지 않다. 그 대신 폭설이 자주 내린다. 소설 ‘설국’의 무대가 됐던 유자와 지역은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1시간 10분 정도 걸리며, 니가타시는 2시간 30분 소요된다. 1시간에 2대 꼴로 운행한다.

니가타는 센베이(쌀과자)도 유명하다. ‘센베이 왕국’에서는 지금도 전통 방식으로 센베이를 만들고 있다. 커다란 석쇠 위에 쌀로 반죽한 것을 수십 개 넣고 숙련된 기술자가 숯불 위에서 직접 구워낸다. 선물용으로 좋다. 무라스기 온천마을에는 원천수를 나눠 쓰는 료칸 8개가 있다. 조세이칸(長生館)은 이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하다.

무색, 무취의 온천수를 사용하는 이곳은 대욕탕과 족탕, 노천탕을 갖추고 있다. 이 중 설경 삼매경에 빠져 즐기는 노천탕이 백미. 삼나무와 바위 위에 수북하게 내려앉은 백설이 운치를 더해준다. 니가타에서는 스키를 즐겨보는 것도 좋을 듯.

니가타 내 스키장은 대략 60여 개 정도. 산을 낀 마을에는 으레 스키장이 들어서 있다. 이 중 묘코는 일본인 사이에서 ‘가장 일본다운 스키장’으로 손꼽힌다. 니가타현 관광협회 한글 사이트(www.enjoynigata.com/ko)에 스키장 정보가 나와 있다. 니가타현 한국사무소(www.nigata.or.kr)를 참조.


최갑수 시인·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