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하는 여자가 살림살이를 모으는 게 무슨 컬렉션일까 반문하는 이도 있겠다.
사실 그도 컬렉션을 위해 살림을 모으는 건 아니니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
그러나 ‘살림 멘토’ 이효재의 살림살이는 일상을 넘어 역사이니, 새삼 컬렉션의 의미를 따져 뭣하랴.
거실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은 큐브 식으로 된 상자 여럿을 붙인 것이다. 이 상자들은 연결해 파티 테이블로 쓰기도 하고, 각각 떼어 개인 테이블로도 활용하는 변신의 귀재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은 큐브 식으로 된 상자 여럿을 붙인 것이다. 이 상자들은 연결해 파티 테이블로 쓰기도 하고, 각각 떼어 개인 테이블로도 활용하는 변신의 귀재다.
3년 여 만에 다시 방문한 그 집은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집이란 게 원래 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는 게 보통이지만, 여염집과는 좀 다른 집이라 하는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숱한 창작물들이 끝도 없이 생성되는 만남의 장이자 요술의 공간인 그곳은 여전히 들고나는 발길들로 분주했다.

계절의 정취가 그대로 묻어나는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 현관문을 여니 복도에 나란히 늘어선 화사한 보자기 작품 컬렉션이 여느 때처럼 먼저 맞이한다. 한복 디자이너이자 보자기 아티스트인 이효재의 집임을 한눈에 알게 해주는 일종의 상징이다.

여기저기 쌓여있는 각종 살림살이와 도구들이 늘어난 것을 제외하면 달라진 것 없는 풍경이었다. 눈에 띄게 달라진 건 거실 창가 쪽으로 못 보던 옹기들이 사이좋게 늘어서 있는 광경. 뚜껑 손잡이 부분엔 역시 ‘효재식’임을 알려주듯 보자기가 둘러져 있었다. 지난 2010년 옹기엑스포 홍보대사가 됐을 때 보자기와 옹기를 소재로 전시를 한 적 있었는데, 그때 옹기 뚜껑 손잡이를 울긋불긋한 보자기로 감싸 단풍잎이 떨어진 장독대를 표현했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현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보자기 장식들. - 이효재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라고 말해주는 일종의 상징이다.
현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보자기 장식들. - 이효재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라고 말해주는 일종의 상징이다.
살림도구 수집은 일상다반사

그릇이며 도구며 각종 살림살이 ‘장비’에 욕심이 많은 이효재에겐 살림을 모으는 게 일상다반사다. 서울 삼청동 한옥에서 지금의 성북동 양옥으로 이사를 올 때 그릇만 100박스였다면 믿을 수 있겠는지. 그러나 30여 년 넘는 ‘살림의 역사’라고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몇 년 사이 족히 몇 박스는 더 늘었을 텐데, 신기하게도 그 많은 그릇들은 각각 다 제자리에 놓여 제 몫을 다하고 있다. 이 많은 것들을 어떻게 다 기억할까. 혹시 대부분 수집가들이 그러하듯 ‘보는 즐거움’을 위한 게 아닐까 싶지만 그는 손바닥 들여다보듯 각각의 위치를 기억하고 때에 맞춰 꺼내 쓴다. 정리를 잘하는 습관 때문이란다. 어떤 이는 전화를 하며 한 손으로 메모를 하듯이 그는 전화를 하며 한 손으로 끊임없이 정리를 하는 식이다.

“살림살이가 워낙 많아서 다른 사람들은 손을 못 대요. 사소한 것 하나도 내가 아니면 정리를 할 수 없다니까요. 우리 집에 있는 것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요. 한 100번씩은 옮겨본 후 비로소 ‘여기구나’ 하고 찾은 자리니 늘 그 자리에 있는 게 당연하죠.(웃음) 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살림살이를 훔쳐가기도 하는데 정말 속상해요. 그냥 단순한 살림살이가 아니라 역사가 있는 귀한 물건이거든요.”
거실 한쪽 여닫이 창문을 열면 귀한 다기들을 놓는 비밀 공간이 나타난다. 이 다기들은 배우 배용준의 팬들이 하나둘 선물해준 것. 배용준 씨가 책을 낼 때 도와준 게 인연이 된 덕분이다. 마음에 드는 찻장을 구하지 못해 임시방편으로 쓰던 공간이 이제는 관광객들이 와서 사진을 찍고 가는 대표적 공간이 됐다.
거실 한쪽 여닫이 창문을 열면 귀한 다기들을 놓는 비밀 공간이 나타난다. 이 다기들은 배우 배용준의 팬들이 하나둘 선물해준 것. 배용준 씨가 책을 낼 때 도와준 게 인연이 된 덕분이다. 마음에 드는 찻장을 구하지 못해 임시방편으로 쓰던 공간이 이제는 관광객들이 와서 사진을 찍고 가는 대표적 공간이 됐다.
그 종류도 굉장히 다양하다. 각종 그릇은 말할 것도 없고 찻잔, 소반, 대바구니, 도마, 칼, 냄비, 유기, 은식기 등 가히 박물관 수준이다. 그렇다고 딱히 근사한 장식장 안에 진열돼 있는 것도 아니다. 찬장에, 싱크대 서랍에, 거실 한편에, 심지어 창문과 창문 사이의 공간에 무질서한 듯 질서 있게 놓여 있다.

그런가 하면 마당은 자연 살림도구가 가득한 또 다른 보물창고다. 냅킨 대신 쓰이는 나뭇잎, 숟가락 받침 대용인 돌멩이,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자연 재료 포크와 이쑤시개까지, 간단한 상차림에도 받는 이들로 하여금 ‘황제 밥’이라는 감동을 주는 각종 자연도구들이 마당에 널려 있다. 물론 이 도구들을 가꾸는 이는 이효재, 그다.
집 안 곳곳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각종 그릇의 위치는 모두 그의 머릿속에 기억돼 있다. 정리를 잘하는 습관 덕분이다.
집 안 곳곳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각종 그릇의 위치는 모두 그의 머릿속에 기억돼 있다. 정리를 잘하는 습관 덕분이다.
사소한 것들이 가져다주는 즐거운 변화

그는 살림을 “가장 잘하는 일이자 즐거운 취미이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눠주는 소통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살림에는 도통 흥미라곤 없는 사람들도 이 집에 왔다 가면 한번쯤 살림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되는 건 그래서다.

살림이 즐거워진 데는 이처럼 수많은 살림살이들이 분명 큰 몫을 했다. 마당에 지천으로 널린 단풍잎을 주워 젓가락 꽂이에 뚝딱 꽂으면 그 자체로 훌륭한 소품이 되고, 특별할 것 없는 음식도 가장 잘 어울리는 그릇에 정성 가득 담아내면 일류 레스토랑의 메뉴 못지않게 되는 식이다.

“살림의 지혜죠. 살림살이 하나를 잘 쓰면 살림이 즐거워지는 변화를 불러온답니다. 살림은 즐겨야 하는 장르 같아요. 일생에 다들 일과 취미가 하나씩은 있잖아요. 누군가는 골프나 게임, 쇼핑 등을 즐긴다면 저는 집에서 뭔가 만들면서 꼼지락거리는 걸 즐기는 사람인 거죠. 그게 상품으로까지 발전한 케이스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저더러 골프를 치라고 하면 일로는 할 수 있겠지만 굉장히 힘들 거예요. 하지만 살림은 제가 가장 잘하고 오래했고 좋아하는 일이죠. 저는 과거에 정경부인이었다고 해도 제 손으로 살림을 했을 것 같아요. 남편과 아이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일, 그걸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있나요?”

살림을 즐길 수 있는 ‘비결’이 또 하나 있으니 집에 숨겨진 보물 같은 장소, 바로 만화방 덕분이다. 복도 맨 끝에 위치한 방에는 순정만화부터 무협지까지 온갖 만화책들이 가득하다. 외부인들에게는 잘 공개하지 않는 이효재만의 프라이빗한 공간.
만화광인 그에게 유일한 휴식처인 만화방. 만화를 훔쳐가는 이들이 많아 지금은 잘 오픈하지 않는다고.
만화광인 그에게 유일한 휴식처인 만화방. 만화를 훔쳐가는 이들이 많아 지금은 잘 오픈하지 않는다고.
“여기가 저의 휴식처예요. 이 방에 있을 때가 쉬는 시간이고 가장 마음이 편안하죠. 전에는 사람들에게 공개했었는데 자꾸만 만화책들을 훔쳐가서 이젠 오픈 안 해요.(웃음) 장르 불문하고 기본적으로 만화는 다 좋아하지만 그래도 순정만화가 최고죠. 순정만화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나오잖아요. 제가 비현실적인 세상을 좋아하거든요. 사실 살림을 할 때도 다른 별을 생각하고 상상하면서 해요.(웃음)”

때마침 그가 펼쳐든 만화책에서는 주인공이 연인의 무릎에 누워 쉬고 있는 평온한 장면이 나타났다. “어쩜, 나도 지금 휴식이 필요한데 하필 이럴 때 이런 장면이…. (웃음)”

숨고를 새도 없이 조금 있으면 또 이 집에선 지인들을 불러 모아 각종 연말 파티들이 줄줄이 열릴 것이다. 그의 보물 같은 살림살이들이 또 한 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The Collector] ‘살림 멘토’ 이효재의 살림도구들… 일상을 넘어 30년의 기록
글 박진영 기자 bluepjy@kbizweek.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