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리 시대, 기업의 퇴직연금 운용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그동안 기업들이 확정급여(DB)형 퇴직연금의 적립금을 원리금보장형 중심으로 운용해왔기 때문. 즉, 퇴직연금 적립금의 증가 속도는 둔화되는데, 퇴직급여 부채의 증가 속도는 빨라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퇴직연금 적립금의 자산 배분을 통해 자본이득을 축적해가는 성숙된 자세가 요구되는 요즘이다.
[RETIREMENT PENSION] 확정급여형 퇴직연금에 낀 먹구름
은행의 1년 정기예금 금리가 내리막길을 질주하고 있다. 올 들어서도 두 차례나 이뤄진 한국은행의 지속적인 기준금리 인하 때문이다. 기준금리의 인하는 내년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예금 금리 ‘2% 시대’의 도래가 예상된다.

저금리 기조의 심화는 가계의 이자 수입 감소는 물론 기업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DB형 퇴직연금을 도입해 운영 중인 기업은 적립금 운용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다. 그동안 기업들은 DB형 퇴직연금의 적립금을 원리금보장형 중심으로 운용해 왔기 때문이다.

2012년 8월 말 현재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약 54조9000억 원이다. 이 중 DB형에 가입돼 있는 적립금은 약 39조7000억 원으로 전체의 72.3% 나 된다. 39조7000억 원 중 원리금보장형 상품으로 운용되고 있는 금액이 무려 39조2000억 원으로 98.7%나 차지하고 있다. 실적배당형 상품으로 운용되고 있는 금액은 4583억 원으로 1.2%에 불과하다. 저금리임에도 불구하고 퇴직연금의 70% 이상이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묶여 있는 것이다.



퇴직급여부채 증가 속도 빨라져

은행의 예금 금리 수준이 퇴직연금에서 제공하는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금리와 같은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퇴직연금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금리 수준이 높은 편이다. 퇴직연금 시장을 선점하고자 하는 금융사 간의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퇴직연금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금리는 시중 금리의 하방 경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금융감독 당국에서는 2011년 11월부터 퇴직연금 시장에서의 고금리 과당경쟁을 막기 위해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금리를 공시하도록 하고 있다. 이 금리는 한 달에 두 차례 발표되고 있다. 이 공시 자료에 따르면 2011년 11월 1일에서 15일까지 퇴직연금사업자들이 공시한 금리는 평균 4.96%였다. 2012년 11월 1일에서 15일까지 적용되는 공시 금리는 3.95%로 1년 만에 1%포인트 정도 떨어졌다. DB형 퇴직연금 적립금을 원리금보장형 상품으로만 운용하는 기업의 경우 1년 만에 수익률이 20% 정도 하락한 것이다.

그러나 DB형 퇴직연금에서 제시하는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금리는 일반 예금 금리에 비해 여전히 80~100bp (100분의 1%) 정도 높은 편이다. 그러나 DB형을 운영하고 있는 기업이 이런 유혹에 넘어가 만족하면 안 된다. DB형 퇴직연금 적립금 수익률의 비교잣대가 되는 것은 일반 예금 금리가 아니라 퇴직급여부채의 증가율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퇴직연금제도에서 퇴직급여부채는 임금인상률과 할인율에 영향을 받는다. 할인율이 고정돼 있다고 했을 때 임금인상률이 높아지면 기업이 부담해야 할 퇴직급여부채는 늘어나기 마련이다. 퇴직연금에서 문제는 적립금의 운용수익률 대비 임금인상률의 상대적 크기다. 운용수익률이 임금인상률보다 높으면 퇴직연금제도는 흑자라고 할 수 있다.

퇴직연금제도 도입 이후부터 2011년까지는 거의 이런 상태를 유지해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통계청에서 발표하는 ‘가계동향조사’의 2인 이상 도시 근로자 가구의 임금상승률은 7% 이하를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퇴직연금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금리는 고금리 경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기업에서 꽤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그러나 작년부터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2011년에 임금상승률은 5.5%였는데, 같은 해 11월 초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공시 금리는 평균 4.96%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를 전후해 남는 장사에서 손해 보는 장사로 바뀌었을 공산이 크다. 게다가 퇴직급여 회계기준에서는 퇴직급여부채를 산정할 때 할인율을 적용하도록 요구하고 있는데, 저금리 상황하에서는 할인율의 기준이 되는 국고채 수익률이나 고등급 회사채 수익률 역시 떨어지기 마련이다.

저금리 현상으로 인해 퇴직연금 적립금의 증가 속도는 둔화되는데, 퇴직급여부채의 증가 속도는 빨라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DB형 퇴직연금을 운영하고 있는 기업에는 자산과 부채 양 방면에서 충격이 가해지고 있는 셈이다. DB형 퇴직연금에 먹구름이 끼였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DB형 퇴직연금에서 부채는 부담금을 납입할 당시에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원리금보장형 상품만으로는 이러한 계산 착오에 대응하기 힘들다. DB형 퇴직연금을 운영하는 기업들은 이러한 것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



퇴직연금 적립금 자산 배분해야

문제는 이뿐이 아니다. 금융사와 상장기업은 국제회계기준(IFRS)에 따라 퇴직연금 플랜의 손익을 기업 본체의 재무제표에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퇴직연금에서 손실이 발생하면 기업의 성과를 갉아먹게 되는 것이다. 아직은 초기 단계라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그 규모가 크지는 않겠지만, 만일에 퇴직연금에서 큰 손실이 발생한다면 기업의 수익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주가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되고, 나아가 기업의 자금 조달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퇴직연금이 발달한 선진국에서 DB형을 동결 또는 폐지하고 확정기여(DC)형으로 전환하는 큰 흐름 뒤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DC형에서는 퇴직급여 부채를 산정해 기업의 재무제표에 반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퇴직연금 외적인 요소에 의해 발생하는 저금리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DB형 퇴직연금이 기업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우리나라의 DB형 퇴직연금이 저금리 심화의 직격탄을 받는 이유는 앞에서도 잠시 살펴본 바와 같이 적립금의 거의 대부분을 확정금리형 상품으로 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난 것일까. 그동안은 이런 운용 전략이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리라.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원리금을 보장받는 운용 방식이 ‘따먹기 쉬운 과일’이었던 셈이다.

타일러 코웬(Tyler Cowen) 미국 조지메이슨대 교수는 그의 저서 ‘거대한 침체’에서 최근 미국 경제의 침체가 구조적 현상 때문이라고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은 계속해서 쉽게 따는 과일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사회경제적 제도를 이루어 왔으나 이제 그런 과일은 대부분 사라졌다.” 단적으로 말해 그동안 미국은 ‘따먹기 쉬운 과일’이 풍부해 고성장을 구가해왔는데, 이제 더 이상 그 과일을 쉽게 딸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DB형 퇴직연금을 도입한 우리나라의 기업들 역시 코웬 교수가 말하는 ‘따먹기 쉬운 과일’의 단맛에 길들여져 있는 것은 아닐까. 저금리 시대에 고금리의 원리금보장형 상품이라는 단맛을 말이다. 굳이 이런 단맛을 마다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DB형 퇴직연금의 운영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기업에서 DB형 퇴직연금을 운영하는 목적은 합리적인 리스크하에서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퇴직급여부채를 적립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선진국 기업들은 오래전부터 퇴직연금 적립금의 자산 배분에 많은 공을 들여왔다.

DB형 퇴직연금에서 부채는 부담금을 납입할 당시에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근로자가 퇴직할 시점의 평균 임금에 따라 달라지는 유동적인 부채다. 원리금보장형 상품만으로는 이러한 계산 착오에 대응하기 힘들다. DB형 퇴직연금을 운영하는 기업들은 이러한 것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 퇴직연금 적립금의 자산 배분을 통해 자본이득을 축적해가는 성숙된 자세가 요구되는 요즘이다.



손성동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