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영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런던에서 바삐 잡아탄 택시의 운전기사는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 며칠 전 오픈한 전시가 환상적인데 보았느냐”고 운을 떼더니, “지난 밤 소더비 경매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이 최고가에 낙찰된 것은 정말 대단했다” 등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일종의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가 특이한 택시 운전사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영국 문화의 자부심을 상징하듯 볼거리 많은 미술관과 길게 늘어선 관광객과 일반 관객을 보며, 문화선진국 영국의 저력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문화 한류가 이슈인 요즘, 우리나라 미술계 상황은 선진국에 비해 어떠한지 궁금해지는 타이밍이다. 국내 미술계는 몇 년째 그야말로 태풍이 강타하고 있다. 경기 불황에서 자유로운 업계는 없을 테지만, 최근 몇 년만큼 ‘미술품’에 오명이 단단히 덧씌워진 때도 드물다.

각종 비리와 탈세에 미술품이 교묘히 악용된 사건을 접하며 미술품에 담긴 예술가의 열정이나 순수미술 본래의 가치는 무시되고 왜곡된 채 검은돈의 은신처, 혹은 있는 자들의 허세를 위한 사치품이라는 오해만 커지는 것 같아 씁쓸하고 안타깝다.

예술은 인간의 삶에 반드시 필요하며 ‘창조’와 ‘치유’라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순수미술의 이런 가치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순수미술이 사회에 기여하는 가치의 크기에 대해 의문하는 이는 있을 것이다.

사회에 가져다주는 경제적 가치로 볼 때 부자들만의 자산 증식 수단쯤으로 여겨지는 미술품이 과연 일반 국민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라는 의문 말이다. 선진국의 미술산업 전반을 보면 우리가 선진국만큼 순수미술의 가치와 효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문화예술 강대국인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의 미술계 역시 자생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다. 1만6000여 개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보유하며 전후 문화선진국으로 우뚝 선 미국이나 1980년대 말 이후 데미언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등 yBa(young British artists·영국의 젊은 예술가)를 배출해낸 영국은 순수미술의 공공재적 특성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공공적 차원의 정책적·제도적 지원에 힘써왔다.

수준 높은 미술관의 육성과 운영을 위한 정부의 탄탄한 재정적 지원과 미술관의 퀄리티 유지를 위한 인증·관리제도의 설립, 민간 참여를 통한 효율적 운영을 위한 파격적인 세제 지원 등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순수미술의 공공재 개념에 대한 인식이 약한 우리나라 미술계의 사정은 현재 많이 낙후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11년 발표된 전 세계 18개국에 산재한 세계 100대 미술관 집계에 국내총생산(GDP) 순위 15위인 한국은 포함된 바가 없다.

2010년 기준 우리 미술 시장은 전체 4800억 원 규모로 추산되는 매우 작은 규모이며, 국내 미술관 수는 140개를 겨우 넘고 이 중에 반 이상은 2000년 이후에 생긴 미술관으로 국제적 수준에 맞는 수준 높은 미술관은 손에 꼽힐 정도로 우리나라 미술관 역사는 짧다.

경제규모에 비한다면 우리나라 미술관 현실은 더더욱 부끄러운 수준이다. 인구당 미술관 수가 절대 부족할 뿐 아니라 외국의 유명 미술관에 비해 콘텐츠가 상당히 부실해 대부분의 국민이 사실상 문화예술 분야에 있어 소외계층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상황은 낙후돼 있지만 희망은 있다. 특히 콘텐츠적인 측면에서 우리 미술계의 미래는 밝다. 해외 미술관계자들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시대를 꿋꿋이 살아오며 자신의 예술을 쌓아온 한국 근현대 작가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프랑스 현대미술관 생테티엔느의 로랑 헤기 관장은 한국 미술의 정신성과 깊이 있는 내면성에 대해 특히 주목하는데 지나치게 기술지상적인 일본이나 진부해 보이는 중국의 경향과는 또 다른, 서양 어느 미술사의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 한국 특유의 작품 세계를 갖고 있는 작가들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또 미술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미술계를 꾸려가고 있는 인재들의 근성과 잠재력은 척박한 미술계를 이끌어가는 원천이자, 앞으로 우리 미술계의 무한한 발전을 상징한다.
[CEO 칼럼] 공공재로서의 순수미술
조정열 갤러리현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