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원의 남자 옷 이야기
남성복 비즈니스를 시작한 후 지난 20여 년간, 1년에도 몇 번씩 수시로 찾아가 머무는 곳이다 보니 이제 밀라노는 마치 서울의 한 곳처럼 자연스럽다. 보통은 출장길에 오르기 전 어디로 갈까 고민을 하는데, 밀라노는 늘 빼놓지 않고 방문하는 도시다. 이번에는 특히 큰 패션행사인 ‘밀라노 우니카(Milano Unica)’가 있어 더더욱 고민할 것도 없이 스케줄을 잡고 새 시즌에 대한 기대를 안고 밀라노로 향했다.
밀라노 우니카는 세계에서 가장 큰 종합 패션 소재 전시회로 매년 봄·여름(SS)과 가을·겨울(FW) 두 번에 걸쳐 진행된다. 우니카는 소재 전시회지만 연이어 가죽과 구두, 액세서리 등의 전시회(MICAM·MIPEL) 등이 마련되는 소위 ‘밀라노 패션위크’가 개최되기 때문에 이 기간 밀라노는 세계 패션인들의 점령지가 된다. 이 모습이 또한 밀라노가 세계 패션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큰 증거다.

이데아 비엘라는 고급 섬유산업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북부 비엘라 지역의 섬유업체들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전시관으로, 초청장을 지닌 바이어만 입장이 가능하다. 그 덕분에 다른 전시관들에 비해 입장한 후 보안에 대해 조금은 마음을 놓고 미팅과 관람에 집중할 수 있다. 또한 뷔페식의 점심식사(그것도 공짜라기엔 몹시 질이 좋은)도 제공받으니 이 전시회 중에서 제대로 특별 고객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곳이다.


트렌드로 다시 돌아가서(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정신이 팔리니 전시장에서는 어땠겠는가), 우니카에서 만난 조금 더 실용적이고 실험적인 2013년 FW 정장 슈트 트렌드는 라이트 그레이 계열이 강세를 띤다. 그러나 이탈리아인들이 좋아하는 새파란 슈트, 일명 아주로(azzuro) 색상 또한 유행이다.
바지 길이는 종전의 짧은 바지 일색에서 조금은 더 자유로워진 것을 공통점으로 들 수 있겠다. 밀리터리 룩과 헌팅 웨어를 응용한 시티 웨어도 많이 눈에 띄며,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런던 풍의 균형을 강조하는 라인과 멀티 체크 멜란지, 변형된 스트라이프도 많이 선보였다. 국제적인 불황에서 야기된 불안정한 심리와 긴장 상태를 풀기 위해서일까.
슬림하고 꽉 조이는 느낌의 실루엣이 조금은 편안해 보이는 라인으로 변모하며 더욱 다양한 스타일을 탄생시켰다. 밀라노 우니카는 아무래도 패션 전문가들 위주의 전시회이기 때문에 피티 우오모에서 느낄 수 있는 낭만(?)은 다소 떨어진다. 하지만 하이패션을 가늠하기에는 제격인 장소다.

‘쟁이’들과의 비즈니스를 빨리 마무리하고 나와서 비아 제수(Via Gesu)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비아 몬테나폴레오네(Via Montenapoleone)와 비아 델라 스피가(Via Della Spiga)를 연결하는 조금 한적한 이 거리는 밀라노에서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포시즌스(Four Seasons) 호텔과 구두 브랜드인 실바노 라탄치(Silvano Lattanzi)와 산토니(Santoni), 의류 브랜드인 질리(Zilli), 키톤(Kiton), 브리오니 테일러(Brioni Taylor), 고급 향수 브랜드인 아쿠아 디 파르마(Acqua di Parma) 등 그야말로 ‘럭셔리’한 남성 브랜드들의 비스포크 라인이 많고 최신 제품들의 유입과 전시가 빨라서 구경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쉽고 즐겁게 쇼핑을 하기엔 너무 높은 가격대이기 때문에 주로 윈도쇼핑을 할 수밖에 없지만, 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상점들은 가끔 한 번씩 이성의 끈을 놓고 지름신을 내리게 만들기도 한다. 이 길에서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운 구경거리이자 행운이라 한다면 중간에 있는 포시즌스 호텔에서 파티가 열릴 때라고 할 수 있다. 파티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차림은 과장 없이, 보는 이들의 넋이 빠지게 하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이름은 다소 생소하나 밀라노를 한 번이라도 방문한 사람은 무의식중에 꽤나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되는 거리다. 두오모 옆으로 나 있는 이 대로(大路)에는 명품 매장과 맥도널드,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하수구 등으로 유명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와 이탈리아어로 ‘르네상스’라는 의미의 라 리나센테(La Rinascente) 백화점, 그리고 수많은 로드 숍과 레스토랑들이 즐비하다. 참 재미있는 사실은 이 길에 자리하고 있으니 자라(ZARA)와 에이치앤엠(H&M)도 명품 같다는 것이다. 특히 자라는 세계 최고인 듯하다.


브랜드 구성도 놀랍다. 지방시, 발망, 발렌티노, 베르수스, 아크네 등의 럭셔리 브랜드부터 닐 바렛, 마크 제이콥스, 톰 포드, 제냐, 랄프 로렌 등의 디자이너 브랜드, 리바이스, 칩먼데이, 반스, 랭글러 등 저가 브랜드까지 고르게 입점돼 있으며 보기 좋게 진열돼 있다.
남자가 여자 못지않게 행색을 잘 갖추고 다니는 이 도시에 있으면 내가 남자인 게 다행이다 싶다. 1년에도 몇 번씩, 너무 자주 가는 곳이지만 그래도 또 가야 할 것만 같은 숙명적인 느낌이 있다.

대한민국 핸드메이드 남성복의 아이콘 ‘장미라사’의 대표. 옷이 좋아 옷을 맞추고, 입고, 즐기고, 선물하는 재미에 365일 빠져 있는 사르토리알이다. 내 집 드나들 듯 한 덕에 유럽은 눈감고도 다닐 수 있다는 그는 옷이 곧 문화라는 철학으로 한국 수제 남성복의 자존심을 지켜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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