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Balance

중앙정보처리학원과 중앙디자인아트스쿨 등을 거느린 중앙그룹의 정상은 회장은 30년 넘게 캔버스 앞에 섰다. 그림을 그리면서 사업에 관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그를 서울 대현동 사옥에서 만났다.
정상은 중앙그룹 회장 “그림은 스트레스 해소용이자 사업 아이디어의 보고”
정상은 중앙그룹 회장이 대학 졸업 직후인 1969년 국내 최초 정보기술(IT) 교육기관으로 문을 연 중앙정보처리학원. 학원이 들어 있는 중앙빌딩 8층 회장실 입구에 들어서자 소녀상 등 그림이 기자를 맞았다. 비서의 안내로 들어선 회장실은 크고 작은 그림들로 빼곡해 마치 전시를 앞둔 화랑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응접탁자 옆 창가에는 작은 화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사업에서 손을 뗐지만 얼마 전까지 정 회장은 학원을 비롯해 테마놀이공원, IT사업 등 여러 사업을 했다. 그러다 보니 그림 그릴 시간이 항상 부족했다. 틈나는 대로 그림을 그릴 심산으로 사무실에 자그맣게 화실을 차렸다.



오탁근 전 검찰총장의 권유로 시작한 그림

정 회장이 그림에 입문하게 된 것은 15대 검찰총장을 지낸 오탁근 총장 덕이 컸다. 오 전 검찰총장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공대를 나온 컴퓨터 전문가였다. 대부분의 국민이 컴퓨터의 ‘컴’자도 모르던 1960년대 후반 컴퓨터 전문가였던 그는 대학 졸업 후 중앙정보처리학원을 세웠다. 24세에 차린 학원은 컴퓨터를 배우려는 학원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 덕에 그는 서른도 되기 전 현재 빌딩을 매입해 학원 규모를 늘렸다.

컴퓨터라는 신기한 기계에 많은 이들이 열광하던 때였다. 그는 사세를 넓히는 한편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각 언론사에 컴퓨터 관련 칼럼도 기고했다. 사회 저명인사들이 그의 칼럼을 유심히 봤는데, 당시 검찰총장이던 오 총장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대검찰청 검사들을 대상으로 컴퓨터 교육을 하게 된 것도 오 전 검찰총장의 추천 덕이었다.

“교육 5분 전에 도착해서 꼭 티타임을 가질 정도로 저한테는 아버지처럼 잘 해주셨어요. 그분이 미술을 좋아하는데, 그림도 굉장히 잘 그렸습니다. 그분이 한번은 전시회를 갔다가 그림에 탄복해 작가 작업실까지 가게 됐는데, 우연히도 그 작가의 작업실이 제 건물에 있었습니다. 건물을 산 후에 학원 하려고 나가라고 했는데, 돈이 없어 못 나간다기에 그냥 있으라고 한 바로 그 작가였던 겁니다. 그 며칠 후 저도 그림을 그리라고 하시더군요.”

그때까지만 해도 정 회장은 그림을 그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며칠 후 오 전 검찰총장이 아내와 함께 다시 그를 찾았다. 손에는 위스키병이 들려있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다시 그림을 강권했다. “함께 야외 스케치도 다니자”며 정 회장을 몰아붙였다. 그래도 내켜하지 않자 오 전 검찰총장은 “한 달 안에 한 점을 완성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상은 중앙그룹 회장 “그림은 스트레스 해소용이자 사업 아이디어의 보고”
마음을 순화시키는 최고의 방법, 그림 그리기

어떤 때는 그가 직접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반은 그가, 나머지 반은 작가가 그리기도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게 한 점을 완성하고 났더니 그렇게 뿌듯하더란다. 그 뒤로 정 회장은 작가에게 개인 지도도 받고, 소재도 제공받으며 그림에 몰두했다.

“하다 보니까 그림이 마치 아편 같습디다. 며칠만 붓을 놔도 손이 근질근질하고, 토요일은 숫제 밤샘 작업을 하게 되고…. 그림을 그리면서 골프도 그만뒀어요. 시간이 아까워서 그 시간에 그림을 그리려고….”

처음에는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그림을 그렸다. 지금처럼 마음이 편안해 그림을 그리고 싶은 때가 많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업무 보고를 받다 보면 화가 주체가 안됐다. ‘1초의 분노, 60초의 여유’라는 말이 있지만, 실천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럴 때면 캔버스 앞에서 붓을 잡았다. 드넓은 하늘에 산도 그리고 나무도 그렸다. 눈이 아플 때 하늘을 쳐다보면 눈이 편안해지듯 캔버스에 녹색과 청색을 칠하다 보면 마음이 편해졌다.

“그림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름다움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자연 마음이 순화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죠.”
그림을 그리며 사고가 무척 유연해졌다는 정상은 회장.그는 그 유연함이 사업에 큰 도움을 줬다고 말한다.
그림을 그리며 사고가 무척 유연해졌다는 정상은 회장.그는 그 유연함이 사업에 큰 도움을 줬다고 말한다.
발상의 전환은 그림처럼 혁명적으로

그림은 사업에도 큰 도움을 줬다. 1947년생인 정 회장은 자신의 세대가 근면하고 성실한 반면 사고의 유연성이 부족하다고 평했다. 원리, 원칙을 중시하기 때문에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사고의 유연함을 얻었다.

틀에 갇히면 좋은 그림은 나오기 어렵다. 밤풍경을 그리다 보면 실제보다 달을 크게 그려야 하고, ‘푸른 하늘 은하수’라고 하지만 하늘도 주변 색에 따라 다양한 색으로 표현해야 한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왜곡도 많이 해야 하고, 엉뚱한 시도도 많이 하게 된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틀만 고집하면 항상 고만고만한 결과에 만족해야 한다. 죽기 살기로 하면 중간은 가겠지만 업계를 선도할 수는 없다.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다. 대표적인 게 잡지 사업이었다. 컴퓨터로 사업을 일군 그는 1990년대 월간 컴퓨터를 시작으로 게임 월드, 오픈, 쉬즈 등의 잡지사업에 뛰어들었다. 그중 게임 월드와 쉬즈는 당시 잡지 시장을 선도하며 그에게 큰 성공을 안겨줬다.

“컴퓨터산업에 기여하기 위해 월간 컴퓨터를 창간했는데, 하고 보니 돈 되는 잡지를 만들고 싶더군요. 그래서 오픈(OPEN)이라는 여성지를 창간했는데, 8개월 만에 60억 원을 까먹고 문을 닫았어요.”

정 회장은 오픈의 실패 원인을 자신의 ‘고지식함’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여성지들은 대부분 연예인들의 가십기사를 다루었다. 반면 오픈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사생활을 까발리는 기사는 절대 쓰지 마라”는 그의 지시를 따랐다. 그 결과 대규모 적자만 남긴 채 사라졌던 것이다.

이대로 잡지를 그만둘까 고민하던 순간 정 회장은 붓을 잡았다.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생각했다. 한때 전국에 13개 캠퍼스, 학원생만 2만여 명이던 중앙그룹 회장으로 여성지를 그만두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가르치는 직업에 있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가 크게 나쁜 짓은 못한다는 겁니다. 가십기사를 못 쓰는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일단 쉬즈를 창간하기로 하고 편집회의를 했어요. 당시에는 맛집 기사를 쓰면 연락처나 소재지를 안 쓰는 게 일반적이었거든요. 그걸 바꾸기로 했습니다. 독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는 있는 그대로 알려주자는 거였죠. 계절별 패션 스타일을 제안하면서도 어디서 얼마에 옷을 구입할 수 있는지 정보도 함께 넣었어요. ‘모든 기사는 여성이 아름다워질 수 있는 방향으로만 기사를 쓰라’고 했어요. 그게 요즘 말로 대박이 났습니다.”

디자인이 받쳐주지 않는 너절한 광고도 걷어냈다. 예쁘지 않으면 패션 광고도 받지 않았다. 책의 볼륨을 줄이는 대신 광고료를 올렸다. 부수도 한정판만 발행했다. 그랬더니 발행 하루 이틀 만에 책이 모두 판매됐다.
그림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름다움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자연 마음이 순화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죠.
그림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름다움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자연 마음이 순화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죠.
매번 새로운 소재에서 얻는 즐거움

그림은 학원 운영에도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당시 학원은 6개월 과정으로 운영됐다. 컴퓨터는 수학과 같아서 1차 함수를 모르면 2차 함수를 배울 수가 없다. 하루 2시간 강의를 들으면 집에서 4~5시간을 복습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날 수업을 들을 수 있다.

같은 방식으로 1개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나갈 수가 없다. 3개월까지는 그럭저럭 따라오는데 4개월이 되면서 탈락하는 원생이 늘었다. 탈락률이 늘어나면 그만큼 학원 수입에 지장을 초래한다. 주말 특강 등을 하며 진학률을 높이기 위한 학원들 간 경쟁이 치열했다.

정 회장은 그때도 그림을 그리면서 해결책을 찾았다. 당시는 음화(네거티브 이미지)를 그릴 때였는데, 음화처럼 반대로 생각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했다. 진학시키려고 애쓰지 말고 반대로 못 따라오는 원생을 제적시키자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한 달에 3번 이상 결석하면 제적, 일주일 시험을 못 봐도 제적시키는 것이었다. 숙제도 무자비하게 내줬다. 그랬더니 제적을 당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고, 결과적으로 90% 이상 진급시킬 수 있었다.

많은 기업들이 개혁하고 사고를 전환하라고 하지만 실제로 나중에 보면 변하는 것은 거의 없다. 정 회장은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처음부터 혁명적인 발상을 해야 겨우 조금 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림이 항상 사업과 연관된 것은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그 자체에서 얻는 즐거움도 크다. 그동안 그는 모래사장도 그리고 나무나 풍경도 그렸다. 최근 2년은 물결을 주로 그렸다. 어떤 이는 한 가지만 그리는 게 좋다지만 그는 새로운 소재를 다루는 게 재밌다.

“그림이란 친구를 사귄 것도 저에게는 큰 즐거움입니다. 화가들도 많이 사귀고, 작품도 많이 사줬고요. 우리나라 화가들 중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많거든요. 작업실 가서 힘든 거 보고 어떻게 그냥 나옵니까. 그렇게 한두 점 사다 보니까 미술관 하나 차릴 정도로 그림을 모으게 됐네요.”

정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학원 운영에만 관여하지만 지금도 영감이 떠오르면 밤을 새워 작업한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정 회장은 마치 30여 년 전 오 전 검찰총장이 그랬던 것처럼 기자에게 “일단 붓을 잡으라”고 권했다. 그러면서 그림만큼 좋은 취미도 없다고 했다.


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