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는 감각과 욕망의 제국이다. 광장에는 역사가 깃들고 골목엔 삶이 녹아있다. 새벽 6시 어김없이 빵집이 열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긴 바게트를 옆구리에 끼고 나온다. 프랑스 사진작가 윌리 로니스(Willy Ronis·1910~2009)가 15년 동안 미국 뉴욕에 살다가 파리로 다시 돌아와 가장 파리다운 모습을 담아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른 ‘어린 파리지앵’은 다름 아닌 바게트를 끼고 달리는 소년의 천진함과 행복이었다. 바게트는 파리 아침의 일상이다. 파리는 그렇게 하루를 시작한다. 예술과 자본의 힘
생 라자르 기차역으로 가는 길 프랑스의 자존심 프랭탕 백화점이 온통 빨간 땡땡이 천지다. 일본의 설치작가 쿠사마 야요이(草間彌生·1929~)가 루이비통과 협업해 매장을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설치작품이다.
백화점 윈도는 감각과 욕망을 넘나드는 자본주의 패션의 첨단이다. 전시장 핏빛 땡땡이가 눈에 확 들어온다. 어설플 것 같은데도 쿠사마의 펌킨 작업이 눈에 익어 금방 눈에 든다. 브랜드를 예술과 접목하고 디자인하는 일은 다반사지만 쿠사마의 땡땡이와 루이비통의 매칭이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전통적 유럽 문장과 기호, 그리고 브라운 색조의 루이비통 문양에서 갑자기 흰 바탕에 빨강 땡땡이 루이비통을 연상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미감을 보는 맛이 상큼하고 시원했다.
루이비통은 예술과 자본이 만들어낸 권력이다. 루이비통은 파리지앵의 입맛에만 새로운 것이 아니고, 프랑스 바깥 나라들, 독일이나 스페인, 핀란드, 러시아부터 미국, 멕시코, 브라질, 전 세계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 뉴욕의 5번가 루이비통 매장은 온통 문어다리 쿠사마 외계인으로 점령당했다. 징그러운 느낌 속에 사람들을 전율케 하고 흥분시킨다. 미감에서는 추하고 못생긴 것과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것도 아름다움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프랑스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명품은 더욱 위대하게 빛난다.
파리 시내 어디를 가나 중국인이다. 지구상 어디에나 그들은 있다. 파리를 점령한 중국 관광객들은 너도나도 루이비통 쇼핑백을 들고 있다. 중국인의 부자 패션이다. 프랭탕 백화점이 중국말로 아우성이다. 이제 세상이 중국으로 흘러가고, 중국인들이 싸구려 저가 상품에서 고가 제품 구매 고객으로 바뀌었구나 하는 무서움마저 들었다.
나는 개선문을 지나 샹젤리제 대로를 걸었다. 콩코드광장의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 커피 한 잔을 즐긴다. 누가 이 거대한 감각의 제국을 세웠는가. 자본과 사상과 패션이 교차하는 파리에서 나는 하나의 점이었다.
프랑스는 지금 일본과 연애 중이다. 상점 어디에나 넘쳐나는 일본 상품과 거리패션, 안내문자와 언어, 그리고 뮤지엄과 갤러리에서의 일본 작가 전시회가 그것이다. 책방에 번역된 일본 서적이 산을 이루고 있다.
모네와 마네, 고흐의 인상파 그림전과 에도 후기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의 전시가 오르세미술관과 기메미술관, 그리고 피나코텍미술관에서 줄기차게 꽃 피어나고 있다. 오랑제리미술관의 모네 ‘수련’ 대작은 보는 이의 정신을 잠재우는 마력이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프랑스인들이 좋아했던 일본풍의 밝고 화려한 색채와 선묘는 모두 오늘날 프랑스 예술과 패션의 DNA가 됐다. 19세기 말 파리만국박람회를 수놓았던 일본 상품과 동양의 신비주의는 100년이 지난 오늘 루이비통과 쿠사마라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싹 틔워 전 세계로 씨를 날려 보내고 있다. 예술과 문화가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는 것인가. 우리도 눈 크게 뜨고 더 높은 하늘을 위해 까치발을 뛰어야 할 때다. 루브르와 이슬람
파리는 박물관의 도시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예술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색의 옷을 입고 자기만의 향기를 입힌다. 개성이 넘치다 보니 취향도 가지가지다. 모두들 남을 의식하면서도 자신을 중요시한다. 나는 파리의 다양성을 사랑한다. 세느 강변 튈르리 정원에서 한 블록 떨어진 파리 제일의 편집매장인 콜레트에 가면 저마다의 개성이 섭씨 100도다. 때마침 윈도에는 검정 벨벳 위에 화려한 빨간 장미가 눈길을 잡는다. 평면 재단으로 도드라지게 전시된 똑같은 문양의 우아한 드레스 실루엣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디자인과 예술은 하나다. 멋쟁이 개성들이 몰려든다. 파리 모드의 질 좋은 소재는 품위를 높인다. 경제가 정신을 좌우한다. 예술은 자본이 모인 곳에서 꽃피운다. 런던과 파리, 뉴욕과 홍콩 모두 자본과 예술과 개성이 넘치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미술관과 갤러리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거대해졌다. 루브르박물관이 그중 대표적인 예다.
루브르박물관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가 있다. 루브르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아이 엠 페이가 1989년 나폴레옹광장에 투명 유리 피라미드를 세우고 루브르의 출입구를 만든 일이다.
그 해는 파리의 전설 에펠탑을 설립한 지 꼭 100주년 되던 해였다. 에펠탑이나 루브르 피라미드나 모두 전통과 혁신의 양극에서 빛을 발한 프랑스의 힘이다. 나는 그곳에 가서 모나리자 원작을 한 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삶의 에너지를 1년쯤 연장할 수 있다. 인상파 미술관 오르세에서 보는 프랑스 세잔, 모네, 마네, 고흐 작품 같은 살아 있는 감동과는 다른 맛이지만 루브르는 모나리자와 비너스의 세상으로 세상을 저울질하고 있다. 최근 루브르에 이슬람관이 새로 개관했다. 루브르의 이슬람관은 2002년 자크 시라크 당시 프랑스 대통령의 제안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모로코, 쿠웨이트 등 아랍 각국과 개인의 기부로 10년에 걸쳐 이루어낸 대공사의 결과물이다.
이슬람 세계는 한국에서는 먼 아라비안나이트의 이야기 속 나라다. 양탄자가 날아다니고 마법과 신비가 공존하는 세계, 사막과 낙타와 초승달과 별, 그리고 무슬림의 나라에서는 그믐밤에 빛나는 별빛보다 더 찬란하고 아라비아 원두커피의 진한 향기보다 더 곡진한 향수가 배어있다.
나는 이슬람의 풀과 꽃문양을 좋아한다. 이방 연속무늬로부터 사방으로 끝없이 연결되는 문양의 영속성은 모스크에 인물과 동물의 형상을 금지하는 이슬람 전통으로부터 유래했다. 유럽 디자인의 원조는 이슬람 문양이고, 명나라 경덕진의 청화당초문도 따지고 보면 모두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된 이슬람의 영향이다. 이슬람 문자의 유려한 서체는 사막 위를 스쳐지나가는 모래바람 같고 무슬림들이 차고 다니는 칼끝의 흔적 같다. 루브르 이슬람 특별전에는 초기 유물부터 유리, 금속, 도자, 직물 등 정말 엄청난 유물이 진열돼 있다. 그 가운데 12세기 에스파냐에서 브론즈로 만든 ‘포효하는 사자상’은 이슬람 미술의 정수다. 중동의 이슬람 세력이 절정에 달하던 그때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그리고 중동과 중앙아시아까지 이슬람 세력은 천하를 호령했다.
막강한 힘과 엄청난 부는 이슬람 예술을 화려하면서도 위엄 있게 꽃피웠다. 몽고가 고려를 침입하던 북방 기마민족의 흥망과도 맥을 같이하는데 고려불화, 고려청자, 고려금은세공의 섬세한 미적 감각을 모두 세계사의 한 흐름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슬람 미술의 큰 틀 가운데 하나가 타일이다. 모스크를 장식할 최고의 건축재인 타일은 사막의 건조한 기후와 잘 어울리고, 프러시안 블루의 화려한 장식으로 사막의 오아시스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유리의 성분인 석영은 모래에서 추출하고 회회청(回回靑)이라 불리는 청화는 이란의 카샨에서 출토돼 자연스럽게 타일의 푸른색 유약이 가능했다. 그 타일에 문양을 넣고 별빛 같은 육각형, 팔각형 장식을 더해 사방으로 이어 붙여 엄청난 블루모스크를 탄생시켰다. 루브르 이슬람전에는 그 타일이 전시장 벽을 덮고 관람객들의 마음의 문을 열었다.
페르시아 카펫의 화려함도 이슬람 미술의 한 축이다. 모래바닥에 엎드려 하루 다섯 번씩 성지 메카를 향해 기도의식을 거행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카펫이 발전했다. 양털로 짜던 카펫이 실크로드를 타고 건너온 실크카펫으로 발전해 더욱 화려하고 고급스러워졌다. 이란산 카펫의 붉은색 주조 문양과 바탕은 이슬람 일상의 주거와 장식, 모스크의 바닥재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우리처럼 한옥 대청엔 나무판을, 안방엔 장판지를 까는 문화로서는 카펫이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바닥에 놓아도 자리를 차지한다는 선입견으로 발붙이기 어렵다. 하지만 유럽의 어느 곳이든 신발을 신고 출입하는 주거문화는 카펫의 유용함을 일찍부터 알고 있기에 소더비, 크리스티 같은 유명 경매에서 고가의 이란산 카펫이 자주 거래되고 있다.
루브르의 이슬람전에서 타일과 카펫, 도자기, 유리, 금속류는 지천으로 보물이 가득한데 나무로 된 유물은 드물어 찾기 어려웠다. 사막에 나무가 귀하니 유물도 자연 적을 수밖에 없다. 미술품은 생활양식의 결과물이다. 이슬람 건축이나 도자기 문양 중에 나뭇잎으로 장식한 것이 유난히 많은데 이는 오아시스의 나무가 생명의 상징과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리제품에 대해 잘 모르고 유리로 된 유물이나 유산이 거의 전해 내려오지 않는 이유도 한국은 사막이 아닌 온대 사계절 자연환경 속에서 문화를 꽃피웠기 때문이다. 이슬람 유리병을 보면서 나는 신라 왕릉에서 출토되는 페르시아제 유리병과 유리잔, 유리제품들을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당시 신라는 멀리 당과 교역하고 당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중동아랍으로부터 수없는 아랍 문화를 받아들였고, 그 길의 마지막 경주로 서역의 유물이 흘러들어온 것이다. 수십만 리 떨어진 아랍에서 신라까지 가져온 유리제품이기에 얼마나 소중했으면 신라 왕릉의 부장품까지 오를 수 있었겠는가.
현악기와 타악기의 적적하고 애잔한 선조로 이어지는 사막의 운율은 사막의 대상이 광막한 평원에서 홀로 소리 내어 나오는 적적함이리라. 현악기 기타의 원산지가 아라비아라는 사실은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가늘고 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애잔한 운율이 베두인의 아랍 낙타에서 루브르의 이슬람 전시장까지 도도하게 이어진다. 몽마르트의 추억
파리의 추억은 몽마르트다. 가난한 화가와 시인, 작곡가, 그리고 물랭루즈의 질탕한 선율까지 파리를 사랑하는 모든 예술가의 안식처다. 사람들은 피카소와 로트렉, 드가, 모딜리아니, 그리고 유트릴로, 발라동, 우터 등 근세 격변기 파리를 기억하는 모든 추억을 몽마르트에 간직한다. 나는 그 몽마르트 포도밭 언덕을 걸어서 올랐다. 파리 시내가 한눈에 든다.
파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멀리 라데팡스의 현대식 빌딩이 눈에 간간히 들어올 뿐 아직도 파리는 마차 궤도와 운하를 따라 달리는 근세다. 몽마르트 언덕 몽마르트에서 ‘검은 고양이’전이 지난 9월 시작해서 2013년 1월 13일까지 넉 달간 열린다. ‘몽마르트의 예술과 쾌락’이라는 부제로 당시 화가 발라동, 유트릴로 등이 화실로 쓰던 곳이 보이는 고즈넉한 전시다. 로트렉, 유트릴로, 발라동, 르누아르, 드가가 그린 유화와 드로잉 포스터와 몽마르트의 환락의 풍경이나 술집의 실내 장식과 사진이 샹송과 함께 시간을 멈추게 한다.
역사는 흘러가는 것,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는다. 몽마르트미술관 옆 에릭 사티가 1890부터 1898년까지 살며 작곡했던 몽마르트 코르토 길 6번지 하얀 집을 바라보며 사티의 짐노페디 3번 피아노 선율이 10월의 찬바람에 실려 날아간다. 최선호 111w111@hanmail.net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동 대학원, 뉴욕대 대학원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 스마트뮤지움,
버밍햄 뮤지움 등 작품 소장. 현재 전업 화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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