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은 샤토 무통 로트칠드(Chateau Mouton Rothschild)에 있어 매우 의미 있는 해다. 바로 무통 로트칠드가 2등급에서 1등급으로 승급한 해이기 때문이다. 무통 로트칠드가 1등급 와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과 그 의미를 되새겨본다.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제정된 메도크 지구 등급 체계에서 1등급을 받은 샤토(포도원)는 라투르(Latour)와 라피트(Lafite), 마고(Margaux), 오브리옹(Haut-Brion) 이렇게 4개였다. 샤토 무통 로트칠드가 1등급의 반열에 오른 것은 만국박람회 이후 100년도 훨씬 지난 1973년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와인 등급 체계가 발표된 1855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와인 등급 체계는 발표 당시 수많은 논란을 낳았다. 그 와중에 1855년 9월 등급 체계에 변동이 생겼는데, 샤토 캉트메를르(Ch. Cantemerle)가 5등급의 말미에 오른 것이다. 이때도 무통 로트칠드는 1등급의 지위를 부여받지 못했다.

당시 소유주였던 바롱 나다니엘 드 로트칠드(Baron Nathaniel de Rothschild)는 이에 크게 실망했지만, 샤토 무통의 지위 회복을 위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쉬지 않고 새로운 투자를 하고 정열적으로 건물과 창고를 수리했으며, 우수하고 능력 있는 직원을 채용하고 새로운 포도나무를 심었다. 하지만 샤토 무통의 운은 거기까지였다.

나다니엘이 1855년 낙마사고로 중상을 입고 장애인이 돼 여행을 할 수 없게 됐던 것이다. 나중에는 눈병까지 얻어 거의 실명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의 아들 제임스와 아서는 부친의 기대와는 달리 샤토의 경영에는 관심이 없었다.
[와인 재테크] 샤토 무통 로트칠드의 1973년 등급 변경
무통 로트칠드 역사의 새 장을 연 필립

무통 로트칠드는 100여 년이 지난 1953년에야 제임스의 아들 앙리에게서 태어난 필립에 의해서 다시 1등급을 향한 열망을 불태우게 된다. 무통 로트칠드가 오늘날 권위를 되찾은 것은 바롱 필립 드 로트칠드(Baron Philippe de Rothschild) 덕분이다.

그는 샤토 무통만이 아니라 보르도 와인 전체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오랫동안 주인이 직접 돌보지 않아 관리인의 횡령으로 파산 직전까지 몰렸고, 1920년 1월 미국의 금주법 발효로 중요한 시장인 미국을 잃게 된 샤토 무통에 1922년 10월 22일 20세의 필립이 도착한다.

필립은 곧 ‘비단 셔츠를 입은 농부’가 돼 놀라운 아이디어와 개방성을 보여준다. 그가 맨 처음 착수한 것은 기술위원회의 설치였다. 이 위원회는 현재까지 존속하며 와인의 품질 향상을 도모하고 있다.
[와인 재테크] 샤토 무통 로트칠드의 1973년 등급 변경
필립이 보르도 와인업계에 끼친 혁명적인 변화는 바로 샤토에서의 직접 병입이다. 지금은 웬만한 프랑스 와인이 다 병에 ‘미장 부테이유 오 샤토(mis en bouteilles au chateau)’라고 기재돼 있어 샤토에서 병입됐음을 표시하고 있는데, 그 이전에는 샤토에서 커다란 통째 와인을 팔았고, 병입은 네고시앙의 몫이었다. 즉, 샤토의 주인은 병에 담긴 와인이 자신의 와인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필립은 이런 제조방법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확한 모든 와인은 자신의 샤토에서 직접 병입한다”는 목표를 세우게 된다. 이는 네고시앙에게서 주도권을 뺏어오는 것이어서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필립이 샤토 마고, 샤토 라투르, 샤토 오브리옹과 접촉하면서 그들도 필립의 의견에 귀 기울인다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 문제는 라피트였다. 오랜 라이벌 관계에 있던 라피트에서는 그런 사업을 위해서는 병입 장치 도입, 창고시설 확충 등 대규모 투자가 불가피한데 자칫 막대한 자금만 투입하고 실익이 없을까 봐 필립의 제안에 반대하게 된다. 이 일로 그의 아버지 앙리는 경영에서 손을 떼라고 권고했지만 필립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샤토 마고, 샤토 라투르, 샤토 오브리옹에서 지속적으로 필립의 손을 들어주자 결국은 샤토 라피트도 협조하게 됐다. 필립은 협력자들을 한데 모아 대화를 시도했다. 샤토 소유자들끼리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일이 없었던 보르도에서 필립의 노력은 작은 혁명이었다.

보르도의 유명한 레스토랑 ‘샤퐁 팽’에서 식사를 마친 후 샤토에서의 병입을 약속하는 계약에 서명했지만 라피트는 서명 대신 구두 동의로 갈음했다. 출석한 5명의 샤토 대표자들은 추후 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지기로 합의했다. 이 주요 샤토의 제휴는 ‘다섯 동맹’이라 불리며 보르도 와인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와인 재테크] 샤토 무통 로트칠드의 1973년 등급 변경
1등급에 등극한 1973년 라벨은 피카소가 디자인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유태인인 로트칠드 가문의 소유주들은 독일군을 피해 도망가는 신세가 됐다. 그 사이에 필립의 아내 릴리도 희생되고 만다. 전쟁이 끝나고 샤토에 돌아온 필립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조치를 취하게 된다.

1920년대에 도입하려다 실패한 예술작품으로 라벨을 붙이는 것이었다. 파리의 유명한 화가들에게 라벨을 그리게 하고 그에 대한 보수도 독특한 방법으로 지급했다. 무통 로트칠드 10상자가 보수로 지급됐는데 5상자는 라벨 디자인 연도이고, 나머지 5상자는 좋아하는 연도를 고를 수 있게 해주었다.

1945년 라벨을 디자인한 필립 줄리앙을 시작으로 장 콕토, 살바도르 달리, 바실리 칸딘스키, 조르주 브라크, 앙드레 마송, 호안 미로, 마르크 샤갈, 니키 드 생팔, 파블로 피카소(1973년 빈티지), 앤디 워홀, 게오르그 바젤리츠 등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들이 무통 로트칠드의 라벨을 디자인해 주었다.

필립의 50세 생일이 지나고 나서 ‘다섯 동맹’에서는 이상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샤토 무통은 1등급이 아니므로 앞으로 회원에서 제외하자는 것이었다. 샤토 라피트의 새 주인 엘리 드 로트칠드의 도전이었다. 며칠 뒤 와인 전문지 쉬드 웨스트(Sud Ouest)에는 4개의 1등급 샤토들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2등급 샤토인 무통과 결별했다는 기사가 떴다.

이 사건은 필립으로 하여금 아직도 자신에게 목표가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됐다. 바로 1855년 등급 분류의 변경이었다. 첫 번째 조치는 무통 로트칠드 와인을 라피트 와인보다 싸게 팔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이 전쟁이 20년이나 걸리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등급 변경에 대한 제의를 하려면 ‘크뤼 등급 조합’에 문의해야 한다.

하지만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필립이 불가능한 일에 도전한다고 생각했다. 크뤼 등급 조합이 필립의 제안을 표결에 붙이는 비상회의를 소집하는 데만 몇 년이 소요됐다. 결국 총회는 1959년 가을 포이악에서 개최됐고 겨우 두 표 차이로 상급기관에 등급 변경을 출원할 수 있게 됐다.
[와인 재테크] 샤토 무통 로트칠드의 1973년 등급 변경
그러나 상급 심의기관에서의 심의는 도중에 중단됐고, 문서로 의견을 제출하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이후 10년에 걸친 문서 제출, 청원서 제출, 심사를 독촉하는 편지 발송 등 지리한 싸움이 계속됐다.

결국 샤를 드골에 이어 조르주 퐁피두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1969년에야 그의 청원이 주목을 받게 된다. 퐁피두가 예전에 로트칠드가(家)의 회사인 트랑스오션의 사장을 역임한 덕택이다.

하지만 1855년 등급 설정 시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농업성을 비롯한 어떤 국가기관도 본건에 관여하고 싶지 않아 해서 결국 보르도 상공회의소가 이 일을 떠맡게 됐다. 법률로 심사 기준을 정하고 와인 경합을 다시 치르자는 제안도 나왔지만 1등급 샤토들의 단호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결론이 날 것 같지 않던 공방은 지리한 싸움 끝에 명성을 잃을까 두려워한 4개의 1등급 샤토에서 전격적으로 샤토 무통의 1등급 진입을 반대하지 않겠다고 결의함에 따라 급진전을 보게 됐다.

1973년 6월 21일 당시 농업상이었던 자크 시라크가 1등급으로서의 샤토 무통의 지위를 확정하는 규정에 공식 서명했다. 이로써 필립의 20년간의 꿈이, 그리고 1855년부터 증조할아버지 나다니엘이 소원하던 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새로운 좌우명을 만들었고, 피카소가 디자인한 1973년 빈티지의 와인 라벨에 이를 기재하게 된다.
샤토 무통 로트칠드가 2등급에서 1등급으로 등극한 1973년 빈티지 라벨.
샤토 무통 로트칠드가 2등급에서 1등급으로 등극한 1973년 빈티지 라벨.
‘난 1등이다, 2등이었으나. 무통은 변하지 않는다(Premier je suis, Second je Fus; Mouton ne Change).’


김재현 하나금융 WM센터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