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나 가보지 못한 곳.

타레가(에스파냐의 기타 연주자이자 작곡가)의 감미로운 기타 연주로 막연히 가지고 있던 알함브라 궁전의 인상은, 도무지 현실에서는 가능하리라 상상도 못했던 숨 막히는 아름다움으로 눈앞을 막아선다.

붉은 사암, 흰 대리석 위에 펼쳐진 눈부신 아라베스크의 향연은 그 어느 모스크, 아니 그 어느 카테드랄이나 템플도 이룬 적이 없었던 섬세함과 화려함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The Explorer] 스페인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얼핏 궁전보다는 요새에 더 가까워 보였다. 원통과 직사면체 몇 개를 연결해 놓은 듯 투박한 외관. 전야제(?) 삼아 전날 미리 보아둔 궁전의 야경도, 멋진 조명에도 불구하고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십자군이 시리아에 남겨 놓은 요새인 크락 데 슈발리에(Crac des Chevaliers)가 떠오를 정도.

하긴 8세기에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무슬림 세력이 15세기 말 스페인을 떠나기 전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곳이 그라나다(Granada)였으니, 이곳의 언덕에 자리 잡은 알함브라 궁전은 궁궐이기 전에 요새로서의 기능이 훨씬 더 중요했을 것이다.

피부색이 제각각인 사람들과 긴 줄을 서서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서도 첫인상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사이프러스가 줄지어 선 궁전 담벼락은 붉었다. 붉은 사암. 인도 아그라의 레드 포트(Red Fort)도 붉은 사암으로 지어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알함브라(Alhambra)’라는 이름도 ‘붉은 성’이라는 뜻의 아랍어라고 했다.
알함브라 궁전으로 오르는 길. 깍둑썰기(?)를 해 놓은 사이프러스가 나란히 줄 서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알함브라 궁전으로 오르는 길. 깍둑썰기(?)를 해 놓은 사이프러스가 나란히 줄 서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붉고 높다란 담장을 몇 개 지나가니 아기자기한 정원이 나타났다. 무슬림이 지은 궁전이라면 정원이 빠질 수 없지. 사막의 무슬림에게 푸른 정원은 오아시스의 다른 이름이었으니. 제법 키가 큰 사이프러스를 깍둑썰기 해 놓은 모양이 독특하다.

이건 아무래도 무슬림을 몰아낸 스페인 사람들이 꾸며놓은 것 같다. 베르사유 냄새가 물씬 나는 것을 보니. 작고 길쭉한 직사각형의 연못도 보였다. 연못 중앙을 향해 소박한 분수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무슬림이 만들어 놓은 것이란다. 전기 동력 없이 분수를 만들어 놓은 것이 신기하다.
알함브라 궁전 곳곳에는 자그마한 분수가 솟아오른다. 사막에 익숙한 무슬림들에게 연못과 분수는 정원 필수품이었다.
알함브라 궁전 곳곳에는 자그마한 분수가 솟아오른다. 사막에 익숙한 무슬림들에게 연못과 분수는 정원 필수품이었다.
왕들의 여름 별장이었다는 헤네랄리페에 들어서자 풍경이 일별했다. 우선, 붉은색이었던 사암이 황금색으로 변했다. 볕이 달라져서일까. 그것만은 아닌 듯싶다. 마치 인도의 사막도시 자이살메르에서 보았던 황금색 사암들처럼, 헤네랄리페의 실내를 마감한 사암들도 금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돌의 색깔이 아니었다. 그 돌에 새겨 넣은 장식이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치 찰흙을 빚어 정교한 부조를 만들어 놓은 듯, 도무지 저 정교한 문양을 사람 손으로 일일이 새기는 것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아라베스크의 향연이었다. “도대체 돌에다 무슨 짓을 한 거야”라는 탄성이 저절로 나오는 모습이었다.

이것에 비하면 스페인의 카를로스 5세가 허니문으로 이곳을 찾았다가 지었다는 ‘카를로스 5세 궁전’은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둥근 회랑과 열주는 부조 하나 없이 앙상하기만 했다. 다시 보니 건물 자체가 알함브라 궁전과는 전체적으로 어울리지도 않는다.
그라나다를 점령한 에스파냐인들이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세운 대성당. 1523년에 착공, 200년 가까이 걸려서 완성했단다. 탑은 아직도 미완성이라고.
그라나다를 점령한 에스파냐인들이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세운 대성당. 1523년에 착공, 200년 가까이 걸려서 완성했단다. 탑은 아직도 미완성이라고.
입구의 아치뿐 아니라 건물의 외벽을 빈틈없이 메운 아라베스크의 향연. 우상 숭배를 금한 이슬람의 율법은 인류에게 새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입구의 아치뿐 아니라 건물의 외벽을 빈틈없이 메운 아라베스크의 향연. 우상 숭배를 금한 이슬람의 율법은 인류에게 새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집시들의 마을인 사크로몬테 언덕. 지금도 남아 있는 집시들의 동굴집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볼 수 있다.
집시들의 마을인 사크로몬테 언덕. 지금도 남아 있는 집시들의 동굴집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볼 수 있다.
알함브라에 두고 온 황홀한 아름다움

궁전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알카사바(Alcazaba)는 기본적으로 이곳이 요새였음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군인들이 묵었다는 숙소는 지금은 미로 같은 담장들만 남아 있다. 이곳에 있는 24개의 망루 중 으뜸인 ‘벨라의 탑’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압권이다.

다시 붉은 담장이 높다란 요새의 통로를 지나면 코마레스(Comares) 궁전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각지에서 찾아온 사절단들을 맞는 왕의 접견실. 벽과 기둥, 아치와 천장에 빈틈없이 새겨 넣은 조각들이 웅장한 합창단처럼 소리치는 듯하다. ‘존엄한 왕께서 나오신다. 어서 엎드려 맞이하라.’ 도대체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왕을 경외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궁전의 안뜰에는 비교적 커다란 직사각형의 연못이 있고, 주변에는 사철나무가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여기에 건물이 비쳐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언젠가 보았던 알함브라 궁전의 사진이 바로 여기였구나.
코마레스 궁전의 정원인 아라야네스 안뜰. 직사각형의 정원에 비친 궁전의 모습이 아름답다. 실내를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아라베스트 문양은 훨씬 더 아름답다.
코마레스 궁전의 정원인 아라야네스 안뜰. 직사각형의 정원에 비친 궁전의 모습이 아름답다. 실내를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아라베스트 문양은 훨씬 더 아름답다.
라이온 궁전의 정원. 유태인들이 선물했다는 라이온 분수는 물시계 기능도 했다고 한다.
라이온 궁전의 정원. 유태인들이 선물했다는 라이온 분수는 물시계 기능도 했다고 한다.
유태인들이 무슬림의 왕에게 선물했다는 사자우물이 있는 곳은 라이온(Lion) 궁전이다. 무슬림이 이곳을 처음 점령할 때 유태인의 도움을 받았고, 그 뒤로 이곳을 떠날 때까지 유태인과 무슬림은 평화롭게 공존했다고 한다. 하긴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란 문구는 기독교도들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구하다. 무슬림은 누구보다 타 종교에 관대했다.

종교가 다른 사람들에게 약간의 인두세를 받았을 뿐이다. 그마저 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한다면 받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우마이야 왕조에서 세수가 줄어들 것을 우려해 한동안 이슬람 개종을 금지한 적도 있었을까. 예수를 죽였다는 죄목(!)으로 중세 내내 기독교도에게 각종 시달림을 받아온(그중에는 우스꽝스러운 뾰족 모자를 써야 한다는 규칙도 있었다) 유태인들에게 무슬림은 든든한 친구였을 것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아라베스크 문양은 이곳 라이온 궁전에서 그 절정을 보여준다. 도무지 사람의 손으로 새겨 넣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운 천장 장식 아래서 관광객들은 누구나 할 말을 잃는다. 마치 석회동굴의 종유석 모양으로 천장을 덮고 있는 장식을 모카라베(Mocarabe)로 부른다는데,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아치 조각의 일부. 알함브라의 부조는 석회동굴의 종유석 같기도 하고, 티베트 불교의 만다라를 닮기도 했다.
아치 조각의 일부. 알함브라의 부조는 석회동굴의 종유석 같기도 하고, 티베트 불교의 만다라를 닮기도 했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면 아담한 연못과 야자수가 진짜 오아시스처럼 보이는 파르탈 정원이 나온다. 연못 위로 아름답게 비치는 건물은 ‘귀부인의 탑’이라는 별명을 가졌단다. 그리고 이어지는 몇 개의 건물, 몇 개의 정원을 지나면 다시 사이프러스가 줄지어 서 있는 궁전 입구다. 마치 궁전을 지나온 몇 시간이 꿈인 듯 방금 내가 지나온 곳에 이토록 황홀한 아름다움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혹 타레가가 연주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도 이런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여인만큼이나 가슴 떨리는 아름다움. 바로 그것이 우리가 알함브라 궁전에 두고 오는 추억인지도 모른다.
왕들의 여름 별장, 헤네랄리페의 중앙 정원에는 작은 수로가 흐르고, 주변을 가득 메운 풀과 꽃과 나무들 사이로 앙증맞은 분수가 솟아 오른다.
왕들의 여름 별장, 헤네랄리페의 중앙 정원에는 작은 수로가 흐르고, 주변을 가득 메운 풀과 꽃과 나무들 사이로 앙증맞은 분수가 솟아 오른다.
Granada info

How to Get There
물론 인천에서 그라나다로 가는 직항은 없다. 대한항공을 이용하면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로 가서 그라나다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야 한다. 인천에서 마드리드까지 13시간, 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까지 1시간쯤 걸린다. 마드리드에서 기차를 타면 4시간 30분 정도 걸리니, 여유가 있다면 안달루시아의 풍광을 즐겨보는 것도 좋다.



Where to Stay
세계적인 관광지답게 다양한 호텔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호스페스 팔라시오 데 로스 파토스(Hospes Palacio de los Patos)는 아름다운 외관과 스파를 갖춘 럭셔리 호텔. 시내 중심에 있는 그라나다 성당에서 650m 떨어진 19세기 궁전이 바로 호텔 건물이다. 물론 실내는 최신 인테리어를 자랑한다.



Another Site
알함브라 궁전 말고도 그라나다에는 빼먹지 말아야 할 곳이 꽤 있다. 그중에서도 집시들이 동굴을 파고 살았던 사크로몬테 언덕에서 그들의 플라멩코 공연을 구경하는 것. 그라나다의 옛 건물들이 남아 있는 알바이신 지구를 누비다 저녁이 되면 맞은편 알함브라 궁전의 야경을 보는 것도 잊지 말도록.



글·사진 구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