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자 이광기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떤 일에 이끌릴 때가 있다. 보통은 ‘계기’라고 표현하는 일이겠다.

연기자 이광기 씨에게도 3여 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신종플루로 둘째아이를 잃는 참척(慘慽)의 아픔을 겪었던 것. 하지만 지금은 행복을 나누느라 누구보다도 바쁘다. 떠난 아들을 대신해 더 많은 아이들을 가슴으로 만났고, 그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짓는 일에 푹 빠져 있기 때문이다.
[Nobless Oblige] 연기와 그림, 예술로 나누는 진짜 행복
아침 햇살이 유난히 좋았던 날, 연기자 이광기 씨를 만나러 간 곳은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한국월드비전이었다. 1층에 마련된 패밀리룸에 도착하자 그는 눈인사로 기자를 맞이한 뒤 한참 동안이나 휴대전화를 놓지 못했다.

대화에서 군대 계급(?) 명칭이 자주 나오는 걸 보니 상대방은 아무래도 단비부대 관계자가 아닌가 싶었다. 지난 달 그는 여행 사진작가 신미식 씨와 함께 유엔 아이티재건지원단, 일명 단비부대의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단비부대는 2010년 초 첫 파병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아이티 레오간 지역에서 지진 피해 복구와 의료 지원을 포함해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접촉하기 어려운 높은 분들과 통화도 하고 대단해 보인다”는 농담에 그는 껄껄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 어쩌다 보니 단비부대 홍보대사까지 하게 됐는데, 군이 아무래도 민간과는 달라 일 진행에 어려운 부분도 많네요. 그래도 파병 역사 50년 만에 처음으로 위촉된 민간 홍보대사잖아요. 어렵지만 최선을 다해야죠.”
아이티의 케빈 마일롯 스쿨 기공식에서 아이들과 함께 한 기념 촬영. 큰딸 연지도 함께 했다.
아이티의 케빈 마일롯 스쿨 기공식에서 아이들과 함께 한 기념 촬영. 큰딸 연지도 함께 했다.
아들을 보내고 가슴으로 만난 아이들

9월 아이티 재건 임무 교대를 준비 중인 단비부대 이야기로 물꼬를 튼 대화는 그가 외투 안에 입고 있던 티셔츠 이야기로 옮겨갔다. 가슴 부분이 살짝 보였는데도 눈이 가는 아이템이다. 뾰족뾰족한 머리를 가진 남자 얼굴 반쪽이 그려진 티셔츠에는 ‘러브 앤드 블레스(Love and Bless)’라는 문구가 함께 찍혀 있었다.

“이 셔츠에 있는 그림이 제 얼굴이에요. 하늘나라로 간 석규가 아빠 얼굴이라고 그린 거였죠. 그림 그리던 날을 아직도 기억해요. 2009년 10월 24일이었죠. 처음엔 아이티에 아이들을 만나러 갈 때 선물로 주려고 몇백 장씩 만들다가 올해 6월에 본격적으로 제작해서 일반인들에게도 판매하고 있어요. 한 장에 2만 원인데 수익금은 아이티 아이들을 위해 쓰여요. 동료 연예인들이 솔선수범해서 티셔츠 입은 인증 샷을 찍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올려주며 적극적으로 도운 덕분에 두어 달 만에 4000장이 팔렸어요.(웃음)”
아이티 아이들의 ‘아빠’로 누구보다 열정적인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이광기 씨는 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미래를, 커뮤니티 아트를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설계하고 싶은 꿈을 그리고 있다.
아이티 아이들의 ‘아빠’로 누구보다 열정적인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이광기 씨는 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미래를, 커뮤니티 아트를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설계하고 싶은 꿈을 그리고 있다.
2010년 1월. 이 씨에게 아들 석규를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이티 재건 봉사를 함께 떠나자는 제안은 솔직히 두려움 그 자체이기도 했다. 아이티 현장에서 어떤 무게로 덮칠지 모를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진과 폭동의 위험도 배제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자연 가족들의 만류가 있었다. 하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꿈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아들의 얼굴에서 강한 메시지를 받았고, 그는 지진 통에 엄마, 아빠를 잃은 아이들에게 석규가 그린 아빠 얼굴이 찍힌 티셔츠를 주며 ‘아빠’를 나눠 줘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들이 입던 옷가지 700여 장까지 챙기니 이민 가방이 큰 것으로 두 개나 됐다. 가뜩이나 먼 아이티까지 덩치 큰 이민 가방들은 거추장한 ‘짐’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마음고생, 몸 고생을 하며 도착한 아이티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참담했다.

“그 참담한 현장을 보고 되레 그들 앞에서 제 아픔이 작아보이더라고요. 열흘 정도 머물렀는데 지진과 폭동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만나며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려고 애쓰다 보니 시간도 가고 제 아픔도 치유가 되는 걸 느꼈어요. 저는 물질로 도왔지만 정작 제 자신은 그들로부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받은 거죠.”

그 일이 그에게 큰 ‘계기’가 돼 아이티 긴급구호 봉사를 다녀온 뒤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의 사망 보험금 전액을 아이티 돕기에 쾌척했다. 당시 세인의 관심이 많이 집중돼 있던 그의 쾌척은 사람들에게 훈훈한 자극과 독려가 돼 줬다.

이후 나눔을 향한 그의 행보는 더욱 바빠졌다. 그 가운데 공인으로서 실천하는 이 씨의 활동에서 남다른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으니, 바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라는 사실이다. 2010년 5월에 포문을 열었던 ‘아이티 돕기 자선경매’를 기획한 것이 그 예다.
올 2월에 완공한 케빈 마일롯 스쿨.
올 2월에 완공한 케빈 마일롯 스쿨.
붕괴된 아이티 학교 재건에 팔을 걷어부치는 적극적인 후원

“원래 저도, 아이들도 그림을 좋아했어요. 마침 서울옥션 대표님도 알고 있었고, 미술작품 컬렉팅을 해 왔던 터라 주변에 아는 작가들도 있었죠. 그림을 좋아하니까 그림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기획하게 됐고, 여러 곳에서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셨어요. 3년째 세 번을 했는데 그래도 결과가 꽤 괜찮았어요. 세 번 모두 1억 원 이상 후원금을 마련했는데, 발전적인 것은 매회 후원금이 더 많이 모인다는 사실이에요. 지금은 입소문도 나서 동참하고 싶다고 연락을 먼저 해오는 작가분들도 계시죠.(웃음)”

자선경매라고 해서 억지로 그림을 구입케 할 수는 없다. 어느 경매나 마찬가지겠지만, 좋은 작가의 좋은 작품을 섭외하는 것이 관건이다 보니 본업인 연기보다 작가 섭외와 행사 준비에 더 많은 발품을 파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티 돕기 자선경매를 통해 판매된 작품들의 가치가 대체로 상승한 덕분에 기획자인 이 씨도 면목이 섰다. 또 하나 그가 고수하는 원칙은 작품 판매액의 절반은 반드시 작가의 몫으로 챙겨주는 것.

제아무리 좋은 명분이라고 하지만 매회 작가들의 100% 양보와 기부를 바란다면 향후 진정으로 좋은 작품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참여 작가 입장에서도 좋은 명분에 동참하면서도 작품 판매 수입이 돌아오니 이 씨의 자선경매에는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고.

애초에는 대부분 지인들이 참석했던 경매에도 이제는 일반인들이 참석할 정도다. 그 가운데는 매회 경매행사를 찾아 그림을 한 점씩 구매하는 그의 팬도 있다. 일이 점점 커지다 보니 작가 섭외에 더더욱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다음 경매행사에는 중국의 블루칩 작가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지진과 폭동, 가난이 현재 아이티의 모습이잖아요. 아이들에게만큼은 미래를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지진과 폭동, 가난이 현재 아이티의 모습이잖아요. 아이들에게만큼은 미래를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자선경매로 모아진 후원금은 아이티에 학교를 짓는 데 쓰였어요. 지진과 폭동, 가난이 현재 아이티의 모습이잖아요. 아이들에게만큼은 미래를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교육이 절실한데 지진 통에 학교가 붕괴된 곳이 많더라고요. 1회와 2회 경매를 통해 모인 후원금으로 지난 2월에 첫 번째 학교를 완공했어요. 붕괴됐던 초등학교를 다시 지어준 거죠. 현재 250여 명이 수업을 받고 있는데, 아이들 먹거리가 부족하다고 해서 완공식 때 갔던 지인들과 십시일반으로 염소 30마리도 사주고 왔어요. 아이들이 염소도 키우고 염소젖을 짜서 간식으로 먹을 수도 있다고 해서요.(웃음)”

학교 앞 현판에 적힌 학교 이름은 ‘케빈 마일롯 스쿨’. 석규의 영어 이름을 넣어 지은 학교 이름 아래에는 1회와 2회에 걸쳐 자선경매에 작품을 내 준 작가들의 이름을 모두 새겨 넣었다. 먼 나라 한국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담아 학교를 지었는지 아이티 아이들과 함께 나누기 위함이다. 한국월드비전의 홍보대사로서의, 아빠로서의 진심과 꿈도 함께 담았음은 물론이다.

“요즘 커뮤니티 아트에 관심이 많아요. 쉽게 말하면 거리 그림인데, 소외된 사람들에게 그림을 통해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요. 스트리트 아트 작가들과 정기적인 프로젝트로 진행할 생각입니다. 제가 하는 연기도 예술이고, 미술도 예술이니 두 가지가 결국 하나의 맥락인 셈이죠. 예술이라는 콘텐츠를 통해 세상도 아름답게 만들고, 행복도 나누는 게 꿈이에요.”

인터뷰를 마감하며 그는 다음 자선경매에 꼭 오라고 했다. 또 한 가지. 인기 TV 예능 프로그램인 ‘남자의 자격’에 큰딸 연지와 함께 나가게 됐다며 놓치지 말고 봐 달라고 했다. 어디 ‘남자의 자격’뿐이랴. 적어도 지금 이 순간부터는 그를 예사롭게 보지 않을 작정이다.



글 장헌주 기자 chj@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