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화는 오랫동안 들풀에 천착해 화업을 이어왔다. 최근에는 작약 등 민화적인 소재를 화폭에 담으며 컬렉터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산골에서 나고 자란 유년의 경험이 그림의 바탕이라고 말하는 작가 김태화를 만났다.


작가 김태화의 고향은 충북 괴산이다. 괴산에서도 산고개를 몇 개 넘어야 닿는 아주 외진 마을에서 그는 유소년기를 보냈다. 형들과도 터울이 많이 진 터라 자주 혼자였던 산골소년에게 자연은 최고이자 유일한 놀이터였다.

늘 산과 들을 보며 자란 산골소년이 그림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는 중학교 시화제였다. 그의 시화 컷을 본 미술 선생이 그림에 대한 재능을 간파한 것이다. 그림에 대한 재능은 고등학교 미술 선생의 눈에도 띄었다.

원래 그는 사학과 진학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사학과에 다닌 형을 따라 자주 탁본을 하러 다녔는데, 그게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단다. 화가의 꿈도 있었지만 미술반 선배들이 무서워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당시는 큰형 집에서 지냈는데, 저녁에 집에 갔더니 미술 선생님이 계시는 겁니다. 이미 두 분이 저를 미대에 보내기로 합의를 봤더군요. 그 길로 미술반에 들어가 선배들한테 맞아가며, 또 방학 때는 서울에 있는 학원에 다니며 그림을 그렸죠.”
들풀 작가 김태화, 작품은 작가가 살아온 삶 위에서 완성된다
옥상 화단에서 시작된 들풀 시리즈

그림 그리는 재주가 남달랐던 덕에 그는 어렵지 않게 충북대 미술교육학과에 들어갔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학비를 벌던 그는 1989년 더 큰 꿈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치며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본격적으로 캔버스 앞에 선 게 2000년 무렵이다.

그 무렵 김 작가는 판화의 표현 방식을 접목해 그림을 그렸는데, 주로 새와 나무 등을 소재로 삼았다. 그런데 그 소재와 정서적인 교감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려도 질리지 않고 자기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그런 일체감이 생기지 않았다. 표현은 딱딱했고, 감각적이기보다 기계적으로 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순수하게 자신이 가진 재주만으로 그림을 풀어가자고 마음먹었다. 그 후 소재를 고민하던 그는 자신만의 경험, 그 날것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들풀이다.
There and here, 117×80cm, 2011년, Acrylic on Canvas
There and here, 117×80cm, 2011년, Acrylic on Canvas
There and here, 70×70cm, 2011년, Acrylic on Canvas
There and here, 70×70cm, 2011년, Acrylic on Canvas
때마침 그는 선배와 옥상에 화단을 가꾸고 있었다. 그때가 가을 무렵이었다. 평상에 앉아 추수가 끝난 화단을 보는데, 강아지풀이며 바랭이풀 등 들풀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철이 지나 말라버린 들풀은 한쪽은 갈색을 띠고, 다른 한쪽은 여전히 초록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들풀을 갖고 놀던 유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만의 경험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흔히 들풀은 시나 소설에 민초로 표현되기도 하잖아요. 제가 바로 농민의 아들이잖아요. 여러 생각을 정리하면서 일반적인 상징보다는 들풀만이 가진 조형성에 집중하자고 마음먹었죠. 그걸 계기로 본격적으로 들풀을 그린 게 2004년 무렵부터예요.”

김 작가가 그린 들풀은 언뜻 보면 하이퍼리얼리즘에 가까운 회화로 비친다. 하지만 실제 작업을 보면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들풀의 가는 줄기는 동양화에서 사군자를 치듯이 한 호흡에 탄생한다. 대부분의 줄기는 난을 치듯 한 호흡에 탄생한다. 그렇게 줄기를 그린 후 콤퍼지션을 하면서 화면을 채운다.

몇 차례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통해 들풀 시리즈를 선보인 그는 2008년 대학원에 진학한다. 대부분 토론으로 수업이 진행되는 대학원에서 그는 그림에 대한 내공을 키울 수 있었다. 그는 대학원 진학을 계기로 좀 더 그림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했다.
There and here, 41×53cm, 2011년, Acrylic on Canvas
There and here, 41×53cm, 2011년, Acrylic on Canvas
들풀, 162×112cm, 2010년, Oil on Canvas
들풀, 162×112cm, 2010년, Oil on Canvas
대학원 진학과 민화에 기반한 작품의 탄생

현재 작업에 사용하는 민화적인 소재는 대학원을 졸업한 2010년이 시작이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졸업전인 청구전을 끝내고 선배를 따라 우연히 인사동 경매 시장에 갔다. 그곳에서 그동안 보지 못한 민화의 매력을 본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양화 하면 석파 이하응의 사군자만 떠올릴 때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본 민화가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책에서 볼 때와 달리 무척 세련되고, 색채도 뛰어났어요. 제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민화를 그리지 않았을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곳에서 민화를 몇 점 샀어요. 그걸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그리면 어떨까 싶었던 거죠.”

민화는 기본 도안이 있고 그 위에 채색을 한다. 또한 각 소재마다 무병장수, 성공 등 갖가지 의미를 부여한다. 그걸 재해석한 게 김 작가의 그림이다. 우선 그의 그림은 도안이 없고, 재료도 유화를 쓴다. 또한 소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만큼 자유롭게 소재 선택이 가능하다. 최근 작품들이 지닌 인테리어적인 경향도 감안했다.
들풀 작가 김태화, 작품은 작가가 살아온 삶 위에서 완성된다
2010년 여름 무렵부터 그는 들풀 시리즈와 함께 민화 시리즈를 병행하고 있다. 틈나는 대로 인사동에서 이뤄지는 경매에서 새로운 경향의 민화를 사기도 한다. 2011년 전시에서 작품을 함께 선보였는데 반응이 좋았다. 지금은 다양한 시도를 하며 작품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 완성도는 높여가겠지만, 색은 아마 지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고 김 작가는 말했다.

“어려서 할아버지가 서당을 하고, 아버지가 한학을 해서 먹과 친숙해서인지, 검은색과 흰색이 좋아요. 민화처럼 화려한 색을 쓰라면 어색할 것 같아요.”

색을 써야 파스텔 톤 정도가 고작이다. 유화로 그린 그의 그림에 수묵화의 느낌이 드는 건 그 때문인 듯하다.

“들풀도, 수묵화 같은 화풍도 모두 제 경험에서 비롯된 듯해요. 그림이란 게 결국은 화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니까요.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을 반추하고 정제하고 또 정제해야 자신만의 작품이 탄생하는 거잖아요. 저는 지금도 저만의 조형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현재 그는 자신의 경험을 녹이고 응축해 작품에 매진하고 있다. 현대적인 감각의 병풍 작품 20여 개와 100호 크기의 캔버스 작업도 50여 개 준비 중이다. 그는 이번만큼은 일정에 쫓기지 않고 작품이 완성된 후 전시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아마 내년 초면 작가 김태화의 새로운 작품을 볼 수 있을 듯하다.


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