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ET INSIGHT

최근 주요국 경제를 보면 1990년대 초반 일본 경제가 5대 함정에 빠지며 나타냈던 초기 단계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경착륙에 빠질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모든 정책은 정책당국의 ‘신호’대로 정책수용층이 ‘반응’해야 의도했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특히 리먼브러더스 사태에서 비롯된 글로벌 금융 위기와 같은 비상 국면에서는 이 메커니즘이 잘 작동되느냐 아니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만약 작동되지 않는다면 위기 극복은 그만큼 지연되고 세계 경제는 경착륙에 빠지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 있다.

현시점에서 우려되는 것은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국에서 좀비 국면에 처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경제 연령이 젊은 중국, 인도 등 일부 신흥국에서도 조로화(早老化) 조짐이 일고 있다. 그만큼 정책 효과는 반감된다. 세계 경제가 ‘5대 함정’에 빠져 일본처럼 ‘잃어버린 10년’에 빠질 것이라는 시각이 대두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5대 함정이란 무엇보다 정부의 의도대로 경제주체들이 반응하지 않아 모든 정책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정책 함정(policy trap)’을 들 수 있다. 그중에서 부양 수단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화정책은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져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근 국제결제은행(BIS) 등이 이 우려에 대한 경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처럼 정책 함정과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주체들이 과도한 부채에 시달려 소비나 투자를 하지 못하는 ‘빚의 함정(debt trap)’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또 경제구조를 개혁하는 문제도 최종 목표인 경쟁력 개선 여부와 관계없이 구호만 반복적으로 외치는 ‘구조조정 함정(structure trap)’에 빠져 있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어떤 나라든 이런 상황에 놓이면 경제주체들이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확실성이 증대돼 예측기관들은 전망이 또 다른 전망을 불러일으키는 ‘불확실성 함정(uncertainty trap)’에 빠지게 된다.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등이 지난해까지 유지해 왔던 ‘반기’ 예측 기간을 올해 들어서는 ‘분기’로 단축한 것도 이 이유에서다.
‘연착륙’과‘경착륙’의 갈림길… 세계 경제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최근 주요국 경제를 보면 1990년대 초반 일본 경제가 5대 함정에 빠지며 나타냈던 초기 단계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경착륙에 빠질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유럽 위기 속에서도 비교적 잘 버티어 왔던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국 경기가 주춤거리고 있는 가운데 최근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정책당국자에 대한 믿음은 크게 떨어지는 추세다.

이 상황에서 선진국 기준금리는 ‘제로(0)’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미 유동성이 너무 많이 풀려 추가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한다 하더라도 경기 회복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유동성 함정’에 빠질 것이라는 시각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선진국과 일부 신흥국 중앙은행들이 고민하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갈수록 글로벌 금융사들은 잠재 부실이 늘어나고 있는 데다 유럽 금융사들은 외부 긴급 수혈로 연명하는 상황이다. 선진국 재정수지는 갈수록 적자폭이 확대되고 있고 국민의 빚은 위험수위에 도달했다. 이 때문에 경제주체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여전하고 예측기관들도 직전 전망치의 잉크가 채 굳기도 전에 또 다른 전망치를 내놓기에 바쁘다.

특히 그리스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이미 ‘좀비위기국’으로 취급당하고 있다. 지난 2년 반 동안 몇 차례에 걸쳐 구제금융을 받았음에도 국민은 개혁과 구조조정을 통해 고통을 분담하기보다는 같은 상황에 처해 금 모으기를 했던 한국 국민과 달리 오히려 금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극단적인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벌어지고 있다.

모든 경제현상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샴의 법칙’이 통용된다. 유럽 국가처럼 무늬만 회원국(bad apples)과 건전한 회원국(good apples)을 ‘통합’이라는 한 바구니에 담아 놓으면 건전한 회원국들도 썩는다. 이미 유럽 위기가 장기화됨에 따라 현재 유로랜드 회원국이라 하더라도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무늬만 회원국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그리스가 더 이상 고통을 부담하지 않는다면 다른 회원국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유럽통합에서 탈락시키는 충격요법(shock doctrine)이다. 조지 소로스 등이 제시하는 ‘투 트랙(two track)’, 즉 건전한 회원국들은 통합단계를 밟아가고 무늬만 회원국들은 탈락시키는 방안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정책 함정과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주체들이 과도한 부채에 시달려 소비나 투자를 하지 못하는 ‘빚의 함정’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정책 함정과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주체들이 과도한 부채에 시달려 소비나 투자를 하지 못하는 ‘빚의 함정’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각국 경제에 경착륙 우려가 제기되자 이미 올해 초부터 선진국을 중심으로 ‘부양’ 쪽으로 선회하기 시작한 각국의 거시경제 기조가 갈수록 뚜렷하다. 미국은 지난해 9월에 발표했던 일자리 창출 위주의 재정정책(일명 오바마 경기부양책)을 지속하고 있는 가운데 올 6월 말로 시한인 ‘오퍼레이션 트위스트(operation twist)’ 정책을 연장했다.

일본도 경기 침체의 주범인 엔고(円高)를 저지시키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는 데 이어 최후의 부양 수단으로 소비세 인상을 어렵게 추진했다. 전통적으로 물가 안정을 중시하는 유럽중앙은행(ECB)은 두 차례에 걸쳐 각국 기준금리 인하와 장기대출프로그램(LTRO)을 추진했다. 중국, 브라질 등 신흥국들도 기준금리를 일제히 내리고 있다.

이번 각국의 부양책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단순히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 특히 청년층의 일자리 창출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는 점이다. 올 6월 멕시코에서 열렸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이 끝나고 채택된 ‘로스카보스 공동선언문’에 일자리 창출 위주의 성장정책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일자리를 창출하는 경기부양책이 성공하려면 재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시장과 시스템에 많이 의존하는 통화정책보다는 재정정책의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이 이미 재정 적자와 국가 채무가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는 상황에서는 일자리 창출에 소요되는 재원을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세계 경제를 경착륙에 빠지게 할 변수, 즉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도 많다. 티핑 포인트란 어떤 것이 균형을 깨고 한순간에 전파되는 극적인 순간을 이르는 말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경제 현안이 우려되다가 실제로 발생하면 그 순간에 경착륙에 빠진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선진국들이 이미 재정 적자와 국가 채무가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는 상황에서는 일자리 창출에 소요되는 재원을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선진국들이 이미 재정 적자와 국가 채무가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는 상황에서는 일자리 창출에 소요되는 재원을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첫째, 최악의 상황은 글로벌 공조 방안이 마련되지 않는 경우다. 이미 벤 버냉키 Fed 의장과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 등에 대해 우려가 나오는 데도 이번에도 말만 있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나토(no action talk only)’에 그친다면 세계 경기는 경착륙보다 더한 불황에 처할 수 있다.

둘째, 회원국 탈퇴가 잇따르면서 유로존이 붕괴되는 것도 커다란 변수다. 시기가 늦었더라도 유럽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렉시트(Greece+ exit)’도 하나의 방안이다. 하지만 자칫 포렉시트(Portugal+exit), 스펙시트(Spain+exit) 등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최소한 위기발생국은 유로존에 잔존시키되 독자적인 운영권을 주는 G유로(Greece+Euro)와 같은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셋째, 독일의 리더십이 깨지는 것도 세계 경제와 국제 금융시장에 커다란 부담이 될 수 있다. 차선책이긴 하지만 유럽 위기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독일의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이마저도 흔들린다면 유럽 위기가 최악의 상황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당분간 ‘제2 라인강의 기적’이 계속돼야 하는 것도 이 이유에서다.

넷째, 미국의 재정절벽(fiscal cliff)도 중대한 현안이다. 올해 말로 예정된 연방부채 한도의 확대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대규모 재정 삭감은 불가피하다. 미국 경제가 이 상황을 맞을 경우 ‘경착륙’에 대한 우려가 급격히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8월 이후 사태가 뒷받침해 준다. 오바마 미 대통령이 연임에 성공한다면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이나 공화당 후보로 교체된다면 재정절벽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다섯째, 중국의 경착륙 가능성이다. 중국 당국은 올 2분기 성장률이 7%대 초반으로 떨어지자 금리 인하 등을 통해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다. 미국이 금융 위기를 예상보다 빨리 극복해 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중국 경제의 역할이 컸다. 경착륙이 된다면 ‘최후 보루(last resort)’까지 깨진다는 상실감까지 겹쳐 의외로 충격이 클 수 있다는 의미다.

여섯째, 일본의 엔고 디플레이션도 우려된다. 경제변수는 관리 가능 여부에 따라 ‘통제변수(control variable)’와 ‘행태변수(behavior variable)’로 나뉜다. 유럽 위기 이후 엔화 강세는 행태변수다. 일본 경제 여건과 관계없이 유럽 위기 상황이 악화되면 엔화 강세가 재현됐다. 따라서 노다 정부가 출범 이후 주력해온 엔고 저지책이 무력화됐다. 최후 부양책으로 소비세 인상을 추진하고 있지만 실패할 경우 노다 일본 총리는 조기 하야될 운명에 놓여 있다.

일곱 번째, 신흥국의 대규모 자본 이탈 여부도 언제든지 세계 경제와 글로벌 증시 향방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의 잇따른 위기로 신흥국의 경제 위상이 높아진 데다 외국 자금 유입으로 일부 자산에 거품이 끼었다. 올 4월 중순 이후 유럽계 자금 대거 이탈로 한국 등 신흥국 경제가 크게 흔들린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신흥국에서 자본 이탈을 방지하는 과제는 종전과 다른 각도에서 다뤄질 문제다.

여덟 번째, 1999년 이후 무려 20년 이상 지속돼온 국제원자재 가격의 슈퍼 사이클 국면이 마무리되는 경우다. 원자재 가격이 떨어진다면 물가 안정 등을 통해 세계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슈퍼 사이클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는 과정에서 부(富)가 너무 편중돼 있는 점을 감안하면 역(逆)자산 효과로 세계 경제와 글로벌 증시에 미칠 충격이 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 미국 국채에 낀 거품이 붕괴될 우려도 최근에 제기되는 복병이다. 국제유동성이 풍부한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안전자산이 제함됨에 따라 미국 국채로의 쏠림현상이 심하다. 10년 만기 국채수익률은 사상 최저치인 1%대 초반까지 떨어졌다. 그만큼 국채 가격이 높아졌다는 의미다. 미국 국채 거품이 꺼진다면 가장 우려되는 것은 국제 간 자금흐름을 흐트러뜨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열 번째, 각국이 자국통화 평가절하에 뛰어드는 경우다. 평가절하는 대표적인 ‘근린궁핍화 정책’이다. 그 어느 때보다 각국 간 협조가 긴요한 상황에서 경쟁적인 평가절하와 같은 극단적인 경제이기주의로 나아간다면 글로벌 증시는 각각 경착륙, 제2 리먼 사태를 넘어 대공황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어려울 때일수록 중심국들이 마샬 플랜과 같은 공생적 부양책을 내놓아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schan@hankyung.com